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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불교인의 삶과 신앙11_캄보디아프랑스 지배 이어 킬링필드 수난 겪었지만 국민 95%가 불교 신앙
  • 글  ·  사진 이지상
  • 승인 2019.09.17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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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는 국민의 95%가 불교를 신앙하는 불교 국가다. 사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앙코르와트.

 캄보디아는 국민의 95%가 불교를 신앙하는 불교 국가다. 1991년 국민당 정부가 불교를 국교로 선포했다. 정식명칭은 ‘캄보디아왕국(The Kingdom of Cambodia)’이며, 1993년 입헌군주제로 복귀한 민주주의 국가다. 다만, 인민당(공산당)이 장기집권을 하면서 사회주의국가로 오해받기도 한다.

국토는 한반도보다 조금 작은 18만㎢이고, 인구는 약 1,100만 명 정도이다. 어딜 가나 드넓은 평원이 펼쳐진다. 이 평화로운 대지에서 20세기 최대의 비극이 발생했다. 바로 대학살 ‘킬링필드(Killing Fields)’다. 이런 비극 속에서 캄보디아 불교가 살아남은 건 기적이다. 당시 학살된 국민은 200만 명, 거기에는 6만 여 명의 승려도 포함돼 있다. 
 
왕조의 역사, 불교의 역사
 
고대 캄보디아는 인도에서 건너온 왕이 이 지역의 여왕과 결혼하여 개국했다고 전하는데, 캄보디아가 인도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엿볼 수 있다. 고문헌에 따르면 캄보디아는 건국보다 불교가 먼저 전래된 나라다. 기원전 3세기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B.C. 269~232)이 소나 스님과 웃따라 스님을 통해 불교를 전했다는 게 정설이다. 
캄보디아는 후난(扶南) 왕조(A.D. 86~550) - 첸라(眞臘) 왕조(550~802)에 이어 앙코르 왕조(802~1431)를 맞이한다. 후난 왕조와 첸라 왕조 중기까지도 불교는 융성했지만, 첸라 왕조 이샤나와르만 1세(611~635)가 왕위에 오른 후 불교는 쇠퇴해 사원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그 원인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어 등장하는 왕조가 세계에서 가장 큰 사원인 ‘앙코르와트(Angkor Wat)’를 세우는 앙코르왕조다. 이 왕조는 자야바르만 2세(802~850)가 세우는데, 그는 불교와 함께 힌두교를 숭상해 두 종교가 공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대왕도(大王都)에 있는 사원’이라는 뜻을 지닌 앙코르와트의 건설은 인드라바르반(877~889)왕이 시작한다. 당시 왕들은 자신이 죽으면 신앙하던 신(神)과 하나가 된다는, 일종의 정령숭배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사후를 대비해 앙코르와트 건설을 시작했다. 
이후 왕들은 힌두교를 신앙한 경우도 있지만, 불교도를 신하로 등용하는 등 배척하지는 않았다. 당시 앙코르왕조의 신앙 형태는 훗날 불교와 힌두교가 혼재하는 캄보디아만의 독특한 종교 문화가 만들어지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수리야바르만 1세(1002~1050)는 불교를 국교로 선포한 후 상좌부불교의 전통을 계승한다. 뒤를 이은 수리야바르만 2세(1113~1150)는 캄보디아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는데, 그는 앙코르와트를 완성했고, 캄보디아 문화의 전성기를 만들었다. 
 
자야바르만 7세가 건설한 바이욘 사원.
캄보디아 불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왕이 있는데, 바로 자야바르만 7세(1181~1219)다. 그는 탁월한 정치력을 지닌 위대한 왕이었다. 대승불교를 신앙한 왕은 자신을 ‘관세음보살’로 여겼다. 백성을 위한 구제사업을 활발히 했고, 영토도 크게 확장해 앙코르왕국의 영광을 열었다. 그가 건설한 사원 중에서 대표적인 곳이 바이욘(Bayon) 사원이다. 
바이욘 사원에는 동서남북을 향해 바라보는 관세음보살 얼굴을 가진 사면탑이 가득 들어서 있다. 사면탑은 원래 54개가 있었지만, 현재는 37개만 전한다. 집채만 한 관세음보살 얼굴들이 그득한 사원은 경건하고 신비하다. 이 얼굴은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로 여겨지는데, 여성적이지 않고 강인한 남성적 분위기를 풍긴다. 이 사원의 정상은 메루산, 즉 우주의 중심이다. 부처님이 살고 있다는 수미산을 형상화시킨 것이다. 13세기 말에 이곳을 방문했던 중국의 원나라 사신 주달관(周達觀)은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라는 책에서 도처에 보이는 황금부처의 얼굴, 황금탑, 황금사자, 황금축대, 황금창문틀을 언급하며 화려한 불교문명에 감탄했다.
 
