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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4_성주 한개마을279호
  • 글 · 이수인 사진 · 이강식 기자
  • 승인 2019.07.1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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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향한 충절 서린
성산이씨 600년 집성촌

경북 성주 한개마을은 진주목을 지낸 이우가 입향해 개척한 이래 600년을 이어 온 성산이씨 집성촌이다.하늘에서 내려다 본 한개마을. <사진제공=한개마을보존회>

경북 성주는 ‘참외’의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근래엔 ‘사드’ 배치 문제로 홍역을 앓기도 했다. 가야산 자락에 위치한 성주는 불교·유교문화재를 비롯해 많은 문화유산이 남아있는 문화의 고장이다. 또한 월항면 인촌리 태봉 정상에 세종대왕의 여러 왕자와 세손인 단종의 태를 안장한 세종대왕자 태실(胎室, 사적 제444호)이 자리했을 정도로 풍수적으로도 명당으로 꼽히는 지역이다.

진주목 지낸 이우 터 잡아

성주군 월항면에 위치한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조에 진주목을 지낸 이우(李友)가 입향(入鄕)해 개척한 마을이다. 현재 후손인 성산이씨(星山李氏)들이 모여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17세기부터 과거에 급제한 이름난 인물을 많이 배출했는데,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한주(寒州) 이진상(李震相) 등 유학자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등을 들 수 있다.

‘한개’라는 마을 이름에서 ‘한’은 ‘크다’는 뜻이고, ‘개’는 ‘개울’ 또는 ‘나루’를 의미한다. 예전에 큰 개울(나루)이 있었다고 붙여진 순우리말이다. 지형은 마을 뒷산인 영취산이 좌청룡과 우백호가 되어 마을을 감싸 안은 형세이고, 마을 앞에는 백천(白川)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어 영남 제일의 길지(吉地)로 꼽힌다.

한개마을 위쪽에서 본 기와집 지붕의 부드러운 곡선이 산 능선과 잘 어우러진다.

한개마을에는 75호의 전통가옥이 있다. 그 중 10동의 건축물은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대부분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사이에 건립됐다. 집집마다 안채  · 사랑채  · 부속채 등이 대지의 특성에 맞게 배치돼 다양한데, 지붕  · 대청  · 안방  · 부엌  · 툇마루 등은 전통가옥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또 옛 가재도구와 유교적 생활공간도 잘 보존돼 있어 2007년 국가민속문화재 제255호로 지정되었다. 전통 가옥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토석(土石)담도 잘 어우러져 문화유산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6호 대산동 월곡댁(月谷宅).20세기에 지은 건물이면서도 각 건물이 독립적으로 배치돼 있는 등한개마을의 공통된 특징을 잘 지니고 있다.

39년 외지생활 접고 쉰에 귀향

필자는 1958년 한개마을 북비(北扉) 응와종택(凝窩宗宅)에서 태어났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4학년 때 대구로 유학을 간 이후 39년 간 학업과 직장을 이유로 도시를 떠돌았다. 2007년 쉰의 나이가 되어서야 귀향했는데, 당시 응와종택(凝窩宗宅) 종손인 종형의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한개마을보존회를 만들어 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귀향을 해보니 참외농사로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마을 주민들에게 민속마을 지정은 결코 환영받는 일이 아니었다. 보존회 정관을 만들며 혼자 고군분투했다. 얼마 안 되는 군 지원금으로 잡초를 뽑고, 꽃도 심는 등 작은 일부터 시작했다. 들인 노고가 헛되지 않았는지 2009년 마을 복원사업의 첫 삽을 뜨게 됐다. 무너지고 허물어진 담장을 보수하고, 우선적으로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8개의 재실과 서당의 복원을 시작했다.

한개마을 전통가옥의 토석담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우봉이씨 할머니

한개마을은 성산이씨 집성촌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절반은 시집와 성산이씨 누군가의 아내로, 엄마로, 할머니로 살았던 분들이다. 이들 중에 대표적인 분이 필자의 12대조가 되는 월봉 이정현 선생의 부인이신 우봉이씨다.

