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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5_영덕 괴시마을280호
  • 글·남화신 괴시마을보존회장/ 사진·이강식 기자
  • 승인 2019.09.17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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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영양 남씨 집성촌 
목은 이색, '괴시마을' 이름 지어

4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영덕 괴시마을은 영양 남씨 집성촌이며, 여말선초의 대학자 목은 이색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사진은 뒷산에서 바라 본 괴시마을 내 아랫마을.

|   40여 년만의 귀향

“형님요, 범이 자를 시키면 될시더.”
어릴 때 내 이름은 ‘범이’였다. 동네 아재와 형님들은 내가 퇴직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지난해 12월 말 공직에서 물러나자마자 ‘마을 보존회장’이라는 감투를 머리에 올려주었다. 아내는 잘하면 본전, 자칫 실수하면 덤터기로 욕 얻어먹는 그런 일을 왜 하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동네 어른들의 심부름이나 하면서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 될 것이라고 짐짓 가벼운 말로 아내의 염려를 잠재웠다.
칠팔십 줄에 접어든 형님들의 노고를 외면하지 못하고 심부름이나 착실하게 하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아마 유년시절부터 옆집에는 아재, 뒷집에는 형님, 담 너머는 아지매 등 모두 같은 성씨로 살아온 ‘집성촌’ 생활에서 비롯됐으리라.

괴시마을 전통가옥과 뒷산의 풍경이 조화롭다.

그렇게 특별한 사명감이나 별난 애착을 가지지 않은 채 내 유년의 흔적이 있는 동네를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이’ 드나들고 있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안동에서 괴시리 전통마을이 있는 영해까지는 고속도로가 뚫려 있다. 2년 전 개통돼 시간도 단축되고 길도 편해졌지만, 그래도 줄잡아 300리(125Km정도)는 족히 되는 거리다. 이전에는 그리 낮지 않은 재 두 개를 넘어야했는데,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따로 없었다. 그 시절에 비해 편해졌다고 해도 지금도 쉬 드나들 수 있는 거리는 아니다. 그럼에도 형님들은 수시로 전화를 걸어온다.
“이 사람아 자네 언제 오는고?”
“예~ 형님, 무슨 일 있니껴? 언제가면 될리껴?”
걸어서 이삼십 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옆 동네에 있는 것처럼 부르신다. 아재와 형님들 뿐만 아니라 영덕시 문화관광과에서도 연락이 잦다.

|   호지마을로도 불리는 괴시마을

영덕에서 북쪽으로 이십여 분을 달리다 보면 오른쪽 산자락 아래 길게 고택들이 자리한 괴시(槐市)마을이 있다. 50여 가구가 사는 마을은 요즘 새로 난 잘 뚫린 도로에서는 눈여겨봐야 마을의 위치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망일봉’이 있는 뒷산과 자연스레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괴시마을 중마골에 위치한 목은기념관 앞에 있는 이색 선생 상(像).

우리 마을은 얼마 전까지도 ‘호지마을’, 동네 어르신들이 부르는 식으로는 ‘호지마~’로 더 많이 불렸다. 마을 이름은 여말선초의 대학자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 선생이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자신의 고향 호지마을(호지촌)이 당대(當代)의 학자 구양현(1283~1357) 선생이 살던 ‘괴시(槐市)’와 같이 탁 트인 들판에 풍광이 아름답다고 하여 ‘괴시마을’로 고쳐 부른데서 연유한다. 목은 선생은 원나라 때 구양현 선생과 학문적인 교류가 있었던 모양이고, 또 그를 무척 좋아했나 보다. 
목은 선생의 부친은 학문교류 차 영해를 찾아왔다가 이곳에서 혼인을 하고, 선생을 낳았다. 목은 선생의 외할머니가 영양 남씨로 우리 집안 할매이고, 선생은 이곳 괴시마을 무가정(無價亭)에서 태어났다. 선생이 태어난 그 자리에 지금 ‘목은기념관’이 세워져 있어 선생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괴시마을은 영양 남씨 후손들이 집을 짓고 살면서 윗마을·아랫마을·중마골 등 3개의 부락으로 이뤄졌다. 〈사진제공=안동국학진흥원〉

