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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세상을 잇는 다리4_조선 궁궐의 다리
  • 글 · 사진 이강식 기자
  • 승인 2019.07.16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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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762호 창덕궁 금천교(錦川橋). 조선 궁궐의 다리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영조는 창덕궁의 진선문과 시어소사이에 신문고를 다시 설치해 운영했다. 당시 백성들은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금천교를 건너 신문고를 울렸다.

궁궐 안에 있는 다리는 일반적으로 ‘금천 위에 놓인 다리’라는 뜻의 금천교라고 지칭하지만, 궁궐별로 명칭을 달리 부르기도 한다. 금천은 ‘임금이 사는 성스러운 곳과 백성들이 사는 곳의 경계’를 의미한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5대 궁궐인 경복궁(景福宮)·창덕궁(昌德宮)·창경궁(昌慶宮)·덕수궁(德壽宮)·경희궁(慶熙宮)에는 각각 금천교가 놓여 있다. 경복궁의 영제교(永濟橋)를 비롯해 다섯 곳의 금천교를 소개한다.

조선 제일의 법궁, 경복궁 영제교

경복궁(사적 제117호)은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이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후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1395년 처음으로 건립한 궁궐이다. 경복궁에는 여러 개의 다리가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제교(永濟橋)로,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에 놓여 있다. 경복궁을 건립하면서 설치된 당시의 이름은 금천교(錦川橋)였지만, 1426년 세종의 명을 받은 집현전 학사들이 다리 이름을 영제교로 지어 올려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1916년 경복궁 내에 조선총독부가 건립되면서 영제교는 해체되는 불운을 겪었다. 이후 2001년 경복궁 흥례문 일부를 중건하면서 원래의 자리에 옮겨졌다.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인 경복궁의 영제교. 경복궁을 건립하면서 설치된 당시는 금천교(錦川橋)였지만, 1426년 세종의 명을 받은 집현전학사들이 다리 이름을 영제교로 지어 올려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영제교는 전체 길이 13.85m, 너비 9.8m 규모. 임금이 다니는 가운데 길인 어도(御道)의 폭은 3.4m이며, 양쪽에는 각각 3.2m의 길이 나 있다. 다리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교(虹蜺橋)다. 다리 난간 옆과 아래에 있는 석수(石獸)가 사방에서 두 눈 부릅뜨고 금천 바닥을 감시하고 있다. 이 석수들을 ‘천록’ 또는 ‘산예’라고 한다. 동서남북에서 사찰로 들어오는 잡귀를 감시하는 불교의 사천왕과 비슷한 임무를 띠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수많은 관리들은 영제교를 건너 임금을 알현하거나 조정의 일을 보았을 것이다. 또 다리를 건너기 전이나 다리 위에서 몸가짐을 바로 하고, 의관도 정제했을 것이다.

영제교를 포함한 궁궐의 다리는 외빈을 맞는 공간, 망자를 보내는 공간, 때론 신분을 구별하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세종실록> 54권을 보면 세종 13년(1431년) 12월 10일에 세종이 “금후로는 광화문(光化門)에 부녀자들의 출입을 금하고, 영제교(永濟橋) 뜰과 근정전(勤政殿)의 뜰에도 또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라.”는 내용이 나온다.

또 <세종실록> 92권에는 세종 23년(1441년) 1월 11일 “처음으로 근정문(勤政門)에 나아가 조회를 받으니, 2품 이상은 영제교(永濟橋) 안에 서게 하고, 3품 이상은 영제교 밖에 서게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같은 내용으로 보아 영제교는 신분을 구분하는 역할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복궁에는 영제교 이외에도 향정원의 취향교, 경회루를 오가는 돌다리 3개가 더 있다. 현재 취향교는 본래 위치를 찾기 위해 보수 중이며, 경회루 돌다리는 통행을 제한해 눈으로만 감상해야 한다.

경회루를 오갈 수 있는 돌다리. 출입을 제한하고 있어눈으로만 감상할 수 있다.

원형 가장 잘 보존된 창경궁 옥천교

세종은 1418년 즉위한 뒤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수강궁(壽康宮)을 지었다. 이후 성종이 폐허처럼 남아있던 수강궁의 수리를 명한다. 이때 확장공사를 하면서 창경궁으로 궁명을 바꿨다. ‘구슬과 같은 맑은 물이 흘러간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옥천교(玉川橋, 보물 제386호)는 1484년(성종 15) 수강궁을 수리하면서 건립됐다고 한다. <철종실록>에는 다리 이름이 금천교(禁川橋)로 기록돼 있다. 길이 9.9m, 너비 6.6m의 이 돌다리는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에 들어서면 바로 보인다.

