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호

일본의 대학은 4월부터 학기를 시작한다. 개학을 맞은 도쿄대학 학생들이 학교로 들어가고 있다.

고전 언어 기반으로 
다양한 원전 철저히 분석
인도철학·불교학 큰 성과

일본을 대표하는 도쿄대학(東京大學)은 1877년 4월 설립됐다. 현재 캠퍼스는 모두 5개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도쿄대학이라고 하면 대학본부가 있는 혼고(本郷)캠퍼스를 말한다. 이외에 시부야(渋谷) 인근에 위치해 교양학부를 담당하는 고마바(駒場)캠퍼스, 공학부 계열의 일부 연구소가 모여 있는 지바현의 가시와(柏)캠퍼스 등으로 구성돼 있다. 

도쿄대학은 140여 년의 전통을 지닌 일본 최초의 근대 국립대학이다.

이 중에서 인도문학·인도철학·불교학을 연구하는 연구실은 혼고캠퍼스, 그 중에서도 고풍스런 느낌이 물씬 풍기는 문학부 건물에 자리하고 있다.

140년 전 첫 불교학 강의

일본 최초의 근대 국립대학인 도쿄대학에서 서구 연구방법에 입각해 인도철학·불교학에 관한 교육을 시작한 때는 1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분야는 오랜 역사에 걸맞게 도쿄대학 내에서도 양질의 연구 성과를 거두고 있다. 

도쿄대학 정문 중 하나인 적문(赤門).

이태승 교수가 펴낸 〈일본 메이지 시기 불교의 전개와 근대 불교학의 성립〉을 보면, 도쿄대학의 인도철학·불교학 연구는 도쿄대학 설립 초기인 메이지(明治) 12년(1879)부터 시작됐다. 화한문학과(和漢文學科) 강사 하라 탄잔(原担山, 1819~1892)이 개설한 불서(佛書) 강의가 그 시초다. 당시 도쿄대학 총장은 서구의 학문을 익힘과 동시에 일본의 전통 학문에 대한 교육 역시 중요하다고 판단해 하라에게 불교 강의를 요청했다. 강의는 주 2회 진행했으며, 교재는 〈대승기신론〉이었다. 이 불교학 강의는 대학 설립 초기의 연이은 조직개편 속에서도 철학과 수업과목 중 ‘인도 및 지나 철학’ 교과목으로 이어졌다. 이후 철학과 강의가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으로 나눠지면서 인도철학은 중국철학과 더불어 동양철학을 구성하는 강좌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어 인도철학은 1904년 철학과의 전수(專修)학과가 되고, 1916년 ‘인도철학강좌’가 개설되면서 그 형태를 갖춰 나갔다. 

은행나무는 도쿄대학의 상징이다.

하라 탄잔에 이어 도쿄대학 및 일본의 인도철학·불교학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선구자로 서구적 연구방법론을 도입한 난죠 분유(南条文雄, 1849~1927),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 1866~1945) 등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무렵 일어난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은 일본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놓는다. 이 과정에서 주도세력들은 ‘천황중심제’를 일본 전통의 신도(神道)로 뒷받침하고자 ‘폐불훼석(廢佛毁釋)’이라 불리는 불교 박해를 일으켰다. 이에 일본 불교계는 대외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한편 불교 내부의 쇄신을 위해 각 종파별로 인재를 뽑아 서구에 보낸다. 

도쿄대학을 대표하는 건물 중 하나인 야스다강당. 이곳에서 입학식과 졸업식이 열린다.

당시 영국·프랑스·독일 등 제국주의 열강은 동양에서 차지한 식민지를 연구하고자 동양학·지역학을 발전시켰는데, 인도철학·불교학 연구 역시 이런 맥락에서 진행되었다. 
중국·한국·일본의 불교는 2,000여 년 가까이 한문 경전을 중심으로 신앙적으로 접근해 연구돼 왔다. 반면 19세기에 활약한 막스 뮐러·리스 데이비스·실비앙 레비 등 서구의 동양학자들은 식민지에서 발굴된 산스크리트어·티베트어·팔리어 등으로 기록된 원전(原典)을 바탕으로 인도철학·불교학을 연구했다. 난죠 분유는 옥스퍼드대학의 막스 뮬러 아래에서 수학한 후 일본으로 돌아와, 1885년 도쿄대학에서 산스크리트어 등을 가르치며 서구적 연구방법을 일본 불교학계에 도입했다. 

