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호

음식에 관한 붓다의 조언

30~40년 전 우리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끼니를 
때울 양식이 부족해 보릿고개가 되면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당시는 제대로 영양섭취를 못해 병이 생겼다. 
그런데 먹거리가 풍부해지면서
 현대인들은 오히려 너무 잘 먹어서 생기는 병을 앓는다. 당뇨·고혈압을 비롯한 각종 성인병은 물론 암도 여기에 해당한다. 
식습관은 건강 · 수명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의학과 과학이 발달하면서 건강한 식습관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높다. 그런데 놀랍게도 2,600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미 ‘건강한 식습관’을 알고 계셨다. 
그 내용을 제자들과 신도들에게 설하시면서 
실천을 당부하셨다.  

“때를 지켜 섭취하되, 
맛과 양을 절제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먹어야”

인도불교 역사에서 대식가로 손꼽히는 사람은 현재 인도 우따르뿌라데쉬 주에 위치하고 있었던 코살라(Kosala, 舍衛城) 왕국의 파사익(Pasenadi, 波斯匿) 왕이다. 그는 식사 때마다 세숫대야 크기의 그릇으로 음식을 먹는 대식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두꺼운 허리둘레 때문에 자신의 발을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파사익왕이 붓다에게 과식으로 인한 비만 때문에 쉽게 피곤함을 느끼고, 거동마저도 불편하다고 하소연하는 장면이 〈자따까 주석서〉에 등장한다.
대승경전인 〈육도집경〉에는 음식에 집착한 어리석은 왕의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한 왕국에 현명하고 정의로운 왕이 있었다. 그는 사자처럼 힘이 세고, 그 빠르기는 새를 잡을 정도였다. 어느 날 왕국의 요리사는 요리에 사용할 고기를 찾을 수 없었는데 막 죽은 사람 시체를 이용하여 겨우 고기요리를 만들 수 있었다. 이 요리는 이전에 동물고기로 만들었던 요리보다 훨씬 더 맛이 있었고, 왕은 ‘이 요리에 비하면 이전의 음식들은 맛이 없었다.’고 요리사를 질책했다. 결국 요리사는 새로 내놓은 고기요리는 인육으로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요리사의 고백을 들었지만, 왕은 요리사에게 다른 사람 몰래 인육으로 계속 요리를 하라고 지시했다. 요리사는 사람을 죽여 왕을 위해 고기요리를 준비했다. 연속되는 살인으로 왕국은 혼란에 빠졌고, 관리들은 살인사건을 조사하여 요리사를 체포했다. 요리사는 그가 사람을 죽인 것은 왕이 원하는 고기요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자백했다. 
신하들은 왕에게 자애로운 군주로서 그러한 잔인한 짓을 그만두라고 간청했지만 고기 맛에 빠진 왕은 신하들의 간청을 묵살했고, 신하들은 왕을 권좌에서 끌어내려 왕국에서 쫓아내 버렸다.”

위의 예는 음식의 양과 맛에 대한 불교의 경계를 나타내는 이야기로 자주 언급된다. 대승불교에 들어와 육식이나 술, 마늘이나 파 등 훈채(葷菜)에 대한 금기가 언급되기는 하지만, 불교 전체 문헌에서 음식과 관련해 가장 빈번하게 서술되고 있는 내용은 특정한 음식이나 식재료에 대한 섭취 권유보다는 보다 넒은 범주의 ‘음식의 맛과 양’에 대한 제어와 관련한 내용들이다.   
우리나라도 1980년대 이후 육류 소비량이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현재 외식메뉴는 육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대승경전인 〈능가경〉에서도 중생이 육류 음식을 좋아하는 것은 바로 그 맛에 있다고 하면서 육식이 가진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대혜여, 고기를 먹는 자는 탐심을 채우기도 어렵고, 먹는 데 그 양을 모르며, 과식하여 소화하기 어렵다.”

