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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나라를 향한 가벼운 발걸음4_존자의 법문“종교는 사랑과 연민을 극대화시키는 도구”
  • 글  ·  정상교
  • 승인 2019.07.16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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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 존자가 법회에 앞서 세계 각국에서
온 불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출처=달라이라마 공식사이트>

달라이라마께서 청중 사이를 지나 법좌에 오르는 동안 법회장은 고요함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결코 달라이라마의 권위에 압도된 불편한 적막감이 아니었다. 모두들 미소 띤 얼굴로 합장을 한 채, 다소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노(老)수행자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에 담느라 경건한 침묵을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법좌에 오른 존자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는 불교만 권하고픈 생각이 없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각자의 선택입니다. 내 종교가 최고니까 믿으라는 말은 잘못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본성은 사랑과 연민입니다. 이는 현대과학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종교란 사랑과 연민을 극대화시키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사랑과 연민을 극대화 시킬 수 없고 살인과 증오를 부추기는 종교라면, 그런 절대자를 믿는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내가 아는 타종교 지도자들은 모두 사랑과 연민을 위해 살아가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존자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는 동안 어린 티베트 스님들은 차를 담은 큰 주전자와 빵을 담은 양동이를 들고 복잡한 청중들 사이를 다니며 나누어주었다. 모두들 좁은 공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불편했지만, 빵을 먹고 차를 마시며 때로는 메모도 해가며 설법을 들었다. 엄숙하지 않지만 경건한 법회, 우리의 법회 모습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 깊었던 장면은 티베트 불교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라마’께서 세계인들을 향해 던진 일성, 즉 불교만을 권하고 싶지 않는다는 메시지였다.  
세상 어느 종교지도자가 감히 ‘내가 믿는 종교만을 권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포교 차원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종교보다 ‘사랑과 연민’이 더 크고 근본적인 가치라고 말 할 수 있는 종교지도자가 있을 수 있을까?  

“여기 모이신 많은 분들은 혹시 달라이라마가 복을 가져다준다거나 병을 고쳐줄 거라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에게 그런 능력은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머리 크기가 똑같습니다. 우린 모두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듣고 생각에 잠겼을 때 존자님은 당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우리 모두는 똑같은 머리 크기를 가졌으니, 자신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며 다시 한 번 법회장을 유쾌한 웃음으로 채워주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서양인들에게 불교는 건강을 위한 요가 수행이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명상의 의미로만 받아들여진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불교만을 권하고 싶지 않다.’는 존자님의 말씀은 너무도 당연한 선언이겠지만, 불교를 종교로 가진 필자에게 그 말씀은 많은 것들을 곱씹어보게 하였다. 어쩌면 지금 존자님의 말씀이 불교라는 가르침을 가장 잘 표현한 것임에도, 내 스스로 너무 불교를 종교적 교리의 틀 속에 밀어 넣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불교 교리와 역사와 철학에 대해 조금 공부했다고는 하지만 필자 역시 절에 가면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께 결국은 ‘잘 먹고 잘살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고 온다. 그런 소원을 묵묵히 받아주시는 그때의 부처님은 영락없이 신비하고 초월적인 존재에 다름 아니다. 불교가 여러 나라에 전해져 그 나라의 민간신앙과 합쳐지면서 붓다는 하늘을 날아다니고 구름위에 존재하는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 물론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조차 힘든 이들에게, 혹은 기아·질병·전쟁에 시달려야 했던 이들에게 불교의 교조인 붓다는 더더욱 신적인 존재여야 했을 것이다. 신이함과 기적이 동반되지 않는 종교는 대중적 확장성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붓다는 처음부터 신으로 태어나지도 않았고,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여러 유물과 유적이 인간으로서의 싯달타 태자의 태어남을 기록하듯이 그는 기원전 약 5세기경 옛 인도에서 태어난, 달라이라마의 말씀을 빌리자면 나와 똑같은 머리 크기를 가졌던 인간이었다. 

법회에 참석한 태국 수도원 공동체 스님들이
합장한 채 기도를 하고 있다.
<사진출처=달라이라마 공식사이트>

물론 ‘불타(佛陀)’로 번역된 인도어 ‘붓다(Buddha)’가 ‘깨달았다’의 의미를 가지듯 그는 깨달음을 얻은 위대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붓다(불타, 부처님)’가 되었다. 
지하철역에서 만나는 어떤 이들은 죽었다가 부활하지도 못한, 그저 80년 인생을 살다가 간 인간일 뿐인 붓다라는 존재를 따르는 불교를 우상숭배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불교는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저열한 믿음일 뿐이라고 공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인식할 수 없는 절대 창조주를 믿지도 않을뿐더러 붓다를 그 위치에 놓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일단 불교는 신이라는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신 역시 자신을 신으로 있게 해준 선한 행위의 업력(業力)이 다하면 다시 윤회하는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붓다와 신들의 본질적인 차이가 발생한다. 
즉, 붓다는 진리를 뜻하는 인도어 ‘다르마(Dharma, 진리)’를 완전하게 깨달았고, 신들은 그렇지 못했다. 진리에 대한 흔들림 없는 완전한 지혜의 유무, 그것이 붓다를 신보다 더 완전한 최상의 귀의처로 만들었다.     
붓다가 보여준 최상의 진리는 하늘을 날아다니고, 남의 마음을 읽고, 소원을 들어주는 기적이 아니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현상이 연속적인 흐름 속에 존재한다.’는 것과, 그래서 ‘영원불변하는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 영원하지 못하는 현상에 대해 많은 이들은 착각과 오해로 집착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고(苦)’로 표현되는 불만족과 슬픔과 괴로움과 불안정을 불러일으킨다. 싯달타 수행자는 현상의 본질을 바로 보았고, 그래서 집착을 끊었고, 결국 대자유를 얻은 깨달은 이가 되었다. 
따라서 누구나 붓다가 가르쳐준 진리의 본질을 확고하게 깨우친다면 그 역시 붓다가 될 수 있다. 불교에서는 붓다가 유일하고 절대적 존재, 교조적 존재일 필요가 없다. 진리가 고귀한 이유이다. 
붓다께서 80여 년의 삶을 마치려고 할 때 제자들은 두려움과 슬픔에 젖어 스승에게 여쭈었다. ‘이제 붓다이신 당신이 떠나시면 남은 이들은 누구에게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까?’
그때 붓다께서는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하는 대신 ‘진리를 등불 삼아 스스로를 밝히며 나아가라.’는 말씀만을 남긴 채 한 줌 우주의 먼지로 돌아갔다. 붓다는 그렇게 신이 되지도 않았고, 부활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가르침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랑과 연민이라는 이름의 자비가 우리를 늘 진리로 이끌어 주기 때문이리라. 
다시금 존자님의 말씀이 법회장에 울려 퍼진다.    
“저는 사랑과 연민을 제 수행의 본질로 삼았습니다.” 

 

정상교

현재 금강대학교 불교문화학부 교수. 천태종립 금강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 후 일본 동경
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동국대학교
(경주) 티벳대장경역경원 전임연구원을 역임했다. 저서로 〈도쿄대학 불교학과〉가 있다.

글  ·  정상교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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