캄보디아 씨엠립 앙코르 톰에 있는 바이욘 사원의 불상.
자야바르만 7세는 그 외에도 아버지를 위해 프레아칸 사원을, 어머니를 위해 타프롬 사원을 건설했다. 이곳은 불교 사원이지만 힌두교에서 유래된 시바신의 남근을 상징하는 ‘링가’와 여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요니’도 있어서 불교와 힌두교가 자연스럽게 결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자야바르만 7세가 죽은 후, 앙코르왕국은 쇠락의 길을 걷는다. 불교는 대승불교에서 상좌부불교로 바뀌고, 태국의 공격을 받자  1431년 수도를 프놈펜으로 옮긴다. 이후 왕조의 흔적은 조금씩 정글로 뒤덮여 갔다. 
 
킬링필드와 되살아난 불교
 
흔히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동식물학자 ‘앙리 무오’가 숲속에서 폐허가 된 앙코르와트 유적지를 발견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는 다르다. 앞서 온 서양인들도 있었고, 그곳 주민들은 현지에 살면서 불교의식을 치르는 등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1632년에 앙코르 유적지를 방문했던 일본인 상인도 있었다. 큐슈 출신인 ‘모리모또 우꽁 다이유’는 베트남의 호이안에 있는 일본인촌을 방문했다가 톤레삽 호수 근처에 거대한 불교사원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왔다. 앙코르 유적지를 보고 크게 감격한 그는 이곳이 부처님의 탄생지인 부다가야라고 오해했다. 그는 네 개의 부처상을 앙코르와트 사원에 기증한 후, 그의 노모를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 있는 왓 우날롬.
이런 사실은 앙코르왕국이 망한 후에도 불교 사원은 종교적인 기능을 유지했고, 불교의 맥은 백성들 사이에 이어져 왔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캄보디아가 혼란기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불교 역시 오랜 기간 동안 제 위상을 되찾지 못했다. 16~17세기부터 유럽 강대국들의 침탈이 시작됐고, 1860년 캄보디아는 프랑스 보호령이 된다. 프랑스 점령군이 가톨릭 정책을 펴면서 선교에 총력을 기울이지만, 오랜 불교의 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프랑스는 1953년 불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캄보디아인들은 사원을 중심으로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불교를 지켜냈다. 
그런데 정작 큰 시련은 뒤늦게 찾아왔다. 195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고, 캄보디아왕국과 크메르공화국으로 명맥을 이어오던 차에 크메르 루주의 폴포트(Pol Pot)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자본주의적 요소를 모두 부정하는 극단적인 정책을 펼쳤다.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유토피아를 만든다는 명분 아래 지식인과 부유층 등 약 200만 명을 학살했다. 20세기 최악의 사건 중 하나로 불리는 이 만행의 대상에는 수많은 사원과 6만여 명의 승려들도 포함돼 있었다. 6만 명은 당시 캄보디아 전체 승려수와 거의 일치한다. 불교는 끔찍했던 4년의 시간을 견뎌냈다. ‘킬링필드’로 불리는 시대의 비극 속에서 불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기적이라 말할 수 있다. 캄보디아가 다시 불교를 국교로 선포하는 건 1991년 국민당 정부가 들어서면서다. 
 