채소를 먹을 때보다 육류 등 입에 맞는 음식을 먹을 때 맛에 탐착해 적정량만을 먹기가 쉽지 않음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경험하는 일이다. 육식이나 맛있는 음식과 관련해 불교는 이미 고대에서부터 이에 대한 제어의 필요성과 수행을 통한 문제해결을 모색해 왔다.
이와 관련해 〈앙굴마라경〉에는 붓다의 제자인 가섭의 수행이야기가 전하는데, 가섭은 갖가지 맛있는 음식이나 고기 음식을 섭취하지 않는 수행을 했다고 전한다. 
육류·생선·당밀·꿀과 같은 단백질과 당류 음식 외에도 인도 음식문화에서 중요한 한 축을 이루는 것이 우유와 유제품이다. 우유·제호(우유정제기름)·생소(버터)·숙소(치즈)·낙(커드) 등은 육류·생선·당류와 더불어 불교의 계율 문헌인 〈빨리율장〉에서 맛있는 음식, 즉 미식(美食)으로 규정되며, 불교 수행자가 자신이 요구해서 탁발할 수 없는 음식으로 규정하고 있다.
불교 문헌에 이같은 내용이 언급된 기저에는 음식의 맛을 바라보는 불교의 시각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오분율〉의 언급은 불교가 음식의 맛을 어떻게 보고 있는 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항상 좋은 맛에 탐착하고 마음은 좋은 소리와 색깔을 쫓아 치달린다. 나는 이것을 번뇌(垢)로 보기 때문에 (번뇌를 일으키는) 불을 섬기는 일을 버린다.
다섯 가지 맛은 사람의 입을 만족시키고 소리와 색깔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너희들은 이것을 번뇌라고 보아야하니 이것들로부터는 얻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인도 힌두문헌인 〈마누법전〉은 “과식은 병이 들게 하고, 장수하지 못하게 하며, 천상계에 태어나지 못하게 하고, 덕을 쌓게 하지 못한다. 세상이 비난하는 바이니 과식하지 말라.”고 서술하고 있다.

음식에 대한 균형 잡힌 ‘적당량의 식사’는 명상수행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발우를 들고 탁발에 나선 어린 스님들.

불교 문헌은 음식의 맛에 대한 탐욕을 ‘미식탐(美食貪)’이라 부르고, 음식의 양에 대한 탐욕을 ‘다식탐(多食貪)’이라 부르고 있다. 즉 탐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중국불교 계율문헌인 〈사분율산법보궐행사초〉는 과식이 야기하는 다섯 가지 고통에 대해 “첫째, 대변을 자주 본다. 둘째, 소변을 자주 본다. 셋째, 잠이 많아진다. 넷째, 몸이 무겁고 자신의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 다섯째, 병이 많아지고 먹어도 잘 소화 시키지 못 한다.”고 적고 있다.
천태종 문헌인 〈석선바라밀차제법문〉에서도 바른 명상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음식의 양을 제어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음식을 너무 과도하게 먹으면 신체 에너지의 흐름이 막혀 몸이 갑갑함을 느낀다. 거의 모든 신체 에너지가 막히면 마음이 닫히고 막히며 명상수행을 해도 마음이 불안하게 된다.
너무 적게 먹으면 신체는 수척해지고 마음은 안정되지 않고 우리의 의지력은 약해진다. 이 모든 것들은 명상수행을 향한 길을 얻을 수 없게 하는 것들이다.
우리가 음식의 정확한 양을 알면 항상 즐겁고 평온한 자리에 머물며 평온한 마음은 종교적 노력을 향유케 한다.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이 천태종 문헌은 수행자가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의 중도(中道)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음식에 대한 균형 잡힌 ‘적당량의 식사’는 음식 섭취뿐만 아니라 명상수행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천태종의 명상수행 문헌인 〈마하지관〉은 음식과 의학적 치료를 연결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천태종 명상수행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이 문헌은 음식의 두 가지 측면을 언급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특정식품과 사대(四大, 地水火風)의 관계이다.

“음식 먹는 것을 제어하지 못하면 병이 생긴다. 매운 성질을 가진 생강과 계피는 ‘화기(火氣)’를 증가시킨다. 달고 차가운 성질을 가지고 있는 사탕수수와 꿀은 ‘수기(水氣)’를 증가시킨다. 배는 ‘풍기(風氣)’를 증가시키며, 기름과 지방은 ‘토기(土氣)’를 증가시킨다. (예를 들면) 그것은 우리가 열이 있을 때 오이가 열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것과 같다. 
…… 화기가 신체의 아랫부분에 있을 때는 음식이 잘 소화되고, 내부 장기에 활기가 넘친다. 속담에서 말하기를, 당신이 장수하기를 원한다면 발을 따뜻하게 하고 머리를 차게 해야 한다. 화기가 신체의 윗부분에 있게 되면 음식을 먹어도 잘 소화되지 않고, 몸은 불안함을 느낀다. 이것이 몸과 마음의 병을 야기한다.”

두 번째 의학적 측면은 일반적인 음식의 맛과 오장 즉 심장·간·비장·폐·신장의 질병과의 관계이다.

