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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귀신1
  • 글  ·  민순의
  • 승인 2019.07.16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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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왕도는 지옥에서 죽은 자의 죄를 심판하는 열명의 왕, 즉 시왕(十王)을 그린 불화다.〈예수시왕생칠경(預修十王生七經)〉에 따르면 사람은 죽은 후 3년에 걸쳐 열명의 왕에게 재판을 받는다. 고성 옥천사 시왕도. 보물 제1693호.

세상에는 귀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많을까? 믿지 않는 사람이 많을까? 그 수치를 계산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 1,400만 명, ‘신과 함께-인과 연’ 1,200만 명의 관객 수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이 결코 낮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귀신’이라고 하면, 흔히 동양 문화권에만 존재하는 비과학적 존재를 떠올리지만 동서양 할 것 없이 모든 종교에는 귀신이 존재한다. 다만,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와 살고 있는 문화로 인해, 타 종교와 타 문화에 등장하는 귀신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막연하게만 생각해오던 귀신. 무더운 여름을 맞아 종교와 귀신, 불교와 귀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다양한 개념으로 등장할 뿐
모든 종교에는 귀신이 있다

현대인에게 ‘귀신’이라는 단어는 공포심을 유발한다. 포털사이트에 ‘귀신’을 입력하면 기이하고 흉측한 사람 형상의 이미지들이 화면을 가득 채워,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무서운 귀신은 영화나 소설 등 대중문화콘텐츠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동양의 귀신은 대체로 긴 머리를 늘어뜨린 젊은 여인의 모습이고, 서양의 귀신은 위협적인 표정을 한 악령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모두 관객을 놀래고 두렵게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동양의 귀신은 어딘가 하나씩 슬픈 사연을 지닌 채 사람 주변을 서성이기 일쑤고, 서양의 악령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사람을 괴롭히려 든다.

적지 않은 평론가들은 이제는 고전이 되어 버린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공포영화 ‘식스 센스’(The Sixth Sense, 1999)가 서양인들에게 그토록 새로웠던 이유를, 동양인 출신 감독이기에 포착할 수 있었던 ‘억울한 귀신들’의 존재감이라고 꼽았다. 그렇게 놓고 보면, 그들 사연의 처연함이 관객의 스산한 마음에 어떤 공감대를 형성케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어루만질만한 공감의 대상이건, 무조건적인 악의의 소유자이건 일단 모든 귀신은 ‘그들이 있었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져야 한다. 해원(解冤)과 설득을 통해서건, 대결과 처단을 통해서건 모든 귀신들에게 축귀(逐鬼)는 불가피한 처우이다. 아마도 현대의 대중들에게 귀신은 살아있는 인간과 같은 공간을 점유해서는 안 되는 존재인 것 같다.

신을 보는 합리주의적 시각

“당신은 귀신의 존재를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많은 현대인들은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현대는 근대성(Modernism)의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 사회시스템을 갖고 있다. ‘근대성의 원리’란 자연과학에 토대를 둔 합리적 세계관을 말한다. 이를 토대로 두고 말하자면, 귀신은 실재할 수 없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합리성을 견지하면서도 끝내 귀신(또는 영혼)의 존재를 놓을 수 없었던 20세기 초의 한 의사는 임종 전후의 체중을 측정하여 영혼의 무게를 21g이라고 결론짓기도 했다.(1907, 던컨 맥두걸) 만약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21g의 무게를 지닌 물질로서의 영혼이 귀신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맥두걸의 실험은 이후 학계에서 재현되지 않고 있고, 그의 주장은 확인 없이 방치되고 있으므로, 그의 실험결과를 사실로 확정짓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 후한시대의 사상가 왕충(王充, 30?~100?) 같은 이는 자신의 저서 〈논형(論衡)〉에서 “설령 사람에게 혼령이 있다고 해도 그가 입고 있던 의복에까지 혼령이 있지는 않을 터인데, 사람의 눈에 띄는 모든 귀신은 의복을 걸치고 있으므로, 이는 귀신이 실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근대의 합리주의에 비추어도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렇지만 1세기 동아시아의 인물인 왕충이 귀신의 존재 여부를 논증하는데 지면을 할애했고, 20세기 서양 과학자가 영혼의 실재성을 규명하고자 애를 썼다는 사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많은 문명권의 사람들이 귀신  · 영혼  · 혼령 등의 존재에 대해 깊은 관심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포털사이트를 압도하는 수많은 귀신의 이미지와 매년 전 세계 국가에서 제작되는 귀신 및 악령 등장 공포영화의 편수는 현대인들이 제아무리 정색하고 귀신의 비실재성을 언명(言明)한다고 해도, 여전히 자신들의 마음속에 귀신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두고 있음을 방증한다.