보물 제386호 옥천교(玉川橋)는 1484년(성종 15) 수강궁을 수리하면서 건립했다. ‘구슬과 같은 맑은 물이 흘러간다.’고 하여이름 붙여졌으며, 궁궐 다리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다리다.

다른 궁궐의 다리와 동일하게 홍예 2개를 이어 붙인 형태다. 홍예와 홍예가 이어지는 부분에는 이마가 넓고 턱이 좁은 삼각형 모양의 도깨비 얼굴이 새겨져 있다. 도깨비는 물길을 타고 들어오는 귀신을 쫓아내 궁궐을 수호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다리의 좌우로는 난간을 세우고, 양 끝에는 법수(法首)라는 돌기둥을 만들어 그 위에 동물상을 올려 놓았다. 다리의 바닥은 가운데가 높고, 양 끝이 낮게 만들었다. 궁궐에 남아있는 다리 중 원형이 잘 보존돼 있어 보물로 지정됐다. 창덕궁의 금천교(錦川橋), 경복궁의 영제교(永濟橋)와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궁궐다리로 손꼽힌다.

옥천교는 임금이 망자를 떠나보내는 장소이기도 했다. <철종실록> 8권에는 철종 7년(1856년) 3월 15일에 ‘전계 대원군(全溪大院君) · 완양 부대부인(完陽府大夫人) 묘소(墓所)에서 출구(出柩)할 때에 명정문(明政門) 밖 금천교(禁川橋)에서 망곡(望哭)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임금들이 금천교에서 망곡했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사찰이나 민가의 다리는 망자의 영혼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가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궁궐의 다리도 비슷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백성들 억울함 호소한 창덕궁 금천교

왕자의 난을 일으킨 뒤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경복궁 동쪽에 새 궁궐을 세우도록 했는데, 이 궁궐이 창덕궁이다. 창덕궁은 아름답기로 이름난 후원과 건물의 비정형적 조형미 덕분에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금천교(錦川橋, 보물 제1762호) 또한 웅장하고 조형미가 뛰어나다. 금천교는 돈화문(敦化門)과 진선문(進善門) 사이에 있다. 길이 12.9m, 너비 12.5m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이며, 의장(儀杖)을 갖춘 국왕의 행차 때 행렬의 폭에 맞도록 설치했다. 조선 궁궐의 다리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다리를 장식하는 조형물 또한 섬세하고 빼어나다.

옥천교의 홍예. 홍예 주변에는 석수와 도깨비 얼굴이 있는데,물길을 타고 들어오는 귀신을 쫓아내 궁궐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다리의 구조를 살펴보면 하천 바닥의 중앙과 물가에 놓인 기반석 위에 홍예 2개를 이어 놓았고, 홍예 위에는 장대석 모양의 돌을 얹었다. 다리의 바닥은 잘 다듬은 화강석을 3칸으로 구분해 설치했다. 다리 양끝 기둥 위에는 동물이 조각돼 있다. 난간에는 연화보주형(蓮花寶珠形) 장식, 하엽동자기둥(荷葉童子柱) 모양의 부조와 안상이 눈길을 끈다. 다리 측면의 홍예 사이 벽에는 도깨비 얼굴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쪽의 홍예 기반석 위에는 남쪽에 해태, 북쪽에 거북이가 배치돼 있다.

경희궁 금천교. 경희궁 터(현 서울역사박물관 입구)에 있다. 영조의 장례 행렬과 정조의 즉위 행렬이 지난 유서깊은 다리다.

금천교는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창건 당시의 모습을 잃지 않은 가장 오래된 궁궐 안 돌다리다. 특히 당시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건넜던 다리다. 영조는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의 고충을 듣기 위해 창덕궁의 진선문과 시어소 사이에 신문고를 다시 설치해 운영했다. <영조실록> 117권에는 영조 47년(1771) 11월 23일 내려진 어명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국초(國初)의 고례(古例)에 의거하여 창덕궁(昌德宮)의 진선문(進善門)과 시어소(時御所)의 건명문(建明門) 남쪽에 신문고(申聞鼓)를 다시 설치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 비록 신문고(申聞鼓)를 쳤다 할지라도 사건사에 관계되지 않는 자는 호남의 연해에 충군(充軍)시키도록 하라. …… 그리고 신문고의 전면과 후면에 ‘신문고(申聞鼓)’라고 세 글자를 써서 우부우부(愚夫愚婦)로 하여금 모두 알게 하라.”

