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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물리학3. 사물의 이중성
〈삽화=전병준〉

선승(禪僧)들은 ‘이것이다.’라고 해도 틀렸다고 하고, ‘이것이 아니다.’라고 해도 틀렸다고 한다. 어떻게 말해도 틀렸다고 하는, 모든 논리의 부정이 바로 선가의 ‘사구백비(四句百非)’다. ‘사구(四句)’는 하나의 개념 혹은 대립되는 개념을 기준으로 현상을 판별하는 4가지 논리형식으로 ‘~이다’(긍정), ‘~이 아니다’(부정), ‘~이기도 하고, ~이 아니기도 하다’(긍정종합), ‘~인 것도 아니지만, ~이 아닌 것도 아니다’(부정종합)라는 네 가지 형식이 있다. 있고 없음[有無]의 경우라면, ‘있다’[有], ‘없다’[無],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亦有亦無],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非有非無]라는 네 가지가 될 것이다. 사구백비(四句百非)란 다시 사구의 조합으로 100가지 논리형식을 만든 뒤, 이 100가지 논리형식을 모두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긍정 아니면 부정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 선승들은 논리형식을 왜 이렇게 복잡하고 번거롭게 취했을까? 그것은 선승들이 이 세상 사물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양자 현상을 통해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 양자 현상

옆의 그림과 같이 나무의 양쪽을 동시에 지나가는 스키어(skier)는 세상에 없다. 하지만 양자역학이 기술하는 미시세계에서는 그림과 같은 일이 오히려 일상적인 일이다. 그림의 스키어에게 물리학자들은 ‘양자 - 스키어(Quantum Skier)’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양자 - 스키어는 실제 소립자의 행동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 양자 - 스키어의 경로를 설명할 때, 왼쪽 아니면 오른쪽이라는 이분법적 사유에 맞는 표현만으로는 그 경로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왼쪽으로 왔지만 오른쪽으로도 왔다.”고 긍정종합으로 표현하여도 어딘가 이상한 데가 있다. 스키어[소립자]가 둘로 나누어져서 반쪽씩 왼쪽과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관찰해보면 스키어는 반드시 온전한 하나로 존재하지, 결코 둘로 나누어지는 법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왼쪽[오른쪽]으로 온 것도 아니지만, 왼쪽[오른쪽]으로 오지 않은 것도 아니다.” 라고 부정종합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위의 그림이 말해주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선승들은 일체 사물의 참모습이 위의 양자 스키어처럼 미묘하다는 것을 가리켜 ‘사구백비’라고 한 것인데, 이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위의 양자 스키어처럼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든 현상을 우리는 자연에서 실제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입자 - 파동의 이중성(二重性, Duality)’이다. 이중성이란 하나의 사물이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성질을 함께 가질 때 쓰는 말이다.

| 입자-파동의 이중성

사람의 사물인식 방식은 사물을 두 가지로 나누어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주(主) - 객(客)’, ‘음(陰) - 양(陽)’, ‘유(有) - 무(無)’, ‘선(善) - 악(惡)’ 등 사물을 이분법적으로 ‘이것’과 ‘이것 아닌 것’으로 나누어본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인간의 사유법칙[논리의 법칙]이 이분법적 사고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20세기 초까지 물리학자들은 파동임이 확실한 빛(Photon)이 입자의 성질을 가질리 없고, 입자임이 확실한 전자(電子, Electron)가 파동의 성질을 가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입자와 파동은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옆의 그림과 같이 벽면에 두 개의 슬릿(Slit, 가늘고 길게 찢어진 구멍)을 뚫고 빛을 통과시키면 이 이중 슬릿(double slit)을 통과한 빛은 반대편 벽면의 스크린에 밝고 어두움이 교차하는 띠를 만든다. 이 띠를 간섭무늬라고 하는데 입자는 결코 이런 띠를 만들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1923년 미국의 물리학자 컴프턴(A. H. Compton, 1892~1962)은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을 쳐서 튕겨내듯이 ‘빛’이 다른 입자를 쳐서 튕겨내고 ‘빛’ 자신도 튕겨나는 현상을 발견하였다. 이 발견으로 인해 물리학자들은 ‘빛’이 입자 - 파동의 이중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빛의 이중성에 이어 곧바로 입자인 전자도 빛처럼 간섭무늬를 만드는 것이 관찰되었다. 전자 역시 입자-파동의 이중성을 보인 것이다. 더구나 사람의 사물 인식방식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빛이나 전자와 같은 소립자를 두 개의 슬릿을 열어놓고 하나씩 통과시켜도 간섭무늬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의 소립자가 동시에 두 곳의 슬릿을 통과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모든 소립자는 양자-스키어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입자 - 파동의 이중성이 자연의 본질임을 발견한 것이다.

| 사물의 이중성과 윤리

이중성은 과학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이중성이 담고 있는 깊은 의미를 다 논할 수는 없고, 불교에서 말하는 불이(不二)의 원리와 관련하여 이중성이 담고 있는 윤리적 의미에 대해서만 생각해보겠다. 불교는 일찍부터 이중성이 사물의 본질이라고 말해왔다. ‘범부 즉 부처’, ‘생사 즉 열반’, ‘번뇌 즉 보리’와 같은 표현이 이 사실을 말해준다. 이분법적으로 볼 때 이들은 둘인 것 같지만, 입자 - 파동의 이중성에서 보는 것처럼 이들 각각은 본질적으로 실체가 없기 때문에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있는 개념들이 아니다. 선(善)과 악(惡)도 상대적인 개념이지, 둘을 나누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악행은 무지(無知)의 소치이기 때문에 ‘악’은 치유해야 할 대상이지, 벌하거나 증오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살인마 앙굴마라를 제자로 거둔 것이다.

불이의 진리를 체득하면 선악의 분별도 초월하게 된다. 일찍부터 선 수행을 통해 자타불이의 진리를 터득한 하버드 대학교의 신경과학자 제임스 오스틴(James H. Austin, 1925~ )은 그의 체험을 뇌  ·  신경과학의 바탕에서 설명한 책 <선과 뇌의 향연>에서 이렇게 말한다. “체험의 역설이 넘쳐난다. 한없이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공존하고 색과 공이 동시에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다. …… 이 경지에서는 이전에 선과 악이라고 이름붙인 그런 상태에서 자유롭다. 선과 악을 잘 판단하여 공명정대하고 스스로 윤리적이었다고 여겨지는 그러한 상태에서도 벗어나 있다. …… 이런 심오한 깊이에서 일어나는 변화대상의 영역은 기질  ·  태도  ·  자기인식  ·  사고  ·  행동 등 총체적인 범위이다. 뿐만 아니라 신경계에서도 일련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제임스 오스틴이 한 말은 <반야심경>에서 하는 말이기도 하고, 불교에서 늘 하는 말이기도 하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1946년생으로 서울대 물리학과 학부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소립자 물리학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화여대 퇴직 후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 학  ·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경상남도 함양에 약천사를 창건했다. 이곳에 불교과학아카데미를 개설, 2014부터 매월 불교와 현대물리학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현대물리학으로 풀어본 반야심경>  ·  <천태사상으로 풀이한 현대과학> 등이 있다.

글 · 김성구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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