월봉 선생은 한강 정구 선생의 제자로, 한개마을 최초로 문과에 급제한 분이다. 1612년(광해군4년) ‘홍문정자(弘文正字)’라는 벼슬을 하던 중 26세의 나이에 그만 요절을 하고 말았다. 우봉이씨의 친정에서는 23세 밖에 안 된 딸의 개가(改嫁)를 권했지만, 할머니는 한양의 세간살이를 정리하여 어린 아들(수성)과 함께 한개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백천 건너편에 ‘일강정’이라는 서당을 지어 아들 수성을 훌륭히 키워냈다. 그 후 수성은 아들 일곱을 낳았고, 그 후손들은 한개마을을 크게 번성시켰다. 현재 그 자손이 무려 1만 7,000명이나 된다하니, 한개마을 입장에서 우봉이씨 할머니의 선택은 ‘위대한 선택’이 된 셈이다.

마을 입구 쪽 하늘에서 본 한개마을 풍경. 기와집과 초가집이공존하고 있다. <사진제공=한개마을보존회>

조선시대에는 남편이 죽을 경우, 부인의 개가를 허용했다. 만약 우봉이씨 할머니가 한개마을로 돌아오지 않고 개가를 했다면, 한개마을은 오늘의 영화(榮華)를 누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필자는 한개마을에서 살아가는 어머니와 며느리들이 자식을 훈육하고 키우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귀향 후에도 그분들의 모습은 마음 한편에 묵직한 돌멩이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성산이씨 일문에 시집와서 평생을 산,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리고 최고령 연극단(?)을 구성해 6개월 동안 열심히 연습했고, 1년에 걸쳐 할머니 11명의 생애를 영상에 담았다. 그 과정에서 2014년 <담소>라는 제목의 시·수필집을 펴내기도 했다. 그 중 필자의 어머니 이야기를 담은 글 ‘월추’를 소개한다.

5남매의 장녀로 태어났다 맏이는 그랬다.
17살, 남편 얼굴도 모른 채 시집 와
21살, 첫째를 낳고 넷째를 낳기까지
힘들어도 참고 아버지가 무서워 참고 참아야 하니 참고
나는 참고 살아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참아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참아내는 것이 사는 것이라고

시간이 지나고 누군가 물었다.
나를 생각해주지 않는 것이 서운하지 않냐고
나는 말했다 무어 서운하냐고
엄마는 그렇다고 원래 그런 거라고

삶의 시간들은 소리 없이 지나가버렸다.
참는 것을 참아왔기에 나는 말했다.
여전히 나의 인생은 참아내고 있다고


사도세자 향한 충절, 북비

한개마을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 중 하나는, 필자가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응와종택이다. 응와종택이 주목받는 이유는 종택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우측에 걸린 현판 ‘북비(北扉)’ 때문이다.

북비는 사도세자에 대한 충절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다. 필자의 8대조가 되는 돈재 이석문 선생은 영조 때 사도세자의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그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후 세손(훗날 정조)과의 만남을 돕는다. 사도세자와 세손을 만나지 못하게 한 어명에도 불구하고 “부자간의 만남은 하늘이 정한 천명이기에 결코 왕명으로 막을 수 없다.”고 말하며, 부자상봉을 하게 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영조는 돈재 선생에게 “뒤주 위에 큰 돌을 올려놓으라.”고 명한다. 하지만 돈재 선생은 “신은 죽어도 감히 이 어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며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영조는 돈재 선생에게 곤장 50대의 형벌을 내리고 관직을 삭탈했다.

돈재 선생은 고향으로 내려와 지금의 응와종택 터에 집을 짓고 사도세자를 기리며 지냈다. 후일 영조가 사도세자의 일을 후회하고 다시 불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를 회유하기 위해 사도세자를 배척해 죽음에 이르게 한 노론의 김상로(영의정)·홍계희(병조판서) 등이 찾아오자 남문을 뜯어 북쪽으로 사립문[北扉]을 낸 후, 집밖에 나가지 않았다.

