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호

외가가 있던 동네의 한 부자는 논을 50두락(斗落, 마지기) 지으면서 포수 한 사람을 부렸다. 그 포수는 천관산에 가서 꿩이나 노루를 잡아오곤 했고, 부잣집에서는 노루나 꿩이나 멧돼지 고기를 상식(常食)한다고 했다. 어느 날 먼 일가 당숙이 놀러 와서 사랑방에서 그 부자 이야기를 했는데, 할아버지는 말없이 듣고만 있다가 이야기 하나를 해주었다.

<삽화=전병준>

나막신 깎아 파는 부부

착하게 나막신만 깎아 팔아서 먹고 사는 부부가 산기슭 움막에서 살고 있었다. 남편은 대대로 물려온 나막신 깎아 만드는 업을 물려받은 장인이었고, 아내는 산나물을 뜯고 송이버섯을 캐오곤 했다.

남편은 농사도 장사도 모르고 오로지 나막신 깎을 줄밖엔 몰랐다. 아내는 그가 깎아놓은 나막신을 장에 가서 팔아 곡식을 들여오곤 했다. 그런데 착한 그들에게 아기가 생기지 않았다. 안타까워하며 살던 어느 날 기이한 일 하나가 일어났다. 아내 나이 서른아홉 살, 남편 나이 마흔 살 때였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노루 한 마리가 집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나막신 깎는 남자가 작업하는 공방으로 숨어들었다. 오래지 않아 사립에 발자국 소리가 났다. 노루를 쫓아온 포수였다.

남자는 아기노루를 나막신 깎으려고 쌓아둔 나무더미 속에 숨겨주었다. 아기노루는 다리 하나를 절뚝거렸다. 포수가 헛간 문을 열고 남자에게 혹시 노루 한 마리가 들어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남자는 시치미를 떼고 도리질을 했다.

포수가 돌아간 다음, 부엌에 있던 아내가 공방으로 들어와서 포수와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물었다. 남자는 나무더미 속에 숨은 노루를 가리키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고 말했다. 그의 아내는 깜짝 반가워하며 “이 무슨 횡재요!”하며 그 노루를 잡아 몸보신을 하자고 했다.

남자는 집으로 숨어든 산짐승은 해치지 않고 돌려보내야 한다고 했지만, 아내는 굴러든 복을 차내선 안 된다고 기어이 잡아먹자고 나섰다.

남자는 하릴 없이 아내의 말대로 했다. 짐승을 잡을 마땅한 도구가 없으므로 그는 나막신 깎는 날 예리한 자구와 칼을 이용하여 도살을 했다.

그들 부부는 노루고기를 하루 세끼 먹고, 남은 것을 다시 이틀 동안을 더 먹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뼈를 고아 장복을 했다. 오랜만에 고기를 먹은 부부는 며칠 동안 진한 사랑을 나누었다. 그 결과 아내의 몸에 태기가 있었다. 그들은 무지개 피어오른 구름을 타고 떠도는 듯 꿈같은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몇 달 뒤 아내가 몸을 풀었는데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살색이 하얀 아들은 잘 자랐고, 세 살 되는 해 봄부터 아버지의 공방에 들어가 놀았다. 아버지가 잠시 낮잠을 자면 혼자서 나막신 깎는 자구와 칼을 가지고 아버지처럼 나막신 깎는 놀이를 했다. 부부는 아들 하는 짓을 오달져하며 종일토록 깔깔거렸다.

어느 날 아내가 나막신을 팔러 장에 갔다가 돌아오니 남편이 반듯하게 누운 채 목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나막신 깎는 자구의 날이 목줄에 박혀 있었다. 아기마저 아버지의 시체 옆에 누워 있었는데, 홍역을 앓기라도 하는 듯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고, 혼수상태였다. 그날 해를 넘기지 못하고 아기는 숨을 거두었다.

아내는 인근 마을에서 사람들을 불러다가 남편과 아기의 장례를 동시에 치렀다. 장례를 치른 뒤 아내는 미쳐 날뛰다가 나란히 만든 두 무덤 앞에 엎드려 땅을 치며 슬퍼했고, 그러다가 지쳐 혼수(昏睡)에 들곤 했다. 그날 밤 꿈인 듯 꿈 아닌 듯 한 잠결에, 노루 귀신 둘이 주고받는 말이 들려왔다.

“지금 네 무덤 앞에 엎드려 자고 있는 그 여편네가 사실은 더 악독한 여자야. 나막신 깎는 자구를 가지고 와서 그 여자도 목을 잘라 죽여주어라.”