영양 남씨가 괴시에 터를 잡은 것은 400년에 조금 못 미친다. 조선시대 인조 8년(1630년)으로, 입향조 할배는 ‘영산할배 남두원(南斗遠)’이다. ‘영산할배’의 아랫대에 세운 ‘입천정(卄川亭)’은 이 지역에서 교육과 회의 등을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9세기 중엽에 이르러 영양 남씨 동성촌락으로 완성되었다. 
괴시마을은 조선시대 전통가옥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존한 고택들이 적지 않아 전통한옥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종택을 비롯해, 구계댁(邱溪宅)·물소와고택(勿小窩古宅)·대남댁(台南宅) 등 ‘ㅁ’자형의 가옥은 그 자태가 가히 아름답다는 말이 모자랄 정도이다. 지정문화재 열여섯 곳 외에도 잘 보존된 전통가옥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괴정 할배가 지으신 ‘괴정(槐亭)’이다. 본가를 갈 때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인데, 어릴 때 우리 할배는 괴정에서 어른들을 만나실 때마다 나를 꼭 데리고 가셨다. 할배 무릎을 베고 잠을 자다가 깨어났던 기억이 떠오를 정도로 내 어릴 적 추억의 시작점이자 가장 따뜻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이색 선생을 기리는 목은기념관 전경.

마을의 옛 가옥들은 조선 후기 경북 동해안 지역 사대부들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데, 나는 이 집들을 볼 때마다 부러운 생각이 들곤 한다. 목은기념관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데, 나의 본가를 포함해 뒷집 월남댁·그옆 옥현댁·인량댁·재상댁 아지매네 등 대여섯 채가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소실돼 외향만 유난스럽지 않도록 새로 지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도 종가와 다른 집의 등다락 같은 기와와 높은 툇마루가 부러웠다.

|   창수 새아지매 신행 오던날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3학년쯤이었을까? 창수 새아지매 결혼식이 있었다. 새아지매는 ‘형수’를 일컫는 경북 북부지방의 사투리다. 작은 마을에서 결혼식 같은 큰일은 어른들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였겠지만, 아이들에게는 모처럼 고기와 전· 떡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풍족한 잔치였다. 
아마 결혼식을 치르고 난후 ‘신행’이였을 것이다. 창수 새아지매는 지프 같은 자동차를 타고 동네에 들어왔다. 60년대 후반에 자가용은 매우 귀한 교통수단이었다. 동네에 자동차가 들어서자 마을 어른들은 미리 준비한 짚단 서너 개에 불을 붙여 자동차가 오는 마을 어귀 중간쯤, 괴정 할배 정자가 있는 그 쯤 어디에 불붙인 짚단을 나란히 펼쳐놓고 그 위를 지나가게 했다. 나는 순간 겁이 났다. 저러다가 저 귀한 자동차가 폭발하는 건 아닐까? 저기에 타고 있는 새아지매가 다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쿵쿵 방망이질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나쁜 기운을 태워 없애고 새롭게 출발하길 바라는 부부에 대한 마을 어른들의 기원이 아닐까 싶다. 

괴시마을에는 오래된 기와와 토담이 남아 있다.

차에서 내린 창수 새아지매는 참 예뻤다. 훤칠하게 키도 컸다. 이미 동네어른들은 ‘새댁’을 맞이하기 위해 ‘큰상’을 준비해두었고, 새아지매는 맛난 음식이 차려진 큰상을 앞에 둔 채 다소곳이 두 눈을 내리깔고 앉아 있었다. 그 큰상은 분명히 새아지매를 위해 차린 것인데, 새아지매는 그 음식을 먹지 않았다. 집안의 누군가가 새아지매에게 음식을 떠먹이려 했다. 나는 새아지매에게 정신이 팔려 누가 음식을 떠먹이려 했는지 기억이 없다. 다만 숟가락을 쥐고 있는 그 누군가의 손만 기억이 난다. 그런데 새아지매는 끝까지 음식을 받아먹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상은 물려졌다. 왜 새아지매는 그 음식을 하나도 먹지 않았을까? 물려진 큰상은 동네 어른들과 아이들의 차지가 되었다. 음식은 풍족하게 준비돼 있었는데도, 유독 잔칫상에 진설(陳設)한 음식에만 그렇게 눈길이 갔던지. 