서구 유학 통해 세계적 학자 배출

다카쿠스 준지로 역시 막스 뮬러를 사사하고, 독일·프랑스 등에서 공부했다. 귀국 후에는 도쿄대학에서 산스크리트어 강좌를 담당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이처럼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사사한 메이지시대 유학생들은 도쿄대학을 중심으로 활약하면서 일본 불교학계에 한문 경전을 통한 불교연구뿐만 아니라, 각종 원전을 바탕으로 한 서구의 연구방식이 뿌리내릴 수 있게 했다.  
특히 다카쿠스는 〈대정신수대장경〉을 편찬하는 큰 업적을 이뤄냈다. 그는 전통적인 대장경들은 보기가 너무 불편했기에, 여러 불교학자들과 함께 고려(高麗)·송(宋)·원(元)·명(明) 시대의 판본들을 교합해 현대적 대장경을 간행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대정신수대장경〉은 현재 전 세계 불교학자들이 한문 경전을 연구할 때 사용하는 원전의 표준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남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지방으로 전해진 남방의 팔리어 경전을 일본어로 번역한 〈국역남전대장경〉을 간행하는 등 불교 대중화에도 힘썼다. 

도쿄대학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듯 교정 곳곳에 아름드리 나무가 서 있다.

다카쿠스 문하에는 스승의 뒤를 이어 세계적인 불교학자가 된 기무라 타이켄(木村泰賢, 1881~1930)과 우이 하쿠쥬(宇井伯壽, 1882~1963)라는 걸출한 제자가 있었다. 두 사람은 라이벌 관계였다. 인도 철학 및 아비달마불교를 연구한 기무라가 문헌 분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종교학·서양철학 등의 방법론을 빌려 불교를 이해·설명하려 했다면, 우이는 엄밀한 문헌 분석을 통해 인도 철학 및 불교 논리학을 연구하여 일본 불교학을 세계적 반열에 올려놓은 걸로 유명하다.
도쿄대학의 이런 학풍은 우이의 제자이기도 한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1912~1999)로 이어진다. 논문과 저서의 수가 1,000편 이상으로 알려진 나카무라는 인도철학·불교학은 물론 역사학·비교 사상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고 방대한 연구를 한 세계적인 불교학자로 유명하다. 
이 세대에는 일본의 불교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특히 많았다. 여전히 대승불교의 기원은 베일에 가려져 있는데 1960년대 도쿄대학의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 1915~2002)는 대승불교의 기원을 불탑 숭배에서 찾아 국제 불교학계에서 명성을 얻었다. 현재 이 학설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하지만 연구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치밀한 분석력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도쿄대학 혼고캠퍼스 내 인문사회학부 건물의 복도.

그 외에도 여래장 사상의 권위자 다카사키 지키도(高岐直道, 1926~2013), 화엄 및 동아시아 불교의 권위자 가마타 시게오(鎌田 茂雄, 1927~2001)등 인도철학·인도불교 및 동아시아 불교에 걸쳐 기념비적 연구 성과를 낸 세계적 석학들이 도쿄대학에서 연구했다.

인도철학·불교학 연구실

도쿄대학 인도철학·불교학 연구실이 서구에 비해 후발 주자로 출발했으면서도, 오늘날 세계 불교학계의 주요한 연구기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요인은 어디에 있을까? 
필자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 1년간 ‘외국인 연구생’이라는 힘든 수험생 과정을 거쳤다. 그 후 정규 석사과정에 입학하기 전, 산스크리트 문헌을 읽는 스터디모임에 참가했다. 첫 발표 때,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대충 넘어가려는 순간 “정 선생, 그 단어를 그렇게 번역한 근거는 어디에 있나요?”라며 한 선배가 빈틈을 놓치지 않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는 산스크리트어 사전과 문법책을 건네며 자신들이 납득할 만한 근거를 찾아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도쿄대학 인도철학과 연구실 전경.