꿈에서 깨어난 여자는 혼겁을 한 채 산골짜기를 달려 내려가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가 깨어난 것은 한 암자였다. 절벽 아래를 지나가던 스님이 그녀를 업고 와서 간호를 하여 살아나게 한 것이다.

스님은 그녀에게서 모든 사연을 듣고 참회의 기도를 하고, 억울하고 분하게 죽은 혼령들을 천도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한 겨울에도 개울에서 멱을 감고 정성을 다해 기도를 했다.

눈이 정강이까지 차게 내리던 어느 날, 새끼 노루 한 마리가 암자 마당으로 걸어왔는데, 그녀는 그 노루를 보듬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젖무덤이 크게 부풀어 오르더니 젖꼭지에서 젖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울면서 그 새끼 노루에게 젖을 먹여 키웠다.

할아버지는 말했다.

“그렇게 참회하고 새 삶을 산 그 여자는 나중에 늙어서 관세음보살이 되었단다. 참회란 무엇이냐 하면 깜깜한 방에 촛불을 밝히는 것하고 같단다.”

동무 기주와 산돌 키우기

이웃집 기주와 나는 땔나무를 하러 갔다. 우리는 언제든지 갈림길에 이르러서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할 것인지 점을 쳤다. 점을 치는 방법은 왼손바닥에 침을 뱉은 다음 그것을 오른손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내리치는 것이었다. 침방울이 많이 튀어가는 쪽으로 가려는 것이었다. 그날 침이 선택해준 곳은 큰재였다.

밭 한 뙤기도 없는 기주의 형은 큰재의 정 씨 문중 산기슭 땅 일부를 산지기 노릇을 해준 대신에 개간했다. 아침 일찍이 산에 가면 해가 질 때까지 괭이와 삽과 톱으로 나무를 쳐내고 뿌리를 파내고 돌을 파다가 밭둑을 만들었다.

산에서 땔나무를 해 가지고 오는 기주와 나에게 그의 형이 산돌 하나씩을 주었다.

산돌이란 자라나는 돌을 말하는 것이었다. 내 돌은 주먹만큼 했고, 기주의 돌은 목침만큼 했다. 돌의 한쪽 모서리가 개의 이빨처럼 우삣쭈삣 들솟아 있었다. 그 이빨 모양새의 산돌은 자주색의 석영인데 이빨처럼 생긴 끝부분이 약간 하얗고, 투명하고 얼핏 무지갯빛이 감돌았다. 보는 방향에 따라서 색깔이 달리 보였다. 어찌 보면 진한 보라색으로 보이고, 다시 어찌 보면 연한 보라색으로 보이고, 또 남색으로도 보였다.

그의 형은 “이 이빨 같은 부분이 자란단다.” 하고 나서, 그 돌을 키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담 옆의 그늘진 땅 속에 묻어놓고 쌀이나 보리 씻은 뽀얀 뜬 물을 날마다 한 번씩 부어주는데, 그때부터는 햇빛이 드는 때에 파보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산돌을 키우는 사람은 절대로 나쁜 짓을 해도 안 되고, 거짓말을 해도 안 된다. 가령 놀부가 심술을 부리듯이 남의 못자리 논에 돌을 던진다거나, 남의 감을 따먹는다거나, 남의 수수모가지를 자른다거나, 남을 때린다거나, 뱀이나 개구리를 때려죽인다거나 해서는 안 된다. 되레 남에게 적선을 해야 돼. 거지나 문둥이가 밥을 얻으러 오면 후하게 곡식을 퍼주기도 하고, 친구한테는 먹을 것도 주고, 책도 나누어 보고, 공부를 가르쳐주기도 하고, 싸우지도 말고, 한사코 양보를 하고 선하게 살아야 그 돌이 쑥쑥 잘 큰단다.”

그 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발이 땅에 디디지 않는 듯싶었다. 허공을 걷는 듯싶었다. 내 머리 속에는 내가 키우는 산돌의 석영이 죽죽 자라서 담 위로 진보라색의 유리 기둥으로 솟아 오른 모습이 상상되었다.

나는 마당 가장자리에 그 돌을 묻고, 당장에 밥을 짓는 누님에게 부탁하여 쌀 씻은 물을 한 바가지나 가져다가 부어주었다. 이튿날 아침과 저녁에 두 차례나 쌀뜨물을 축축하게 부어주었다. 잠을 자면서 그 산돌만 생각했다.