사도세자를 향한 충정이 담긴 가옥인 응와종택 외부 모습. 종택 대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북쪽으로 사립문을 낸 북비(北扉)가 있다.

이후 응와종택에서는 3대에 걸쳐 문과 급제자가 배출됐다. 종택의 면모를 갖춘 시기는 돈재 선생의 손자(필자의 6대조)가 되는 이규진 선생이 안채와 사랑채를 짓고, 필자의 5대조인 응와 이원조 선생 대에 이르러서다. 필자가 오랜 기간 동안 마을보존회 사무국장과 보존회장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이런 역사를 지닌 ‘응와종택에서 태어난 마지막 후손’이란 자부심이 한 몫을 한 것 같다.

한주 이진상 선생과 아들 대계 이승희 선생(독립운동가)이살았던 한주정사.

옛 추억 깃든 한주정사

한주정사(寒洲精舍)는 한주 이진상 선생과 아들 대계 이승희 선생이 살았던 곳이다. 필자는 어린 시절, 한주정사에서 친구들과 자주 뛰어놀았다. 그래서인지 어른이 된 지금도 그 시절이 무척 그립다. 함께했던 친구들이 모두 마을을 떠났기에, 가끔 홀로 찾아가 옛 추억에 잠기곤 한다.

한주정사 대문채 안으로 들어서면 ‘주리세가(主理世家)’라는 현판을 볼 수 있다. 즉, ‘주리학을 대대로 공부하는 집’이란 의미다. 그곳을 지나 우측 작은 협문을 들어서면 큰 소나무와 함께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라고 적힌 현판이 보인다. ‘주자의 가르침을 법으로 하고,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을 배운다.’는 뜻이다. 우측에는 ‘呂’자 모양의 연지가 있는데, 하늘과 땅의 조화를 물이 휘감는 형상으로 만들었다.

나라를 빼앗기는 것을, 혼을 빼앗기는 것으로 여긴 이승희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을사5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투옥됐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다 1908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했다. 이후 밀사현 봉밀산에 황무지를 구입, 한흥동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여 독립군을 양성했다.

유교 마을에 깃든 佛緣

이렇듯 한개마을은 대대로 유학을 공부한 선비들의 정신이 강하게 남아있는 마을이다. 하지만, 불연(佛緣)도 깃들어 있다. 마을 뒷산인 영취산 중턱에는 작은 암자 규모의 감응사(感應寺)가 자리하고 있고, 마을 인근에는 고려시대 나옹선사가 창건한 선석사(禪石寺)가 있다. 예부터 감응사에서 소원을 빌면 아들을 낳을 수 있고, 시험에도 합격한다는 소문이 퍼져 마을 주민들은 물론 외지인도 자주 이곳을 찾아오곤 했다.

세종대왕자 태실 관리사찰인 선석사. 고려시대 나옹선사가 창건했다.

감응사는 신라 애장왕 3년(802) 보조국사 체징 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감응사에는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옥류정’이라는 샘이 있는데, 애장왕의 아들에 관한 전설이 전한다. 왕자가 앞을 보지 못한 채 태어났는데, 온갖 명약을 다 써 봐도 낫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애장왕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궁궐 마당에 독수리가 날아가 앉는 곳에 가면 약수가 있으니 씻고 마시면 눈이 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튿날 아침, 궁궐로 날아 온 독수리가 소리를 내자 애장왕은 말을 잘 타는 장수를 시켜 따라가 보게 했다. 독수리가 내려앉은 산 정상 부근 바위틈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본 장수는 애장왕에게 고했고, 애장왕은 왕자를 데려와 그 물을 마시게 하고 눈을 씻겼다. 그러자 왕자의 눈이 바로 나았다고 한다. 애장왕은 그곳에 사찰을 건립하고 ‘은혜에 보답하여 세운 절’이란 뜻에서 감응사로 지었다고 전한다.

