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보나벤트라가 태어나고 활동한 성지인 바뇨레지오.

타인을 통해 좀더
‘나’를 잘 볼 수 있듯이
이웃종교를 통해 불교를
더 깊이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종교의 차이로 테러와 전쟁과 학살이 끊이지 않는 이 시대에 종교 간 대화와 평화는 21세기 지구촌이 지향할 최고의 가치다. 최근 동  ·  서양 여러 종교의 수행(성직)자  ·  학자와 신도 20여 명이 이탈리아의 유서 깊은 수도원을 순례하면서 깨달음과 영성에 대한 종교 간의 대화를 나누었다. 긴 여정을 함께한 이도흠 한양대 교수가 기독교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홀로 묵상하며 깨달은 것들, 이들과 대화한 요지를 본지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보내왔다.

| 끊임없는 반복에 차이를

우주 삼라만상은 나서 머물고 변하고 마침내 사라진다.[生住異滅] 138억 년 전에 플랑크 스케일이라는 아주 작은 공간(10⁻³⁵m)에서 플랑크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10⁻⁴³초)에 ‘양자요동’에 의해 대폭발(빅뱅)을 한 후 물질이 만들어졌고, 그것이 모여 태초의 별을 만든 이래 무수한 별들이 나고 변하고 사라짐을 되풀이하고 있다. 태양도, 지구도, 그곳에 사는 생명들도 마찬가지다. 38억 년 전 최초의 생명이 탄생한 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나고 변하고 사라졌다. 한 나라의 역사도, 한 종족의 서사도, 지금 여기 대한민국 사회와 인간의 삶, 시민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이 영원한 반복 속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바로 무한한 반복에 ‘차이’를 아로새기는 것이다. 고학력의 똑똑한 젊은이도 군대만 가면 ‘군바리’가 된다. 1년 365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과와 훈련이 그들을 단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매일 되풀이 되는 반복에 저항하여 연병장 주위에 핀 꽃을 바라보며 시를 짓고, 피곤한 후임병을 대신해 보초를 서는 것과 같은 행위가 바로 ‘차이’다.

왜 백인 아이는 때리지 못하는 신부가 마야족이나 잉카족의 어린이는 별다른 죄책감 없이 죽였는가? 왜 상대방이 팔다리를 자를지라도 화를 내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마저 미얀마에서, 스리랑카에서 학살에 가담하는가? 인간은 끊임없이 ‘종교  ·  민족  ·  이데올로기  ·  이해관계  ·  편견’ 등으로 동일성을 구성한다. 이에서 그치지 않고 ‘이교도  ·  이민족  ·  좌파  ·  여성  ·  노인  ·  장애인’ 등을 ‘타자’로 상정하고, 이들을 배제하고 폭력을 가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하는 속성을 갖는다. 반면, 독일인이면서 많은 유태인을 구출한 오스카 쉰들러의 사례처럼 차이는 공감과 사랑, 자비를 바탕으로 동일성의 이데올로기와 개념을 깨는 실천이다.

팔만대장경에 가득한 진리 가운데 붓다께서 하신 마지막 가르침은 무엇인가? 흔히 ‘자등명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 하는데, 이 말씀은 정확히 마지막에서 세 번째 가르침이다. 붓다께서는 열반에 들기 직전에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게으르지 말라. 나는 게으르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올바른 깨달음을 이루었다. …… 온갖 물질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가르침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깨달음과 열반에 이를 때까지 열심히 수행하면서 진리를 구하고 보살행을 행하라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無常]는 점이다.

그럼, 게으르지 말라는 것과 무상(無常)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필자는 ‘우주에서 인간사에 이르기까지 무한하게 반복을 되풀이하니, 그 무상한 반복에 맞서서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차이를 만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필자는 권태로운 반복에 차이를 만들고자 순례를 떠났다.

| 거룩함과 무한을 향한 초월

성 프란체스코는 서양에서 그리스도를 제외하면 최고의 성인으로 꼽힌다. 라 베르나 수도원은 프란체스코성인이 절벽에서 수행을 하다가 오상(五傷, 예수가 수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입은 양쪽 팔과 다리, 가슴의 상처)을 받은 성지다.