귀신은 아직 과학적으로 규정되지 못했다. 하지만 매년 세계 각국에서는 귀신과 악령이 등장하는 수십,수백 편의 공포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의 마음속에 귀신을 위한 자리가 마련돼 있음을 방증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귀신

종교라고 다를까? 〈성경〉은 신약과 구약을 막론하고 곳곳에서 귀신을 거론한다.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는지라.”(사무엘상 28:13)

구약의 지도자인 사무엘이 이민족과의 전쟁 와중에 죽었을 때 ‘신접한 여인’이 그의 영혼을 만나는 장면이다. 이 부분의 영어 번역에 따르면 사무엘의 영혼은 ‘땅으로부터 솟아난 유령의 형상(ghostly figure coming up out of the earth)’으로 표현된다. 사무엘의 영혼은 당시 유태인의 정치지도자이자, 장차 그들의 첫 번째 왕으로 등극할 사울에게 미래의 일을 예언한다. 살아있는 이의 눈앞에 나타나는 죽은 자의 형상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서도 주인공 햄릿의 아버지로 변주되고 있다.

신약에서도 귀신의 이야기는 계속되는데, 예수의 전도 과정 곳곳에 등장한다.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다.”(마태복음 12:22)

여기에서 귀신들린 자는 말 그대로 ‘귀신에 사로잡힌 자(demon-possessed man who was blind and mute)’를 번역한 것이다. ‘demon’은 유일신 종교전통에서는 악한(evil) 존재로 인식된다. 즉,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예수로부터 내쫓김을 당하는 귀신은 단순히 죽은 자의 넋이나 혼령 정도가 아니라, 보다 근원적으로 절대자 유일신의 대척적 존재인 사탄(Satan) 또는 마왕(Devil)과 연계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기독교에서 귀신은 넋·혼령(ghost)과 악마·마귀(demon)의 개념을 모두 갖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번역 과정에서 ‘귀신’이라는 표현은 악마·마귀 쪽에서 사용되고 있으나, 오직 악마적 존재만을 귀신으로 상정하는 이러한 경향성이 타문화에서도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도 〈신약성서〉와 〈구약성서〉를 막론하고 귀신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귀신은 넋·혼령·악마·마귀의 개념을 모두 갖고 있다.사진은 악마를 형상화한 이미지.

인도와 중국에서 귀신

인도의 경우에도 귀신을 의미하는 다양한 개념들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존재하는 것’이라는 뜻을 지닌 ‘부타(bhūta)’는 죽은 사람의 영혼, 특히 거친 죽음을 당했거나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못한 자의 영혼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종종 한자어 ‘유(有)’로 번역된다.

인도의 귀신 중 우리에게 친숙한 존재는 아귀(餓鬼, preta)·야차(夜叉, yakṣa)·나찰(羅刹, rākṣasa) 등일 것이다. 본래 아귀는 장례식을 치르기 전 죽은 이의 혼령(spirit of a dead) 또는 장애를 가진 채 죽은 자나 어린아이의 넋을 의미했다. 이후 불교에 수용되어 산 같이 커다란 배와 바늘처럼 가느다란 목구멍 때문에 언제나 배고픔으로 고통 받는 존재로 변화되었음은 알려진 바다. 야차는 인간에게 짓궂게 굴기도 하지만 대체로 온화한 성격의 자연정령들로, 인도 신화에서는 땅 속이나 나무뿌리에 숨겨진 보물을 관리하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에 반해 나찰은 인간을 괴롭히는 악령이다.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Ramayana)〉에는 야차와 나찰이 모두 등장하는데, 영웅 라마(Rāma)의 부인인 시타(Sita) 왕비를 납치해 간 존재가 바로 나찰의 왕인 마왕(魔王) 라바나(Rāvaṇa)이며, 야차들은 시타의 구출에 일조한다. 흥미롭게도 〈라마야나〉에 따르면 야차의 왕인 쿠베라(Kubera)와 나찰의 왕인 라바나가 서로 이복형제 사이인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인도신화에서 또 다른 신적 존재로 천신(天神, deva)이나 아수라(阿修羅, asura)를 거론할 수도 있지만, 이들을 귀신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권능이 상당하다. 아귀와 마찬가지로 야차와 나찰, 천신과 아수라 등도 역시 후대에 와 불교에 수용되어 다양한 신중권속으로 자리하게 된다.

