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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손 끝에서 피어나는 마음친구여, 친구여!
  • 글  ·  이영춘
  • 승인 2019.09.17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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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떠난 지도 어느 새 4개월이 되었구나! 네가 떠나던 5월, 온 천지를 수놓던 꽃들도 어느 새 고개를 떨구고 검은 침묵처럼 엎드려 있구나.

어제는 낭송가들이 ‘이영춘 시력 43년 헌정시 낭송회’를 해 준다고 하여 큰 행사가 열렸단다.

그런데 너의 작은 아들이 네가 그렇게 사랑하던 쌍둥이 손자를 데리고 행사장엘 찾아왔지 뭐니! 그 아기들과 네 두 아들을 보는 순간 얼마나 눈물이 났는지 너는 모를 거다. 아들들도 분명 엄마 생각이 나서 찾아왔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더구나.

편지를 받을 네가 없는 빈 지상에서 이 편지를 쓰면서 나는 지금 울고 있다. 어제 너희 손자들과 아들들을 본 후로 이렇게 눈물이 난다.

남들은 90세 100세까지 산다는데 너는 왜 그렇게 빨리 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구나. 그건 혹 네가 남들을 위해 신경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상에 사는 동안 네가 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 너는 기억할까? ‘길잡이의 집’을 운영하면서 성매매로 고통 받는 여성들을 구하기 위해 ‘쉼터’를 만들어 쉬게 하였던 일, 그녀들의 생계 터전을 마련해 주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던 일, 그리고 다문화 이주민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합동결혼식을 올려 주었던 일, 가정법률상담소를 운영하면서 가정폭력과 성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위해 밤낮으로 뛰었던 일, 정말 너무나 네가 한 일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구나. 그러면서도 정작 본인은 얼굴에 화장 한 번 제대로 안 하고, 옷가지도 본인을 위해서는 지독히 아끼면서도 남을 위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던 그런 일들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하는구나. 내가 그토록 마다하는 내 시집 출간기념회를 기어이 주선해 놓고는 정작 너는 그날 미국에서 사돈이 와서 공항에 가야한다고 사라졌다. 그때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니? 인사말까지 “이렇게 하면 되느냐?”고 연습하던 사람이 행사당일 사라졌으니 말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나중에 알고 보니 너는 공항에 간 것이 아니라, 병원에 갔더구나!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냐고 했더니 “네 행사를 망칠까봐 그랬노라.”고 말하던 너. 이렇게 남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봉사만 하다가 떠난 것 같아 더욱 가슴이 아프다.

친구로서 되도록 너에게 피해를 안 주려고 내심 노력했던 일을 너도 기억하는지? 돈을 써도 공동으로 갹출(醵出)하자고 권유해도 너는 한 번도 내 말을 듣지 않더구나! 너는 천생 남을 돕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았다. 마치 테레사 수녀처럼 가난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은 물론, 네 주위 사람들까지도 다 챙기려고 애썼으니 말이다. 친구로서 더 존경스러운 것은 그렇게 물질적, 정신적으로 봉사하면서도 한 번도 네 이름이 거론되기를 거부했다는 점이다. 진심어린 마음과 정성이었기에 나는 너를 사랑했고, 너를 잊을 수 없다.

네가 떠나기 며칠 전, 나에게 했던 말이 자꾸 가슴을 치고 올라와 견딜 수가 없구나.

“못 살 것 같아! 아무래도 이번엔 못 살아날 것 같아!”

그 목소리가 자꾸 가슴을 타고 올라와서 나는 일부러 고개를 가로저을 때가 많단다. 지금 이 순간도 그렇구나! 네가 그 말을 하던 순간, 나는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쇳덩이 같은 눈물을 꾹꾹 참으며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니? 쌍둥이 손자들 학교에 입학하는 거 보고 죽어야지?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해?”하면서 너를 윽박질렀지. 생각나지? 분명 너는 고개를 끄덕끄덕 했으니까.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고도 나흘 만에 너는 말없이 가고 말았구나! 그렇게 병이 깊었으면 차라리 항암치료를 하지 말고, 먹고 싶은 것 먹고, 조금이라고 편하게 살다가 갈 것을 그랬어?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 독하다는 항암 약을 아침저녁으로 먹었으니 미음인들 제대로 넘어가겠어?

