이경 시인/경희대 교수

아이들은 태어나서 말을 배우기 무섭게 질문하기 시작한다. 마치 질문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나는 것 같다. 작고 쉬운 호기심부터 크고 난해한 의문에 이르기까지, 진리에 대한 일대사 탐구가 시작되는 것이다.

엄마! 해는 왜 자꾸만 뜨는 거야? 구름은 오는 거야? 가는 거야? 금붕어는 왜 죽을까? 왜 분꽃은 빨갛고 은행잎은 노랗고, 잔디밭은 초록코야? 왜? 왜?
천방지축 솟구치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면서 아이들은 자란다. 어떤 것은 성장하면서 해결되는 것도 있지만 끝까지 답을 찾지 못하고 죽는 의심도 있다. 처음에는 백과사전을 뒤져가며 대답해주던 엄마도 선생님도 더 이상 질문을 받아주지 않을 때 쯤, 아이들은 그 원대한 호기심을 단념하는 현명함과 함께 아쉬운 대로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모범답안을 외우는 타협을 배운다. 어른이 되면서 생사 문제와 같은 막막한 두려움과 만나게 되면서 더 큰 갈등에 봉착하기도 한다.

이 문제를 끝까지 알아내려는 의지와 모르는 채로 그냥 신에게 맡기기로 하는 믿음 사이에서, 행복한 종이 되느냐, 고독한 주인이 되느냐의 문제다. 전자가 스스로를 낮추어 복종과 구속 안에서 평화를 구하려 했다면 후자는 고통의 원인과 그것의 실체를 파악하여 완전한 자유에 이르고자 함일 것이다.

믿음이라는 말은 의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의심하지 않는 것은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의심은 모든 앎의 씨앗이다. 그러므로 알려고 하면 믿을 수 없고 믿으려고 하면 알 수 없다고 하는 모순이 존재한다. 대개 범속한 우리네 생각은 여기서 양쪽으로 나뉜다. 그러나 성인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의심은 앎의 씨앗
온전한 의심만이
온전한 믿음 이끌어

한 평생 신의 소명을 받드는 삶을 살면서 ‘살아있는 성녀(聖女)'로 불렸던 테레사 수녀가 50년 간 마음속 깊이 고통과 번민의 신앙적 위기를 겪었다는 내용이 책으로 나온다는 것은 놀랍고 감동스럽다. 그분이 고해신부에게 보낸 40여 통의 편지에서 신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는 고통을 호소했다는 내용이 지면에 알려지면서 세상은 또 한 번 충격에 휩싸이고 있다. 기독교인은 물론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추앙을 받는 그 분이 그와 같은 의문을 지속적으로 갖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숭고한 사랑과 자비에 더욱 큰 믿음을 갖게 하는 일이다. 투철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도 늘 의심하는 자신의 소리에 귀를 열어놓았다는 점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지금도 작은 명예나 명분을 위해 안 보이는 것을 보인다고 하거나 안 믿기는 것을 믿는다고 해,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벌거벗은 임금님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의미에서 테레사 수녀의 의심은 인간의 본성이자 깨달음의 근본인 생의 본질적 의문의 실체이자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은 증거일 것이다.

혹시라도 이런 의심이 일어나는 것이 신앙심이 부족한 탓이라고 죄악시해 스스로를 옭매는 밧줄로 삼을지도 모르는 수많은 ‘벌거벗은 임금님'들에게 내가 그랬었노라고 함으로써 그 짐을 들어주려고 하는 따뜻한 사랑의 마음마저 느껴지게 한다.

그리하여 믿음과 의심이 둘이 아니며, 참으로 온전한 의심만이 온전한 믿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가르침을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경 시인 /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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