해촌고택(경북 민속문화재 제170호) 마당에 있는 장독대가 고풍스러움을 더한다.

당시 시집살이는 시댁의 강아지가 와도 일어섰다가 가고나면 앉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안타깝게도 새아지매에게는 우리사이에서도 짓궂기로 유명한 어린 시동생이 있었다. 나보다 세 살 정도 위였으니 아마 국민학교 6학년 정도였을 것이다. 나이어린 시동생은 새아지매가 있는 방에서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발을 이쪽으로 옮겼다가 저쪽으로 옮겼다가, 얼굴을 방으로 들이 밀었다가 다시 나가기를 쉼 없이 했다. 아마 어린 시동생의 행동은 분명 새아지매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개구쟁이의 장난이었을 것이다. 가엾은 창수 새아지매는 일어섰다가 앉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내가 새아지매가 있는 방을 들여다봤을 때는 아예 서있기로 작정한 듯 새아지매는 그 큰 키로 방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   계남댁 아지매 환갑잔치

요즘은 환갑을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지만, 그래도 중요한 생일로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환갑’이라는 단어 뒤에는 반드시 ‘잔치’라는 단어가 붙었을 정도로 큰 잔치였다. 당사자는 환갑까지 살아냈다는 뿌듯함이, 자식들에게는 부모의 장수에 효를 다한 것 같은 만족감이 있었을 듯하다.

괴시마을에는 당산나무가 두 그루(큰 동신, 작은 동신) 있다. 사진은 작은 동신으로, 수령이 약 450년 된 왕버드나무다.

고등학교 때였다. 계남댁 아지매 환갑잔치가 열렸다. 온 동네가 몇날 며칠을 웃고 떠들고, 먹고 마셨다. 어린 아이들의 뱃구레는 터질 듯 하고, 청소년기에 접어든 우리는 집안일을 도우면서 어른들이 마시다 남은 술잔에 슬쩍 입에 대보기도 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계남댁 형님은 일본으로 건너가 꽤 성공했다는 소문이 동네에 자자했다. 계남댁 형님은 동네 어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계남댁 아지매 환갑잔치에 소를 두 마리나 잡았다. 실제 두 마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온 동네 사람들이 몇날 며칠 그 집에 가서 삼시세끼를 해결했다. 우리도 얼마간은 학교가 파하면 계남댁 아지매집에 가서 밥을 먹는 줄로 알았다. 감주·떡·약과 따위의 음식이 지천이었다.
우리 동네는 환갑잔치를 여는 집에서 ‘공반’이라는 걸 대소가 어른들에게 돌렸다. ‘공반’은 소반에 한사람 분량의 떡과 감주, 약과 등을 담은 일종의 간식이다. 먹는데 정신이 팔렸던 어린 시절이라 ‘공반’이 무슨 뜻인지, 한자로는 어떻게 쓰는지 정확히 알려하지 않았다. 아마 ‘좋은 일이 있을 때 같이 나누어 먹는 음식’ 정도이고, ‘公飯’이라고 쓰지 않을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아름다운 마음에서 생겨난 풍습인 것 같다. 소반에 몇 가지 간식거리를 담아 상대를 위해 집까지 가져다주는 잔치집의 마음 씀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마을 어른 된 입장에서 끼니 중간에 출출해지더라도 궁금한 입을 앞세워 잔칫집을 기웃거리는 일은 이른바 ‘반촌’의 어른이 할 짓이 못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공반’은 이런 대소가 어른들의 마음을 헤아린 풍습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엄청난 양의 음식을 장만하고, 소반에 음식을 채워 들려 보내야하는 아낙네들의 수고로움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수고로움을 단순한 노동으로만 여기지는 않았으리라. 

|   재궁가는 길

우리 동네는 나지막한 산을 등지고 마을 전체가 서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멀리서 보면 뒷산과 마을이 하나같은 일체감이 든다. 그 일체감은 심리적인 편안함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더러는 마을이 없는 것처럼 보여 좀 섭섭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을 남쪽을 우리는 ‘웃마을’이라고 부르고, 우리 집을 경계로 부포댁 방향을 ‘아랫마을’이라고 부른다. 