2008년 연구년을 맞아 지리산의 한 암자에 머물렀다. 처음에는 조계종 포교원에서 의뢰받은 법요집의 한글 번역과 한 불교 언론으로부터 청탁받은 불교 미학에 관한 연재물의 집필 외에는 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암자생활이 너무 무료할까싶어 다른 분야의 책도 몇 권 가지고 갔는데, 그 중 하나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였다. 순전히 제목에 대한 반발 때문에 챙겼다.

책에서 도킨스는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가 조종하는 생존기계이며, 이기적 유전자의 목적은 유전자 안에 자기 유전자의 수를 늘리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명을 먹이 삼아 에너지를 생산해 생존하고, 자신의 유전자를 더 많이 자기복제하려고 한다. 봄이 되면 수컷들이 서로 싸우고, 이긴 수컷이 모든 암컷을 독차지하는 것을 다양한 동물집단에서 관찰할 수 있다. 유전자가 침팬지와 98.6% 일치하는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 또한 자신과 자식을 위해 사냥하고 농사짓고 그것으로 부족하면 타인을 약탈했다. 어미의 희생처럼, 이타적 행위도 실은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지닌 개체수를 늘리려는 이기적 목적의 발현이자 진화를 위한 선택이었다.

충격적이었다. 책을 읽기 전까지 필자는 붓다  ·  맹자  ·  순자 등의 성선설이나 성악설의 테두리에 있었다. 도킨스가 옳다면, 인간의 선함과 이타성에 바탕을 둔 진보적 주장이나 불교의 인간관은 당위적일 뿐 타당성을 잃게 된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이 본디 이기적이고 경쟁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강하게 부정하고 싶지만, 이 책의 내용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보편적 특성을 예리하게 통찰한 ‘과학’이었다. 자연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주장들은 성현들의 말씀일지라도 참으로 공허한 것이며, ‘은유의 유희’에 불과하다는 점을 절감했다.

이후 필자는 공부 방법을 180도 전환했다. 어떤 착상이 떠오르면 관련 자연과학서적부터 뒤적였다. 그 후 도킨스를 비판하고 극복하는 ‘자연과학’에 매진하였다. 사회생물학과 후성유전학 연구자들의 주장을 종합하면, 모든 생명체는 다른 유기체와 상호 작용해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생성을 돕는 존재로 진화해왔다. 생명체는 개체적으로는 이기적이지만, 전체 생태계 속에서는 다른 생명체와 공존하지 못하는 생명체가 멸종하였다.

인간 또한 선과 악이 공존하는 유전적 키메라다. 인간은 700만 년 동안 침팬지와 분명히 구분되는 길을 걸었고, 이 진화의 자취는 침팬지와 다른 1.4%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다. 사회생물학과 인류학  ·  인지과학 등을 종합하면, 인간은 이런 이기적 본능을 유보하고 ‘사회적 협력’을 하며 이타성을 추구했다. 한 달에 세 마리의 사슴을 잡던 인간이 10명씩 짝을 지어 사냥해 40마리를 잡았다면 이는 이기적인 본능에도 부합한다. 생명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연구를 빌리면, 인간은 사회를 형성하면서 여러 이타성을 확대했다. 인간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처럼 자기 핏줄에게 발휘하는 혈연 이타성, 손님을 환대하는 문화에서 잘 나타나듯 상대방이 나를 환대하고 베푸니, 나 또한 그와 그의 가족에게 그렇게 하는 호혜적 이타성, 독립투사처럼 집단의 구성원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집단 이타성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지하철역에서 술에 취한 일본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몸을 던진 고 김수현 씨처럼 전혀 유전자가 섞이지 않는 이에게 베푸는 윤리적 이타성 또한 추구했다.

협력을 잘하는 사람이 진화에도 유리하기에, 인간의 두뇌신경세포에 타인을 모방하거나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거울신경체제가 형성되도록 진화하였다. 우리가 길거리를 걷다가 어떤 사람이 차에 깔리는 사고를 목격하게 되면, 그의 아픔에 공감해 마음이 같이 아플 것이고, 그 중 실천력이 강한 자는 달려가서 차를 들어 올릴 것이다. 세 종교의 최고 가르침, 곧 붓다의 자비와 예수의 사랑, 공자의 인(仁)은 모두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된다.

