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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구업의 일상성
  • 구미래 불교민속연구소장
  • 승인 2019.08.27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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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일상성 속에서
스스로 합리화하는 말
상대에게 상처되진 않는지

수채화에 관심이 있던 차에 새로 생긴 동네화실로 전화를 걸었다. 회화과 석사과정을 마친 젊은 엄마였고, 느낌이 좋아 한참동안 대화를 나누며 서로 일정을 맞춰보았다. 그간 그린 그림을 좀 보자고 하여 휴대폰으로 보냈더니 한참 있다가 전화해서 말하기를 “저는 기독교인인데 불교색채가 너무 짙은 그림들이라 가르쳐드리기 힘들겠다.”는 것이었다.

순간 울컥하여 이런 말들을 쏟아내었다. “젊은 분인데 쇼크다. 종교가 사람을 위해 있는 거고, 함께 행복하게 살도록 해줘야 하는데, 오히려 사람들 간 장벽을 만들고 종교를 위해 살아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믿음이 감동을 주는 게 아니라 두렵다는 생각이 든다. 주제넘은 말을 해서 미안하다.” 당시로선 생각지도 못했던 그녀의 반응이 놀라왔다. 직접 그리는 것도 아니고 옆에서 지도만 해주는 것인데, 종교라는 벽으로 작지만 소중한 만남을 어이없이 차단해버린 게 아닌가.

내가 하는 말이 ‘인간적이고 보편의 선(善)’이라 여겼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할 말을 해주었다고 여기면서도 마음 한 편이 석연치 않았다. 믿음을 가지려면 제대로 가지라는 말을 한 셈인데, 과연 그 상황에서 일면식도 없는 이에게 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이었던가. 생각할수록 ‘나의 기준에 맞춘’ 선이라는 이름으로 구업(口業)을 짓고 만 것이었다. 종교는 개인의 신념이고 교리에 따라 거부감이 클 수도 있는데, 함부로 믿음의 문제를 재단함으로써 내가 받은 것보다 훨씬 크고 다른 차원의 상처를 주었다.

대개 잠들기 전에 떠오르는 건 그날 주고받은 말이다. 상대의 말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내가 왜 그렇게 말했을까.’ 후회하는 날이 드물지 않다. ‘비난ㆍ거짓말ㆍ아첨’과 같이 쉽게 인지할 수 있는 구업이 아니라면, 그녀에게 한 것처럼 스스로 합리화되어 나가는 말은 상대에게 어떤 상처가 될지 인식조차 못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말의 속성이란 묘한 것이어서, 상황에 따라 평소의 마음이나 생각과 다르게 날아다니기도 한다. 따라서 같은 사람이라도 말은 그의 글과도 좀 다르고, 생각과도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곧잘 발견하게 된다. ‘혀 아래 도끼 들었다’는 속담처럼, 끊임없이 주고받는 말의 일상성 속에서 갑남을녀들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건 바로 ‘구업’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지옥도 가운데 구업을 다스리는 발설지옥(拔舌地獄)의 묘사는 다른 지옥보다 상징적이다. 형틀에 매달린 죄인의 입에서 혀를 길게 뽑아내어 크게 부풀린 다음, 그 위로 소가 쟁기질을 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 않은가. 이는 악업을 지은 혀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자, 잘못된 것을 갈아엎는다는 뜻을 지녔다. 농부가 겨우내 단단해진 땅을 뒤엎어서 지기(地氣)를 새롭게 하듯이, 악업으로 굳어진 혀를 갈아엎어 선업의 뿌리가 내리도록 하는 것이다.

반성 하던 차에, 그녀로부터 문자가 왔다. “좋은 말씀 감사하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소중한 마음으로 그렸을 텐데 편협한 생각으로 큰 실수를 한 것 같다. 언제든 화실로 오셨으면 한다.” 그녀의 넓은 마음과 용기에, 스스로의 구업을 다시 절감하며 나 또한 진심으로 사과했다. 말이 그저 습관처럼 혀에서 날아가지 않고, 내 마음과 생각에 뿌리를 두고 떠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나날이다.

구미래 불교민속연구소장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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