광대바위, 일명 할매바위 전설

어릴 때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마을 입구에 있는 광대바위, 일명 할매바위의 전설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할매바위 전설의 핵심 줄거리는 ‘비가 오는 날이면 재주를 부리다 떨어져 죽은 광대귀신이 나온다.’는 내용이다. 이 전설이 뇌리에 깊이 박혀 있어 당시 광대바위 근처에 살던 필자는 집 앞을 지나다니는 게 무서웠다. 너무 두려웠던 나머지, 학교를 갈 때도 어머니 속을 꽤나 썩였다. 머리가 굵어진 뒤에야 이 전설이 아이들을 좀 놀려 보려는 어른들의 작은 장난이었음을 깨닫게 됐지만 말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재주를 부리다 떨어져 죽은 광대귀신이 나온다.’는 전설을 간직한 광대바위.일명 ‘할매바위’라고 부른다.

그런데 70년대 중반, 새마을운동으로 마을길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돌의 몸통을 땅에 묻고 위로 올라온 돌의 머리 일부를 훼손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때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 “이 돌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과 같은 돌이니, 깨뜨리지 말고 좀 불편하더라도 자동차가 피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묻자.”고 결정했다. 마을 어르신들의 결정이라,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필자는 광대바위에 대한 무서운 추억을 갖고 있었기에, 2014년 마을 지상물을 지하로 묻는 지중화사업을 하면서 ‘이 바위를 땅속에 영원히 묻어 버릴까.’하고 잠시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한개마을 사람 모두가 소중히 여기는 광대바위였기 때문에, 화단 입구에 옮겨 세우기로 정했다. 마을 어르신들께 말씀을 드렸더니 “우리도 할매바위에 대해 똑같이 듣고 보고 살아 왔다. 참으로 잘한 결정이다.”라며 지지해주셨다.

그 후 마을경관을 위해 바위의 위치를 바꾸고, 방향도 반대방향으로 돌려 세웠다. 만약 그 당시 할매바위를 땅에 묻어 버리거나 돈을 받고 팔아 버렸다면, 마을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추억 한 조각을 영원히 사라지게 하는 후회를 남겼을 것이다.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태봉 정상에는 세종대왕의 여러 왕자와 세손인 단종의 태를 안장한 세종대왕자 태실(胎室, 사적 제444호)이 있다.

100년 전 수해, 주민에 큰 아픔

한개마을 동쪽 길을 오르다보면 작은 골짜기 중간중간에 큰 바위들이 골짜기를 가로막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지금은 포토존, 혹은 쉬어가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 마을의 아픈 역사가 담겨 있는 바위들이다.

약 100년 전, 큰 홍수로 한개마을은 막대한 수해를 입었다. 당시 지금의 감응사 중턱에 많은 바위가 있었는데, 그곳 바위가 굴러와 동쪽마을을 덮쳐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필자가 어렸던 어느 여름날, 동쪽마을의 대부분 집들이 한날한시에 제사를 지내곤 했다. 철부지였던 터라 어른들의 아픔도 모른 채 ‘맛있는 제사음식을 이집 저집에서 얻어먹을 수 있다.’며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손들 중 상당수는 아픈 기억을 잊기 위해 고향을 등졌다. 가끔 종중 행사에 얼굴을 보이지만 아무도 그 아픈 기억을 입에 담으려 하지는 않는다.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에서 주인공 김탁구의 어린시절 장면을 촬영한 집으로 한개마을 안에 있다.

기쁜 일이건, 슬픈 일이건 세월이 지나고 나면 모두 마을의 역사다. 한개마을 주민들은 선조들의 정신을 보다 잘 계승하려는 마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다음 세대를 가르치고 있다. 마을에서 ‘제빵왕 김탁구’의 어린 시절 장면을 촬영했지만, 표식을 세우거나 홍보를 하지는 않는다. 한개마을 사람들은 마을을 ‘상업화 되지 않은 사람이 사는 마을’로 지켜나가기 위해 시대 흐름에 맞게 조금씩 작은 변화를 일으키며 살아가고 있다.

이수인

한개마을보존회장. 현재 지방분권운동 대구경북본부 홍보위원장과 성주대표를 맡고 있
다. (주)코냉환경 대표를 역임한 바 있다.

글 · 이수인 사진 · 이강식 기자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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