도킨스의 한계는 생명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분리시켜서 바라보았다는 점과 인간을 생물학적 존재로만 한정하여 인식했다는 점이다.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고, 의미론적 존재이자 윤리적 존재이다. 또 미적 존재이고, 초월적 존재다.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가 조종하는 생존기계로서 자신, 자신과 유전자가 닮은 이의 번식을 위해 욕망하고 타인을 약탈하는 알고리즘으로 이루어진 유기체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를 형성하고 타인과 소통하고 협력하며 집단과 문명의 발전을 도모한 사회적 존재다. 또 자기 앞에 무한히 열린 세계를 향해 자신을 끊임없이 던지고 대응하면서 그 의미를 해석한다. 자신의 이익은 물론 번식욕을 비롯한 욕망, 심지어 목숨마저 포기하고 신  ·  진리  ·  선  ·  정의 등 더 나은 의미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의미론적 존재다.

인간은 죽음  ·  미래  ·  자연  ·  타인에 대한 불안과 공포와 소외 속에서 자신과 유한성을 성찰하고 실존하며 자신의 본성을 창조하는 존재다. 인간은 타인을 발견하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며 이타성과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타인 및 자연  ·  우주와 연기적 관계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생성하는 상호생성자로서 윤리적 존재다. 또한 더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고 향유하려는 미적 존재다. 불완전에서 완전, 비속함에서 거룩함, 유한에서 무한을 향해 자신이 맞은 현실을 감내하면서 넘어서려는 초월적 존재다. 나는 지금 이 세속의 반복에서 일탈하여 거룩하고 무한한 세계로 초월하고 싶다.

| 대대(待對)의 ‘포월’로

아침 햇빛에 물들기 시작하는 선도산 마애삼존불상. 본존불은 아미타여래이고, 왼편의 협시보살은 관음보살, 오른편은 대세지보살이다. 본존불만 땅에 발을 디디고 있다.

신라 건국의 성소인 선도산에 가면 마애삼존불을 만날 수 있다. 협시보살인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다른 곳에 있던 화강암에 새겨 가져왔지만, 굳이 가운데 아미타불은 그 산에 돌출해 있던 바위에 새겼다. 그런데 그 돌은 정을 갖다 대기만하면 부서지는 안산암이다. 그 때문에 현재 부처의 얼굴은 입 언저리만 남았고 몸도 성하지 않다. 신라인은 왜 이런 무모한 일을 행했을까? 그들은 이상에 현실을 결합하는 사상과 미학을 추구했다. 정토왕생을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나쁜 일을 없애고 복을 받기를 염원하였다. 현실을 그대로 거울처럼 재현한 ‘반영상’과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무지개로 반짝이듯 이상을 통해 현실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형상화한 ‘굴절상’이 조화를 이룬 향가를 불렀다. 그러니, 극락왕생을 지향하는 아미타불은 땅의 현실에 굳게 발을 디디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포복하는 초월인 ‘포월(匍越)’이다. 이는 김진석 인하대 교수가 제안한 것으로 그 뜻은 “바로 초월하거나 해탈하려는 유혹을 떨치고 현실의 바닥에 배를 깔고 치열하게 포복하면서 그 과정에서 그 혼돈을 넘어서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한국 불교가 암자 불교에 머물고 만 것은 포월을 거부한 채 초월만 추구한 까닭이다. 불교의 두 축이 지혜와 자비인데, 한국 불교는 자비를 등한시했다. 민주화 투쟁은 물론 그 후의 민중운동이나 노동운동에서 숱한 신부님과 목사님들의 틈바구니에서 스님을 만나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세친 보살은 <불성론>에서 “지혜로 말미암아 나에 대한 애착은 버리고, 큰 자비로 말미암아 타인에 대한 사랑은 일어나게 한다.”라고 말했다. 지혜가 있기에 모든 집착과 삼독(三毒)의 원인인 나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만, 고통 받는 중생에 대한 자비로 말미암아 중생에 대한 사랑은 늘 솟아나게 해야 한다. <유마경>에서는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다.”고 하지 않았던가.