당시 적당히 책장을 넘기며 찾는 시늉을 하다보면 선배들이 답을 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선배들은 답을 주지 않았다. 강의실에는 필자의 침 삼키는 소리만 점점 커져갔고, 불편하기 그지없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필자가 발표한 내용이 학문적으로는 전혀 근거 없는 추상적이고 관습적인 것임을 인정하거나, 어디에선가 근거를 찾아내 선배들을 납득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필자는 ‘백기투항’을 했고, 그때서야 선배들은 숨 쉴만한 분위기를 만들어줬다.
그 선배는 “정 선생, 모르는 건 잘못된 게 아니지만, 근거 없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근거’란 ‘문헌적 근거’를 의미한다. 즉, 고대 인도철학과 불교사상을 학문적 대상으로 연구해 현대에 복기할 때 그 길라잡이가 되는 것은 정확한 문헌 분석이어야 하지, 막연한 추측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런 분위기는 석사과정에 입학해 박사과정을 졸업할 때까지 모든 강의에 적용되었다. 대학원 과정의 강의는 설령 강의명이 불교사상에 관한 것이라고 해도 이론만 설명하는 경우는 없다. 그 사상을 담고 있는 원전(原典)을 모든 학생들이 1명씩 일정 분량을 읽어가며 해석하고 토론한다. 물론 그 토론에도 문헌 내용에 관한 추상적인 감상이나 개인의 ‘감동’을 포함시켜선 안 된다. 어디까지나 문헌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능한 토론이어야 그 시각 차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도쿄대학 중앙도서관.

물론 이러한 연구 태도에 대해 문헌에만 함몰돼 더 큰 가치를 보지 못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경청할만한 비판이지만, 치밀한 문헌 분석의 과정을 경험 하지 못한 필자와 같은 초보학자가 쉽게 던질 수 있는 말은 아닐 것이다. 자칫 불교학 발전에 무척이나 중요한 역할을 해온 험난한 문헌 분석의 과정을 건너뛰어도 된다는 뜻으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도쿄대학의 인도철학·불교학 연구는 철저한 문헌 분석을 가장 중요한 기반으로 삼기 때문에 석사 및 박사과정은 산스크리트어·한문·티베트어·팔리어 등 고전 언어 연마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박사과정 중 소논문을 쓸 때 혹은 학위논문을 발표할 때도 이러한 부분을 소홀히 한 채 이론만 잔뜩 실어놓으면 교수님들과 선배들로부터 ‘문헌적 근거’를 보여 달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언젠가 박사과정 1년생들이 자신의 석사 논문에 대한 보고회를 할 때였다. 어떤 학생이 석사 논문을 조금 더 발전시켜 ‘놀라운’ 이론을 발표했다. 발표가 끝났는데 칭찬 대신 “그 근거가 어디 있어!?”라는, 평소 점잖으시던 교수님들의 격앙된 목소리가 발표장을 가득 채웠다. 그 얼어붙은 분위기는 발표한 학생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화려한 이론 구성보다 문헌 근거에 대한 철저한 연구, 이런 학풍이 오늘의 도쿄대학 인도철학·불교학 연구실을 있게 해준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현재 도쿄대학 인도철학·불교학과는 다카사키의 제자이자 대승열반경 연구로 유명한 시모다 마사히로(下田正弘, 1957~)교수가 좌장을 맡아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정상교

현재 금강대학교 불교인문학부 교수. 천태종립 금강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 후 일본 동경대학에서 석 ·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동국대학교(경주) 티벳대장경역경원 전임연구원을 역임했다. 저서로 〈도쿄대학 불교학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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