어느 날부턴가는 하루 종일 미음을 종이컵으로 반도 못 넘겼다고 하더구나! 간병인보고 ‘입에다 흘려 넣어주면 안 되느냐?’고 했더니 자꾸 토해서 안 된다고 하더라. 그날 내가 병원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너는 모르고 떠났을 것이다. 너의 비보를 듣고 친하게 지내던 우리들은 사흘 낮과 밤을 울면서 너를 지키고 또 떠나보냈다.

너는 모르겠지만 ‘YWCA장’이나 ‘가정법률상담소장’으로 해도 좋았겠지만 그냥 가까이 지내던 우리들을 중심으로 ‘여성계추모장’으로 너를 영결하였단다. 지하에 있는 영안실이 꽉 차서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네가 이 사회에 봉사했던 영상자료를 보면서 너를 회상하고, 수녀님이 추도사를 하고, 나는 추모시로 너를 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부조금을 준비해온 많은 사람들이 “고인의 뜻에 따라 조의금은 사양한다.”는 팻말을 보고 또 한 번 놀라더라. “역시

○○○회장 답구나!” 한 마디씩 감탄과 한탄을 하면서 빈손으로 네 영정 앞에 고개를 숙였다. 어떤 이는 노잣돈을 못 주어서 어쩌냐면서 목 놓아 울더구나. 또 근조화환은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지 넌 모를 거다. 100개가 넘게 들어왔더구나! 짧은 인생을 살다갔지만 넌 참 잘 살다가 갔다는 것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장례식 날 우리들은 추도식이 끝나고 네가 이사 갈 집까지 따라갔었다. 많이도 왔더라. 네가 살 새 집의 산등성에 올라가 보니 경춘대로와 강촌의 긴 강물이 다 내려다보이고, 산마루라서 올라가기가 좀 힘들었지만 앞이 확 트여서 참 좋더라. 이미 너보다 먼저 떠난 너의 남편 옆자리에 관을 내려놓는 걸 보고 우리는 또 흐느껴 울었다. 너의 아들 둘도 삽으로 흙을 떠 네 몸에 뿌리면서 삽자루를 잡고 엉엉 울더라. 우리도 네 몸에 흙 한줌씩 뿌리고 또 뿌리면서 울음을 쏟아내고야 말았다. 나는 요 며칠 전부터 이런 생각을 한단다. 친구의 몸도 이젠 썩었겠지? 그러던 차에 어제 너의 아들들을 보니 그렇게 슬플 수가 없더구나.

네가 그토록 사랑하던 쌍둥이를 오늘 빵집에서 우연히 만났다. 네 아들과 같이 나왔더라. “할머니 보고 싶지?” 했더니 “응 보고 싶어!” 몇 분 차이로 먼저 태어난 큰 아이가 대답하더라. “할머니 얼굴 기억 하지?” 했더니 “응!”하고 이번에는 작은 아이가 대답하더라. 지상의 소식 중 제일 궁금해 할 너의 쌍둥이 손자 소식을 전하며, 지상에서의 마지막 편지를 보낸다. 그곳에선 아프지 말고 잘 있거라. 너를 사랑했던 친구가, 안녕히!

이영춘

경희대 국문과와 동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197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윤동주문학상·고산윤선도문학대상·인산문학상·동곡문화예술상·한국여성문학상·유심작품상특별상·난설헌시문학상·천상병귀천문학대상을 수상했다. 시집과 시선집으로 〈시시포스의 돌〉·〈슬픈 도시락〉·〈봉평 장날〉·〈노자의 무덤을 가다〉·〈들풀〉·〈오줌발, 별꽃무늬〉 등 다수가 있다.

글  ·  이영춘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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