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심성과 수행 집중
과감하게 탈피하고
참 종교 모습 회복해야

교수 재직시절 학생들과 함께 연구실에서 불교 경전을 읽는 모임을 지속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마침 유마거사의 방에 있던 천녀(天女)와 사리불의 문답이 나오는 대목이었다. 천녀의 신통과 변설이 자재한 것을 본 사리불이 “당신은 어찌하여 아직 여인의 몸을 지니고 있는가?”하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천녀는 “내가 유마거사의 방에 오랫 동안 있으면서 나에게서 ‘여성성’을 찾아도 찾지 못하였는데 당신은 그것을 보십니까?”하고 묻는다. 그리곤 신통으로 사리불의 몸을 여자의 몸으로 바꾸고는 “스님은 왜 여인의 몸을 하고 있습니까?”하고 묻는다. 그 뒤의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다. 가짜 몸, 잠시 인연 따라 그런 몸을 지니고 있는 것인데 그 몸의 모습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공부에 참여하고 있던 한 여학생이 물었다. “선생님, 이 경전이 이룩된 것이 몇 년 전쯤 되나요?” 아무리 낮추 잡아도 천 년 이전이지 않겠느냐는 나의 대답에 여학생은, “그렇다면 이것은 양성 평등의 문제에 있어서 ‘핵폭탄’급의 이야기입니다. 그 오래 전에 이렇게도 앞서 나간 관점이 제시되다니요!”하며 경악에 가까운 느낌을 피력하였다. 그에 대하여 나는 한마디로 일축하였다. “핵폭탄 급이면 뭐하니? 불발탄이 되었는데!”

웃음 뒤에 정말 씁쓸함이 밀려오는 기억이다. 기나긴 불교 역사 속에 우리 불자들은 정말 부처님이 남겨주신 귀중한 자산들을 앞의 이야기처럼 불발탄으로 만들어오고 있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이 있다. 앞의 이야기를 이어 말한다면 불교는 남녀의 성 평등을 지향하는 역사에 과연 어떤 기여를 해 왔던가? 아니 불교는 오히려 남녀의 성 평등을 부정하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던가? 오늘의 현실에서는 어떤 방향성을 지시하고 있는가? 이런 물음들을 던지고 나면 부끄러움과 씁쓸함이 몇 배로 늘어나는 느낌이다.

단지 그런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어느 종교보다도 생명 존중의 사상이 투철하며, 오계(五戒)의 핵심은 생명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불교가 생명 운동, 생태 운동 등에는 얼마나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가? 극단을 배제하는 중도 사상, 양극단의 갈등을 치유하는데 가장 적합한 원효 스님의 화쟁사상 등을 통해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인 양극화의 극복에 불교는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가? 이런 물음들에 대하여도 불교가 자랑스럽게 긍정적인 답을 내놓기는 힘들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위대하다!” “불교야말로 가장 뛰어난 종교다!”라고 외쳐봐야 그것은 정말 공허할 뿐이다. 어떤 점에서 위대한지, 어떤 점에서 뛰어난지 그것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를 바꾸고 현실을 이끌어나가는 힘 있는 가르침으로 서게 하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불자의 삶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불발탄을 만들어가는 부끄러운 불자의 모습이 있게 된다.

오늘 여기의, 나와 우리들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참 종교의 모습을 회복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담겨있는 보배로운 진리성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 눈을 뜨면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역사의 방향을 바꿀 핵폭탄 급의 진리들이 수없이 발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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