“음식의 오미(五味)는 오장에 이롭거나 해로울 수 있다. 신맛은 간에 이로운 반면 비장에는 해가 된다. 쓴맛은 심장에 이롭지만 폐에는 해가 될 수 있다. 매운 맛은 폐에는 이롭지만 간에는 해로울 수 있다. 짠맛은 신장에는 이롭지만 심장에는 해가 될 수 있다. 단맛은 비장에는 이롭지만 신장에는 해가 될 수 있다. 다섯 가지 장기 중 하나가 오미 중 하나의 맛에 의해 해를 입었다면, 그 해로운 맛을 피하고 이로운 맛을 섭취해야 한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천태 문헌들은 음식의 양과 관련하여 극단적인 편향을 피하고, 중도를 지킬 것을 설하며 음식의 성질과 맛에 대한 의학적인 분석을 통해 수행자의 종교적 이상을 실천하는데 필요한 체계적인 내용을 보다 정교한 방식으로 제공하고 있다.  

〈오분율〉을 보면, 부처님은 맛에 대한 탐착을 번뇌로 보고 있다. 그래서 수행자가 탁발을 할 때 ‘미식(美食)’으로 규정된 음식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남방불교권 스님들의 탁발 모습.

〈중아함경〉은 음식 맛과 양에 대한 탐욕이 야기하는 결과에 대한 종교적 설명도 담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음식의 맛과 양에 집착함으로써 몸과 입과 뜻으로 악행을 저지른다. 몸과 입과 뜻으로 악행을 저지른 후에 그 인연으로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다한 후에는 축생계에 태어나서 오줌과 똥을 먹게 되니 이것을 축생의 괴로움이라 한다.”

불교경전이 ‘음식의 맛과 양에 대한 제어’를 강조하지만 이 말이 음식섭취에 있어서 맛이 주는 즐거움을 배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보적경〉은 이 점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선남자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여래가 얻지 못하는 일은 없느니라. 선남자야, 비록 초목이나 흙덩이나 기와나 조약돌을 먹는다 하더라도 삼천대천세계에서 여래께서 먹는 초목이나 흙덩이나 기와나 조약돌 같은 이러한 맛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선남자야, 여래는 맛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맛을 얻기 때문이니 설령 여래가 가장 거친 음식을 먹어도 그 얻게 되는 맛은 천상계 음식의 수승한 맛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니라.”

이 경전은 음식의 맛을 단순히 식재료의 질에 따른 맛으로 사고하는 중생들에게 그러한 사고의 틀을 벗어난 음식 맛에 대한 불교적 시각을 제공한다. 이러한 시각은 아난의 예를 통해 보다 확연하게 살펴 볼 수 있다. 붓다께서 형편없는 탁발식을 하는 것을 본 아난은 ‘왕가의 자제로 태어난 붓다가 어떻게 저렇게 형편없고 맛없는 음식을 드실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안타까워했다. 그때 붓다께서 아난의 마음을 읽으시고 그에게 보리밥을 먹어보라고 권하신다. 아난은 그 보리밥을 먹고 나서 “왕가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아직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아난은 이 보리밥을 먹은 후 7일 밤낮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지만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보잘 것 없는 음식으로 간주되는 보리밥이 왕가 태생의 아난이 이전에는 결코 경험하지 못한 뛰어난 맛을 가진 음식으로 느껴진 것은 어떤 이유인가? 빨리어 불교경전인 〈맛지마니카야〉는 “마음이 집중된 상태에 있는 비구에게는 맛있는 음식도 장애가 되지 못한다.”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즉 이 말은 ‘높은 경지의 수행자는 음식 맛이 있다고 해도 그것에 탐착하지 않으며, 음식 맛이 없다고 해서 형편없는 먹을 수 없는 음식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음식 모두를 최상의 음식으로 수용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붓다는 식생활과 관련하여 복잡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점은 인류의 거의 모든 종교와 철학에서 공통된 현상이다. 다만 몇 가지 아주 단순한 규칙을 지키라고 주문한다. 첫째 음식의 맛과 양에 절제를 할 것, 둘째 식사의 때를 지킬 것(특히 야식 금지), 셋째 평온한 마음을 가지고 먹을 것 세 가지다. 
위의 세 가지에 마지막으로 중요한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음식 섭취와 수행을 연관시킨다는 점이다. 음식의 질과 맛은 식재료에 있지 않고, 음식을 먹는 자의 수행적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이다. 


공만식

현 수원가톨릭대 강사.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와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후 영국 런던대 (Kings College, London)에서 ‘종교학과 음식학’으로 박사학위를, 이어 인도 델리대학교에서 ‘초기불교 & 초기인도불교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초빙연구교수를 지냈다. 저서로 <불교음식학 - 음식과 욕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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