유일신 전통의 서남아시아나 인도와 달리 중국에서는 귀신을 사악한 속성과 연결 짓지 않고, 단순히 죽은 이의 혼령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청대에 포송령(蒲松齡, 1640~1715)이 지은 민담집인 〈요재지이(聊齋志異)〉에서는 어여쁜 여인의 혼령이 살아있는 남성과 혼인을 맺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간혹 그들이 악의를 갖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은 환경에 따른 일시적인 상황일 뿐이다.

〈논어(論語)〉 위정 2편에서 공자는 “자기가 모셔야 할 귀신이 아닌데도 그를 제사지내는 것은 아첨[非其鬼而祭之, 諂也]”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춘추시대에 이미 귀신을 제사지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대 중국인들이 귀신을 죽은 자의 넋, 혹은 하늘과 땅의 신령한 존재 정도로 인식하였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후한 때 허신(許愼, 58?~147?)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도 귀(鬼)는 “사람이 돌아오는 곳[人所歸爲鬼]”으로서 “귀인이란 죽은 사람을 의미한다. [古者謂死人爲歸人]”고 하고, 신(神)은 ‘천신(天神)’을 가리키는 것이니 “만물을 내는 것[引出萬物者也]”이라고 하였다.

중국과는 다른 한국 귀신

고대로부터 유교와 불교의 영향 하에 있던 한국의 종교문화 역시 제사의 대상이 되는 〈논어〉의 귀신 개념과 함께 아귀·야차·나찰 또는 천신과 아수라 같은 인도 태생의 귀신적 존재를 모두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 고유의 귀신 개념은 역시 무속에서 찾을 수 있다.

무속에서는 다양한 신격이 등장하지만 크게 무당의 몸주가 되는 신격(주로 조상신), 무당의 숭배 대상이 되는 신격(일월성신·산신·장군신 등 권능이 뛰어난 신), 그리고 퇴치의 대상이 되는 신격으로 구분될 수 있다.(이들은 진오귀굿을 통하여 저승으로 보내진다) 이중 귀신의 범주에 가장 잘 들어맞는 것이 마지막의 신격들이다. 이들은 거의 모두 죽은 뒤에도 이승에 미련과 원한이 남아 살아있는 인간의 주변을 배회하는 사자(死者)의 혼령이다. 즉, 한국의 무속에서도 귀신이란 일차적으로 죽은 이의 넋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도깨비는 우리가 흔히 귀신으로 인식하는 것과는 또 다른 유형의 초자연적 존재이다. 인간에게 호의적이거나 악의적인 양면성을 모두 보이지만, 치명적인 해를 끼칠 만큼 사악하지는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의 꾀에 넘어가 이용당하는 미련함도 보인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도화녀비형랑(桃花女鼻荊郞)’ 조에서 비형랑이 거느리고 다니며 놀았다는 귀신의 무리[鬼衆]란 바로 도깨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로 보건대 한국에서는 일찍이 삼국시대 때 이미 도깨비에 대한 신앙이 존재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귀신 존재 인정은 인간 본능,
우리는 귀신과 함께 살아간다.

앞서 언급했듯이 모든(혹은, 거의 모든) 종교에는 귀신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며, 그 귀신들은 종교전통에 따라 저마다의 모습과 성격으로 또는 하나의 종교전통 내에서도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인간에게 우호적일 수도, 적대적일 수도 또는 무관심할 수도 있다. 인간 또한 그들에 대해 공포·적대감·연민·애정 등 갖가지의 태도를 지니며, 이러한 태도는 문화나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된다.

인지종교학적 측면의 귀신

그런데 귀신문화의 근원적 본질이 보여주는 이러한 보편성은 인간의 심성이 태생적으로 귀신이라는 존재를 인정하게끔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품게 한다. 실제로 초기 종교학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인류학자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Edward Burnett Tylor, 1832~1917)는 자신의 저서 〈원시문화(Primitive Culture)〉에서 “살아있는 존재 뿐 아니라 생명이 없는 대상에도 영혼 또는 정령이 깃들었다.”고 하는 몇몇 원시 부족민들의 신앙을 애니미즘(animism)이라고 명명하며, 이것이야말로 종교의 기원이 된다고 주장했다.