영조 42년(1766)에 괴정 남준형이 고려말 유학자 이곡·이색 선생을 기리고자 지은 정자로 경목재(景牧齋)라 불렀다. 한국전쟁 당시에 야학 학당으로 쓰였다.

‘웃마을’을 왼쪽으로 돌아 약 5리정도 걸어가면 우리 문중의 재궁이 있다. 실제 문중제사를 지내지 않아 지금은 많이 퇴색했지만, 재궁은 마을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는 곳이다. 지금은 재궁의 중요성과 기능에 대해 생각하며 귀히 여기지만, 그 당시 우리에게는 그저 뒷바다를 가는 길목이었을 뿐이다. 뒷바다는 동네 뒤쪽에 있는 바다여서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여름방학이면 재궁 옆길을 걸어 해변으로 이른바 ‘피서’를 가곤 했다. 같은 마을의 우리또래는 모두 같은 문중이라 서로가 친인척 사이다. 과년한 남녀가 그렇게 몰려다녀도 어른들은 아무런 염려나 걱정을 하지 않았다. 
피서를 갈 때는 된장·고추·토마토·옥수수 등을 챙겼다. 마을에 두 대밖에 없었던, 요즘 대학노트만한 크기의 라디오 중 한 대도 우리의 피서길에 반드시 동행하곤 했다. 아마 다른 한 대의 라디오는 크기가 너무 커서 그나마 휴대하기 수월한 이 라디오를 골랐던 것 같다. 

새마을운동 후 차가 다닐 수 있도록 마을 길 일부를 넓혔지만, 사람과 자전거 정도만 다닐 수 있는 옛길도 보존돼 있다.

해질 무렵, 우리는 왔던 길을 되짚어 마을로 돌아왔다. 낮에 놀았던 바닷가의 수평선도 좋았지만, 돌아오는 길을 밝히는 불그스레 물든 서쪽 하늘의 모습은 파란바다 못지않은 나의 유년기의 사진 한 장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붉기만 했던 하늘은 점점 보랏빛을 띠고, 어둠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나는 이 장면을 한 장의 스틸사진처럼 가슴 한편에 간직하고 있어서, 어디서건 보랏빛을 품은 석양을 보면 막연한 그리움이 몰려온다. 뭐에 대한 그리움인지는 잘 모르겠다. 막연한 서글픔인지도 모르겠다.

|   조용하지만, 미래를 설계하는 마을

몇 년 전, 마을 뒤 해파랑길 가는 길목에 목은 이색 선생 기념관이 건립됐다. 그로 인해 없던 주차장도, 주차장에 공중화장실도 설치됐다. 재작년까지는 어쩌다 관광버스에서 울긋불긋한 외출복을 차려입은 관광객들이 바다로 가는 길에 들러 우리 마을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요즘 주말이면 제법 많은 방문객들이 마을을 찾아온다. 그 옛날 골목이 좁다하며 뛰어놀던 마을 아이들이 차지했던 길을 관광객들이 채우고 있다.

영양 남씨 괴시파 종택(경북 민속문화재 제75호). 남붕익(1641~1687)이 17세기 경에 건립했다고 전한다.

구계댁 아지매는 대문밖에 있는 화장실 문을 항상 열어둔다. 마을을 둘러보던 방문객이 갑작스럽고 급한 볼일이 있을 때 언제나 사용하라는 뜻이란다. 나이 팔순을 넘어 구순을 밑자락에 깔고 있는 아지매의 생각이 이렇게 툭 트였나 싶어, 구계댁 아지매 앞에서는 항상 부끄럽고, 배우는 자세를 갖게 된다.

괴시마을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전통가옥 16개소, 비지정 전통가옥 34개소 등 50개소의 건축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지금의 괴시리 전통마을은 여느 농촌마을처럼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사라진, 너무나 고요한 동네다. 가끔씩 들르는 관광객의 발길에 감사하며, ‘국가지정 민속마을’로 지정하기 위해 아재·아지매·형님들이 많은 기대와 노고를 아끼지 않고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내 고향 영해, 내 유년의 아스라한 기억이 고이 모여 있는 ‘괴시전통마을’은 지금 그 옛날의 모습과는 또 다른 미래를 꿈꾸고 있다. 

글·남화신 괴시마을보존회장/ 사진·이강식 기자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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