아랫집 동무 기주의 것보다는 내 산돌이 훨씬 빨리 자라리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집은 가난해서 보리뜨물만 줄 것이고, 우리 집은 부자여서 쌀뜨물을 줄 수 있으니까.

그로부터 나흘 뒤에 아랫집 기주가 학교에 가면서 자기 오른손 한 마디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돌은 벌써 이만큼 자랐는디, 니 돌은 얼마나 컸냐?”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직 그 돌이 자랐는지 안 자랐는지 확인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햇빛이 드는 때에 파보면 절대로 안 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는 아직 안 파봤다.”

그날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흙을 걷어내지는 않고 살그머니 손가락을 밀어 넣어 산돌의 앙상한 이빨 같은 표면을 더듬어 보았다. 조금 자란 듯싶기도 하고 전혀 자라지 않은 듯싶기도 했다. 이상했다. 당연히 쌀뜨물을 받아먹은 나의 산돌이 더 많이 자랐어야 마땅한 일인 것인데?

<삽화=전병준>

그때부터 나는 나를 의심했다. 내 행실에 문제가 있어서 돌이 자라주지 않는 것일까? 내가 언제 심술을 부렸을까? 거짓말을 했을까? 거지한테 함부로 했을까? 못자리에 돌을 던지지도 않고, 개구리도 잡지 않았는데……. 계속 삼가왔는데 왜 내 돌은 자라지 않을까?

이후 나는 더욱 삼가면서 부지런히 밥 짓는 누님에게서 쌀뜨물을 얻어다가 산돌 묻은 자리에 잘금잘금 부어주었다. 그리고 참을성 있게 파보지 않고 손가락을 밀어 넣어 만져보지도 않았다.

그런 지 며칠 뒤에 아랫집 동무 기주가 또 말했다.

‘내 돌은’ 하고 나서 가리키는 손가락을 내 앞에 내보이며 “이만큼 자랐는데 니 돌은 얼마나 컸냐?” 하고 말했다. 나는 또 아차 했다. 확인해보지 못한 것이다. 나는 주눅 들린 듯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내 돌은 쬐끔 밖에는 안 자랐어.”

학교에서 돌아와 흙 속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보니 전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슬퍼 견딜 수 없었다. 그 동무의 돌은 손가락만치 자랐는데, 왜 내 돌은 조금도 자라지 않고 있을까? 그렇지만 나는 절망하지 않고, 부지런히 뜨물을 받아다가 부어주곤 했다. 내 돌은 성장이 더딜 뿐, 자라기 시작하면 죽순처럼 쑥쑥 자랄 것이다. 아랫집 동무의 그것보다 훨씬 크게 자랄 것이란 걸 확신하면서.

이러구러 두 달이 지나갔다. 어느 날 내가 나의 돌이 전혀 자라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 그에게 물었다. 그는 이번에는 허공에 한 뼘을 재보이며 “이만큼 자랐어.”하고 말했다. 나는 그 동무의 크게 자랐다는 산돌이 보고 싶어 환장할 것 같아 한번 보러가자고 졸랐다. 그런데 그 동무는 펄쩍 뛰며 거부했다.

“절대로 안 돼. 나는 그것을 캄캄한 데다 숨겨놨어.”

나는 속절없이 내 집으로 가서 자라지 않은 내 돌을 더듬어보며 슬퍼했다. 산돌이라는 것은 운명적으로 지독하게 가난한 집에서만 자라주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꾸준히 쌀뜨물을 부어주었다.

그러다가 9살 10살 무렵의 아이들은 누구든지 산돌을 키우다가 실패를 맛본다는 사실, 아랫집의 그 동무도 사실은 나에게 엉뚱한 상상력으로 거짓말을 하곤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팔십 노인인 나는 지금 내 토굴 앞마당에 또 하나의 산돌 하나를 묻어놓고 날마다 물을 주며 키운다. 이 글을 읽은 당신, 그 산돌이란 무엇일까? 당신도 그런 산돌을 키운 적이 있는가?

한승원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68년 대한
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목선〉이 당선되며 활동을 시작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소설 원효〉, 〈초의〉, 〈다산〉 등 다수의 소설을 쓴 이 시대의 대표 소설가다. 고향 율산마을에서 바다를 시원(始原)으로 한 작품을 써오고 있다. 현대문학상 · 한국문학작가상 · 이상문학상 · 대한민국문학상 · 한국소설문학상 · 한국해양문학상 · 한국불교문학상 · 미국 기리야마 환태평양 도서상 · 김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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