문명화되지 않은 문화에서 발견되는 신앙행위를 종교의 기원으로 두고, 이로부터 고등한 종교로 발전해갔다고 하는 소위 종교진화론적 관점은 오늘날 비판받고 있지만, 정령에 대한 믿음을 포착한 그의 눈썰미는 최근 진화심리학 또는 인지종교학으로부터 새롭게 재평가를 받는 추세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모든 사물이 마음이나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때 ‘인지적인 안락함’을 느낀다. 인간은 진화과정에서 인지능력을 발달시켜왔기 때문에 다른 존재도 자신과 마찬가지의 인지적 구조를 토대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가정하게 됐다는 말이다. 자신의 인지구조를 보편화하면 이종의 다른 존재에 대한 인간의 무지와 혼란을 심리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진화심리학과 인지종교학자들은 이것이 바로 애니미즘을 낳은 인간의 기본적 심성이라고 본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 따르면 애니미즘은 인간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진화전략이기도 하다. 실체가 불분명한 사물을 일단 살아있는 것으로 직관해야만 운동기관의 재빠른 반응으로 이어져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을 신속하게 모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형상을 인지할 때 본능적으로 깜짝 놀라게 되는데, 이는 그 형상이 실재하는 것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일단 가능한 위험요소에 대해 우리의 경각심을 높이는 심리적 기제로 이해된다.

귀신의 의미와 범주

귀신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감수성 또한 이런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바로 어제까지 삶을 함께 나누었던 이가 오늘 갑자기 존재하지 않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고 가정해보자.

존재하지 않는 이를 넋으로라도 존재한다고 상정해야만, 그리하여 그와 마음으로라도 혹은 매개자를 통해서라도 소통이 가능하다고 믿어야만 인간은 그 단절을 견디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어떤 사물이 또는 불분명한 기운의 응축일지라도 그것이 의지와 힘을 가졌다고 가정해야지만 인간은 자신이 맞닥뜨리는 불가해한 상황을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의지 주체와 대화를 하건 대결을 하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조상숭배 역시 인간에게는 자연스런 행위다. 돌아가신 분은 내 마음에 소환되어 내 눈앞에 현전한다. 그를 부르는 내 마음이 그리움이건 회한이건 의혹이건, 그에게 요청하는 것이 나의 안위이건 그의 휴식이건 간에 말이다. 내가 그를 무의식에서 완전히 잊지 않는 한 그는 때때로 나를 방문한다.

다시, 귀신의 의미와 범주를 정리해 보자. 여러 종교문화를 검토한 바 그것은 우선 죽은 사람의 넋이고, 혼령이다. 그들은 의지를 갖고 있으며 소통이 가능하다. 다음으로 그것은 어떤 초자연적 신령이다.(실제로 ‘귀신’의 사전적 의미도 저 둘을 지칭한다) 이 신령의 근원은 하늘이나 땅일 수도 있고, 예전에 살았던 어떤 인간 또는 인간들일 수도 있다. 또 자연과 사물의 기운일 수도 있고, 어둠 속에 도사린 깊은 악의 기운일 수도 있다. 실재하건 실재하지 않건, 또 의식적으로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인간이 이들을 인지하게 되는 것은 진화과정에서 형성된 인간의 직관력 덕분이다. 다만 문화에 따라, 그 문화의 풍속과 관습에 따라, 그들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뿐이다. 시절에 따라, 그 시절이 요구하는 파토스(Pathos)에 따라 그들도 서로 다른 목적으로 나타나는 것뿐이다. 한국에서는 이것을 통칭하여 ‘귀신’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귀신의 존재 양상에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각각의 문화가 사유하는 인생관과 우주관이 투영되어 나타난다.

불교에서 귀신의 종류

그러면 불교에는 어떤 귀신들이 있을까? 〈불광대사전〉에 따르면 귀신은 “공포와 위력을 갖추고 자유자재로 변화할 수 있는 괴물”로 정의된다. 역시 선한 귀신과 악한 귀신이 있는데, 선한 귀신은 세간을 수호하거나 불법을 수지하는 존재들로 대범천왕(大梵天王) · 33천왕(三十三天王) · 사천왕(四天王) · 염마왕(炎魔王) · 용왕(龍王) 등이 이에 속한다. 나찰은 대표적인 악귀로 꼽힌다. 인도신화의 선례에 따라 야차는 선한 귀신도, 악한 귀신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사전은 건달바(乾達婆) · 야차 · 아수라(阿修羅) · 가루라(迦樓羅) · 긴나라(緊那羅) · 마후라가(摩睺羅伽) 등의 6부귀신(六部鬼神)을 불교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귀신이라고 정리한다. 우리에게는 팔부신중 또는 팔부신장으로 불리는 여덟 부류가 더 유명한데, 위의 6부귀신에 천(天)과 용(龍)이 더해지면 흔히 말하는 여래팔부중이 된다.