백성이 신문고를 울리기 위해서는 금천교를 지나가야 하기에, 금천교는 조선시대 임금과 백성의 소통의 다리였다고 말할 수 있다.

경희궁 금천교의 난간.난간 아래로 돌짐승의 얼굴이 돌출돼 있다.
경희궁 금천교 홍예와 홍예 사이에 새겨진 도깨비 얼굴.

영조 장례 · 정조 즉위 행렬 지난 경희궁 금천교

경희궁은 광해군이 ‘정원군의 옛 집에 왕기(王氣)가 서렸다.’는 술사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 세운 궁이다. 건립 당시에는 ‘경덕궁’이라 이름 붙였다. 이후 영조가 1760년에 궁명을 경희궁으로 바꿨다. 경희궁 터는 광복 후 서울중 · 고등학교로 사용됐다. 이후 서울시가 경희궁 터를 매입해 사적 제271호로 지정했으나, 이곳에 서울역사박물관을 건립하면서 다시 훼손됐다.

경희궁은 영조가 승하한 곳이자 정조가 즉위한 곳이다. 영조의 장례 행렬과 정조의 즉위 행렬 모두 금천교를 지나갔을 것이다. 영조의 시대가 저물고 정조의 시대가 시작된 역사의 현장에 경희궁 금천교는 존재했다.

덕수궁 금천교.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이 원래 위치에서 14m 가량 뒤로 옮겨져 금천교가 대한문과 바로 붙어 있게 됐다.

 

금천교는 경희궁을 건립할 때부터 설치됐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34권에는 광해 10년(1618) 11월에 “경덕궁(慶德宮)의 융정전(隆政殿)의 철망과 금천교(禁川橋)의 돌난간 등의 공사를 1월 보름 뒤부터 속히 시작할 것이며 …….”라는 기록이 있어, 금천교의 건립 시기를 알 수 있다.

금천교는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 안에 흐르던 금천(禁川)에 놓인 다리다. 여느 궁궐 다리와 마찬가지로 홍예 두 개가 이어져 있는 형태다. 양쪽의 난간 아래에는 돌짐승 머리가 4개씩 돌출돼 있고, 홍예 사이에는 도깨비 얼굴이 새겨져 있다. 돌짐승과 도깨비 얼굴은 바깥의 나쁜 기운이 궁궐 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한다.

덕수궁 금천교 홍예와 물길. 다른 궁궐 다리에 비해 홍예가 비교적 작다.

현재 다른 궁궐의 다리는 궐내에 위치해 있지만, 경희궁의 금천교는 도로와 현대식 건물에 둘러싸여 있어 제자리를 잃은 듯한 느낌이 든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 경성중학교가 설립되면서 땅에 묻혔다가 서울역사박물관 건립과 함께 발견된 옛 석조물을 바탕으로 2001년 복원해 옛스런 멋 또한 다른 다리에 비해 덜하다. 그래도 사람들의 발길이 닿기를 기다리는 듯 제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덕수궁 금천교 오른쪽에 있는 하마비.

고종황제 자취 서린 덕수궁 금천교

덕수궁은 월산대군의 집터였는데,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임시거처로 사용됐다. 광해군 때 경운궁으로 개칭됐다가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뒤 머물면서 덕수궁(德壽宮)으로 바뀌었다.

덕수궁에도 금천(禁川)을 파고 돌다리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 다리가 언제 설치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에 들어서면 바로 앞에 금천교가 보인다. 대한문이 원래 위치에서 14m 가량 뒤로 옮겨져 금천교가 대한문과 바로 붙어 있게 됐다. 덕수궁 금천교도 여타 궁궐의 다리와 같이 바닥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리고 다리 오른쪽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얼핏 보면 다리가 아니라 길 옆에 난간을 세워놓은 듯하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축소된 덕수궁과 운명을 함께한 다리이기에 더욱 쓸쓸함이 느껴진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논하거나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며 지났을, 백성들이 억울함을 풀고자 신문고를 치러 다녔을 궁궐의 다리. 오늘날에는 한복을 입은 내 · 외국인 관광객들이 오가며 그 멋스러움에 탄복하며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명소가 됐다. 그 위에 서서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기 바란다.

글 · 사진 이강식 기자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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