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이름, 희인 언니에게

잘 계신 거죠? 거기서는 아프지 않고 평안하신 거죠?

어제는 은구비공원에 다녀왔어요. 언니가 아침마다 카페 문을 열어놓고 산책으로 하루를 시작하던 곳, 좋은 사람이 오거나 좀 걷고 싶을 때면 언제나 즐겨 찾던 곳. 저와도 종종 걸었어요. 하루는 제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어쩜 이리 딱 맞니!” 하면서 환하게 웃던 언니 얼굴이 선해요. 키 작은 제 어깨를 너무도 다정하게 감아 안고는 “우리 좀 이렇게 걷자.” 하셨죠. 우리는 마치 연인처럼 한참을 걸었는데, 호젓한 숲길에 들어서자 이번엔 “한번 안아보자.” 하면서 저를 돌려세웠죠. 저는 “누가 보면 우리 사귀는 줄 알겠어요, 언니.” 하면서도 언니 품에 포옥 안겼더랬어요.

그 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언니가 언니의 발병을 알았던 때가 그 즈음 같아요. 저는 어떤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있다가 언니가 카페 문을 닫는다고 했을 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죠. 춤을 췄던 사람, 키가 크고 여리여리한 몸매를 타고나서 늘 부러웠던 사람, 차 팔 생각보다 카페를 ‘사랑방’으로 만들며 아낌없이 먹을 것을 내오던 사람, 시노래 가수들에게는 콘서트를 열어주고 시인들에게는 시집을 사주며 예술가들의 대모 역할을 톡톡히 했던 사람, 무엇보다도 시를 좋아했던 사람.

언니를 떠올릴 때마다 제가 받은 넘치는 사랑을 말로 다할 수 없어요. 저는 늘 바쁘다고 종종거리면서 언니가 열 번 부르면 한 번 갈까 말까했는데, “잠깐 와서 이것만 가져 가.” 해서 가면 복숭아·사과·굴비·떡 등을 안겨주시곤 했어요. 한번은 “제게 왜 이러세요?” 진심으로 미안해 투정부리듯 말했더니, 언니는 “좋은 시 쓰라고!” 아주 흔쾌하게 말했어요. 어느 날은 카페 문 여는 시간에 가서 함께 문을 닫고 나온 적도 있어요. 오전 일찍 잡지 인터뷰를 했고, 언니와 점심을 먹고는 책 읽고 놀다가 늦은 저녁 카페 손님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제가 과음했던지 느닷없이 울음이 터졌죠. 화장실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우는 저에게 언니가 다가와 말없이 토닥여 주었어요. 무슨 일이냐, 묻지도 않고 가만가만…….

기억해요? 남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따듯했던 언니가 자신에게는 왜 그리 혹독했을까요? 저는 언니가 아프고 나서야 아주 오랫동안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다가 큰 병이 찾아왔는데도 어떤 수술도 병원 치료도 거부한 채 자연치유 방식을 선택했죠. 십여 년 넘게 카페를 열고 닫았던 습관대로 일찍 일어나 신원사 근처 명상센터로 출퇴근을 하셨죠. 좀 더 적극적으로 치료에 나서지 않는 언니가 밉기도 했어요. 언니를 아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고 묻고도 싶었어요. 언니와 함께 신원사를 걸을 때 ‘언니 참 나쁘다.’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오는데 못했어요. 죽음이 별거 아니라는 듯 평화로운 표정으로, 불현듯 찾아온 제 손을 꼭 잡고 즐거워하는 언니에게 불퉁거리는 말을 차마 못했어요.

“우리가 모르는 사이/완행열차는/서서히/종착역에 도착했다.” 이 시는 언니도 잘 아는 유용주 시인의 ‘무덤’인데요. 언니도 모르는 사이 종착역에 도착한 건가요? 그곳은 환한가요? 켜켜이 접혀 있던 내면의 통증 다 가시고 접었던 춤 다시 추면서 훨훨 자유로운가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언니, 저는 여전히 바쁘게 살고 있어요. 언니처럼 독하지(?) 못해서 부지런히 사는 수밖에 없어요. 그릇이 작아 무엇을 크게 이루지는 못해도 일상 속에서 ‘작은 승리’를 쌓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잘남’은 내 몫이 아니지만 ‘잘 사는 것’은 내 의지에 달려 있다고 믿으면서 말이에요. 잘 사는 것이 별건가요. 좋아하는 일하며 가까운 사람들 곁에 오래오래 머무는 것, 그리고 크고 작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사람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엊그제 네 번째 시집 〈울컥〉이 나왔어요. 이번 시집은 언니가 참 좋아했던 〈작은 詩앗 채송화〉 동인지에 수록했던 짧은 시 50편을 고르고, 사진과 함께 콜라보 시집으로 묶었어요. 언니가 곁에 있으면 누구보다도 기뻐했을 텐데, 그러고 보니 지난해 나온 세 번째 시집도 못 보고 가셨군요. 아 나쁜 사람!

“밥그릇 속으로 지는 꽃 /배롱나무가지를 흔드는 새 울음소리//온몸에 뿔을 세운 나무의 안쪽으로/야위고 수척한 태 감추는데//비 그치고 고요해진 시간을 틈 타/자신을 지우기도 하는데//새들이 들락거리며 만든/꽃발자국 환장하게 붉다//행여 다녀가시라고/훌쩍 뛰어오시라고”

이번 시집에 수록된 졸시 ‘빈집’이예요. 제 생에 들어와 붉디붉은 꽃발자국 찍어 놓고 훌쩍 떠나버린 언니! 보고 싶어요, 아주 많이 보고 싶습니다. 꿈속이라도 다녀가세요.

함순례

1993년 〈시와 사회〉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뜨거운 발〉·〈혹시나〉·〈나는 당신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울컥〉이 있다. 한남문인상 수상했으며, 시 동인지 〈작은 詩앗 채송화〉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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