초월은 포기를 전제로 하기에, 포기하며 초월하는 포월(抛越) 없이 초월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이익과 향락, 욕망  ·  분노  ·  어리석음은 물론 자기와 관련된 모든 생각을 버려야만 청정한 세계에 이를 수 있다. ‘연기(緣起)’와 ‘연멸(緣滅)’은 하나다. 조건과 원인을 달리 하면 결과 또한 변한다. 말 그대로 “이것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짐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사라진다.” 어리석음이 집착을 낳고 집착이 고통을 낳으니,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면 집착이 사라지고 집착이 사라지면 고통 또한 사라진다. 그러니 고통과 이를 낳은 현실과 조건, 인과관계에 대하여 자각을 하고 깊은 통찰을 하여 이를 없애는 수행을 행하면, 괴로움은 사라지고 깨달음에 이른다.

불자의 목적은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이며, 열반은 나와 타인이 동시에 이루어야 하기에, 아우르며 초월하는 포월(包越)이 진정한 초월에 이르는 길이다. 이를 위해서는 대대(待對)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 ‘대대’란 대립적인 것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 낮인가? 밤인가? 서양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모든 것을 이데아와 그림자, 진리와 허위 등 이분법으로 나누고 “이데아인 동시에 그림자, 진리인 동시에 허위”는 모순이라며 배제하였다. 이를 ‘A or-not-A의 이분법적 모순율’이라 하며, 이는 이후 거의 모든 서양 철학과 논리의 바탕을 형성하였다. 동양인인 우리도 서양의 영향으로 ‘환하면 낮, 어두우면 밤’이라고 한다.

하지만, 낮 12시 1분이라도 1분만큼 밤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0.00001초도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극점만이 낮이며, 실제 우리가 겪는 하루의 시간은 낮인 동시에 밤이다. 우리 민족은 뜨거운 것을 먹으면서 “시원하다”라고 말하고 삶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죽인다”라고 말한다. ‘뜨거운 시원함’이 최고의 맛이고, ‘죽이는 삶’이 지극한 삶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대는 A or-not-A의 이분법이 아니라 A-and-not-A의 ‘퍼지(fuzzy)’로 사고하는 것이다. 태극의 파란 부분 안에 빨간 원이 있고, 빨간 부분 안에 파란 원이 있는 것과 같다. 팔을 펴는 것이 양이고 구부리는 것이 음이라면, 펼 때 구부리려는 성질이나 마음이 작용하고 구부릴 때도 마찬가지로 작용하기에 팔을 펴고 구부릴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포월은 대립되는 것이나 적을 귀한 손님처럼 모시는 것이다. 서로 공통점을 발견하고는 친해지고 차이를 통해 깊이를 더하면서 각자 자신의 개별성을 유지하면서도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다. 이런 포월의 자세로 여러 종교의 학자와 성직자  ·  수행자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었다.

‘나무’는 ‘풀’과 관계 속에서 ‘목질의 줄기를 가진 여러해살이의 식물’의 의미를 갖는다. 내 등은 타자에게만 보인다. 동양은 서양이라는 타자를 경험하고서야 근대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불교 또한 기독교와의 관계 속에서 참다운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우물 안 개구리의 사고에서 벗어나 기독교라는 타자를 통해 불교를 다른 차원에서 더 깊이 인식하고 싶었다. 불교와 기독교의 공통점을 발견하여 서로 친해지고도 싶었고, 차이를 통하여 더 심오한 단계로 도약하고도 싶었고, 서로 융합되는 것을 찾아 하나가 되고도 싶었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현재 지순협 대안대학 이사장,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 한국언어문화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  ·  한국기호학회 회장  ·  〈불교평론〉 편집위원장  ·  한국학연구소장  ·  〈문학과 경계〉 주간을 역임했다. 원효학술상  ·  유심학술상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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