한편 사천왕에 소속된 팔부중으로 용 ·야차 ·건달바 · 비사사(毘舍闍) ·구반다(鳩槃茶) · 벽협다(薛荔多) · 부단나(富單那) · 나찰(羅刹)이 열거되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악귀의 대표로 꼽히는 나찰이 팔부중으로 귀속된 데에서 선과 악에 대하여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불교의 태도를 엿보게 된다. 즉, 한 존재의 성질과 특성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기능될 수 있으며, 악한 무리도 결국 선한 힘으로 조복시켜서 우호적인 존재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자세인 것이다. 사전에서 제시하는 불교의 귀신들은 대체로 인도신화의 크고 작은 신격들이 부분적으로 수용된 것이다. 큰 신격들조차 인도 시절 누렸던 지위는 상당히 조정되어, 불교의 신중단에서는 불보살 밑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천신·사천왕·팔부중의 위계질서 체계에 자리한다.

영화 ‘신과함께-죄와 벌’과 ‘신과함께-인과 연’은 각각 1,400만과 1,200만의관객을 동원했다. 많은 현대인들은 귀신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지만, 잠재적으로 그 존재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은 ‘신과함께’ 연극 포스터.

하지만 사전적 정의와는 달리 한국의 불자들에게는 팔부신중이 귀신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신중이란 어디까지나 불법을 수호하며 위신력을 발휘하는 초월적이고 권능적인 존재이다. 한국 불자들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와 닿는 귀신이란 역시 영산재와 수륙재 등 각종 재(齋) 의식에서 하단에 위치하며, 시식의 대상이 되는 존재들이 아닐까 싶다. 바로 아귀와 고혼(孤魂)들 말이다. 귀신을 주로 죽은 이의 넋으로 이해해 왔던 한국 민속신앙에서의 용례를 감안한다면 조상의 영가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겠다.

귀신과 함께하는 모든 의례는 축제

한국불교의 재 의식에서 먹고 먹이는 일은 몹시 중요하다. 석가모니의 영산회상을 재현하는 영산재에서도, 무주고혼의 천도를 기원하는 수륙재에서도, 막 돌아가신 영가의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49재에서도, 언제나 불보살과 신중단 그리고 영가와 귀신과 아귀를 모셔놓고 음식을 차려 공양을 올린다. 불보살과 신중 같은 위신력 있는 초월적 존재이든, 아니면 무주고혼이나 아귀처럼 가련하기 짝이 없는 초자연적 존재이든, 그들은 모두 세간을 이루는 존재들로서 존중받고 위무 받아 마땅하다. 먼 길을 오셨기에 또는 오랫동안 외로이 굶주렸기에 지치고 허기졌을 그들에게 먼저 음식을 대접하여 기운을 차리게 한 후 불법의 가르침을 주고받음으로써 사후에라도 성불의 길에 들어서도록 하는 일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갖게 되는 ‘마음’이다. 인지종교학에서의 말마따나 그들을 나와 다르지 않은 ‘마음’을 지닌 존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불교를 잘 모르는 분들 중에는 이와 같은 불교 재 의식의 의도와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비판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분들은 불교가 조상을 귀신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보여 마땅치 않은가 보다.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세상에는 다양한 귀신들이 있고, 특히 오랫동안 귀신을 죽은 자의 넋으로 생각해온 한국의 종교문화에서 그 구성원의 일부가 조상을 귀신으로 여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 다른 분들은 불교가 귀신을 내세운 영산재나 천도재 등을 통해 장사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초자연적 존재들에게도 사람의 마음을 투영하여 똑같이 대우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다.

과학적 합리주의를 신뢰하는 분들은 종교가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종교는 과학과는 다른 범주의 영역이다. 비물질적 존재인 귀신을 대접하고 남은 물질로서의 음식이 그대로 남는다한들 또 어떠한가? 그 남은 음식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이 누리고 어울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행위가 된다. 그래서 모든 의례는 축제의 일환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문화, 모든 종교에는 귀신이 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귀신과 함께 살아간다. 그렇다면 귀신은 어떤 방식으로든 대접받아 마땅하다.

민순의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종교학과 대학원에서 ‘여래장사상의 법신 개념과 인간관 연구를 중심으로’란 주제로 석사학위를, ‘조선전기(度牒制度) 연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객원연구원,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전문연구원을 거쳐 현재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불교에서의 의례의 위치와 역할> 등 다수의 논저가 있다.

글  ·  민순의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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