승려와 불자들의 생활
 
앞서도 언급했듯이 불교가 억압과 탄압을 받을 때도 사원을 중심으로 공동체생활을 했을 정도로 불교는 캄보디아 국민들의 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사찰이 마을의 중심에 위치하고, 기본 교육기관의 역할을 수행하는 등 사회·교육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캄보디아 프놈펜의 한 사찰을 참배하는 불자들.
캄보디아의 승려는 이웃한 불교국가와 마찬가지로 12세 정도에 사원에 들어가 사미승이 된 후, 20세가 되면 구족계를 받는다. 승려들은 상좌부불교의 교리에 근거해 교육을 받는데, 재가불자들도 어릴 때부터 사찰에서 체계적으로 불교 교리를 배우고,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킬링필드가 발생하기 전인 1970년대 초 캄보디아 불교사원에서 운영하는 초등 빠알리어 학교는 529개, 불교고등학교는 2개, 불교대학은 1개가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일생 중에 한 번은 삭발하고 사원에서 1년 정도 수행을 하는 게 관례화 되어 있다. 캄보디아인들은 일반적으로 자비심이 깊고 선량한데, 이런 성장 배경이 큰 역할을 했다. 마을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도 사원에 모여 회의를 하고, 스님에게 상담을 한다. 그들의 모든 일상생활이 불교와 관련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수많은 불교축제가 캄보디아인을 가난하게 만든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캄보디아 보코르 국립공원은 산악지대에 있다. 그곳의 한 불교사원 주위에 짙은 운무가 끼어 있다.
전쟁과 공산독재로 이런 전통이 단절되었지만 불교는 다시 캄보디아인들의 삶 속으로 깊이 파고들고 있다. 캄보디아인들의 결혼식과 장례식 때는 스님들이 꼭 참석한다. 그들의 결혼식은 매우 화려한데, 결혼식장이나 호텔 혹은 집이나 레스토랑에서 한다. 사람이 많으면 집 앞에 천막을 쳐놓고 할 정도로 성대하다. 하루 종일 먹고 즐기지만 빠지지 않는 것이 스님들의 축원이다. 장례식 때도 다들 모여 염불을 외는 스님 곁에서 망자를 위해 기도한다. 
캄보디아 승단은 전통적으로 왕이 임명해온 나야까 스님[僧正]이 통솔한다. 각 종단에는 나야까 스님 아래 장로(thera) 스님들이 있다. 승정이 각 사원의 책임자를 임명하는데, 책임자는 사원의 운영만 할 뿐 소유권을 행사하진 않는다. 특히 경제적인 부분은 승려들이 관여할 수 없고, 신도들로 구성된 협의체에서 관장한다. 이 덕분에 경제적 이유로 승려가 타락하는 일은 찾아보기 어렵다. 여타 상좌부불교 국가처럼 승려들은 탁발을 해서 식생활을 하고, 참선보다는 교리 중심의 공부를 한다. 
 
앙코르와트의 회랑 부조를 돌아보고 있는 스님들.

국교가 불교인만큼 국가에서도 불교를 장려한다. 엄격하게 시행하진 않지만, 사원으로부터 일정 거리 내에서는 다른 종교의 활동을 불허한다. 외국인이 가정을 방문해 선교하는 행위도 금지하고 있고, 앙코르와트 중심으로 일정한 지역 내에서도 불교 외 다른 종교 활동을 제약하고 있다. 

앙코르와트 유적에 새겨져 있는 압사라 부조.
불교와 습합한 민간신앙과 명절

캄보디아에서 설날과 함께 가장 큰 명절은 ‘프쭘번(Pchum Ben)’이다. 우리나라의 추석에 해당하는 프쭘번 기간은 크메르력으로 10번째 달의 첫째 날부터 15일 간이다. 이 기간 동안 캄보디아인들은 고향을 방문해 조상이 다니던 절을 찾아가 7대 조상까지 넋을 기리고 예를 표한다.

앙코르 톰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놓인 유적.

이 명절은 마지막 날이 가장 중요한데, ‘하늘’의 문이 열려 망자들이 인간세상으로 내려온다고 믿는다. 일 년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망자들은 매우 굶주린 상태이므로 사람들은 찹쌀 주먹밥을 만든 후 던져서 배고픈 망혼에게 음식을 공양한다. 

캄보디아인들은 조상 중에서도 집에서 자연사를 하지 못하면 매우 불길하다고 여긴다. 객사나 사고사, 자살 등으로 목숨을 잃을 경우, 매우 폭력적인 귀신이 되어, 자신이 죽은 자리에서 이승의 사람에게 해코지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이유로 이들의 장례는 ‘2~3년 매장 후 다시 화장을 하거나’, ‘시신의 머리 방향을 반대로 하는’ 등 평소 다르게 행한다. 
무화과나무 뿌리가 유적을 내리 누르고 있는 타프롬.
‘킬링필드’ 희생자들 역시 이러한 억울하고 폭력적인 죽임을 당했다. 당시 희생자들의 유골은 신원을 확인할 수조차 없었고, 망자에 대한 위령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캄보디아인들은 프놈펜의 뚜얼슬렝 학살박물관과 쯩아엑 학살기념지 등을 위험하고 폭력적인 장소로 여긴다. 망령들의 원혼을 달래주지 못했기에, 그들의 분노가 그 공간에 남아있다고 믿는 것이다. 실제로 캄보디아에는 다양한 신(귀신)이 존재하고, 그와 관련한 주술 의례와 부적도 발달해 있다. 
 
이지상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후 3년 간 직장생활을 했다. 이후 약 30년 간 세계여행을 하며 여행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혼돈의 캄보디아, 불멸의 앙코르와트〉·〈슬픈 인도〉 등 총 25권의 여행서를 냈다. 2010년에 서강대 사회학과 대학원 석사 졸업. 논문으로 〈상상력의 관점에서 본 노마디즘〉이 있다.

글  ·  사진 이지상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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