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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연(佛緣)이 깃든 다리세상과 세상을 잇는 다리3
  • 글 · 사진 이강식 기자
  • 승인 2019.05.22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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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궁성인 반월성 남쪽에는 신라 경덕왕 대에 조성된 월정교가 있다.이 다리를 통해 신라의 고승대덕은 궁궐을 오가며 왕과 신하들에게 불법을 전했을 것이다. 현재 다리는 2018년 4월 준공했다.

사찰에 건립된 다리 외에도 불교와 인연이 깊은 다리가 여럿 있다. 전남 보성군 벌교 홍교와 함평 고막천 석교는 스님이 백성들을 위해 놓은 다리다. 경주에는 원효 스님과 요석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전하는 다리가 있는데, <삼국유사>에는 궁성인 반월성 남쪽에 있는 ‘문천교(蚊川橋)’ 또는 ‘유교(楡橋)’로 기록하고 있다. 문천교가 월정교를 지칭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불교국가인 신라의 도성인 반월성 아래 문천에 세워진 월정교를 통해 고승대덕들이 궁성을 오가며 왕과 신하들에게 불법을 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월정교를 포함해 세 곳의 다리를 소개한다.

조선 영조 때 선암사 스님들이 백성 위해 놓은 보성 벌교 홍교

조선 영조 4년(1728), 전라남도 지방에 많은 비가 내려 대홍수가 났다. 당시 순천 낙안현에 있던 다리도 강물에 쓸려 내려갔다. 이 다리는 숙종 44년(1718)에 지역 주민들이 강과 해류(海流)가 교차하는 곳에 원목을 엮어 만든 뗏목다리였다.

전남 보성 벌교 홍교 앞에는 5개의 비석이 있는데, 홍교의 내력 등을 자세히 기록한 중수비와 단교명비다.

다리가 유실되자 백성들은 큰 불편을 겪었어야 했다. 결국 백성들의 불편을 보다 못한 스님들이 나섰다. 홍수가 난 이듬해 순천 선암사 주지 호암(護岩) 스님의 제자인 초안선사(楚安禪師)를 화주(化主)로, 습성대사(習性大師)를 공사감독으로 천거해 튼튼한 돌다리 건립에 착공했다. 다리는 6년 후인 영조 10년(1734)에 완공됐다. 벌교 홍교 건립과 관련된 내용은 선암사 승선교 조성 내용을 적어놓은 홍교비에 기록돼 있다.

벌교 홍교(보물 제304호)는 앞서 ‘차안과 피안을 잇는 다리 상 · 하’에서 소개한 선암사 승선교, 건봉사 능파교, 경주 불국사 청운교 · 백운교, 연화교 · 칠보교, 여수 흥국사 홍교, 순천 송광사 삼청교와 같이 무지개형태의 다리[虹霓]라는 점은 같다. 차이점은 앞서의 다리들이 홍예가 하나인데 반해, 벌교 홍교는 홍예가 3개라는 점이다.

벌교 홍교는 3개의 홍예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홍교는 마을에서 사찰로 들어가는 다리가 아니다. 벌교천 위에 건립된 홍교는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다리다. 예전 같으면 길을 물어 찾았겠지만, 요즘엔 내비게이션 덕택에 비교적 쉽게 찾아갈 수 있다. 홍교 인근 도로변에 주차를 하고 다리를 향해 걸어가면 비석 여러 개가 줄지어 서 있다. 5기의 비석은 홍교의 내력과 건립 참여자 등을 자세히 기록한 중수비(重修碑)와 단교명비(斷橋銘碑)다.

홍예의 안쪽 모습. 홍예 중앙에는 용머리가 있다.

홍교를 ‘단교’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홍수가 나면 다리가 끊어져 사람의 통행이 끊어진데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비석은 마모가 심하거나 훼손돼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1737년 · 1844년 ·   1899년에 건립된 3기의 중수비는 연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비석은 홍교의 역사와 지역의 연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인 셈이다.

현재 홍교의 길이는 27m, 높이는 약 3m, 폭은 4m 내외인데, 문화재청 자료에는 원래 홍교의 길이가 80m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영조 13년(1737년)과 헌종 10년(1844년)에 한 차례씩 중수(重修)했는데, 3칸의 홍예는 1737년 중수 때 만들어졌다. 1981년부터 4년간 실시한 보수공사 당시에는 홍예의 밑부분과 석교 외벽의 시멘트를 제거하고 모두 화강암으로 교체하는 등 원형을 복원했다.

다리를 만들 때 사용한 양쪽 석재의 색깔이 확연히 차이가 나 의아할 수 있는데, 낡은 석재는 조선시대 홍교를 건립할 당시의 석재이고, 깨끗해 보이는 석재는 1980년대 초 보수공사 때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세월이 흐르면서 벌교천의 폭이 넓어진 탓에 다리를 연장한듯하다. 다리 위를 걸을 때의 느낌도 기분 탓인지 다르게 느껴진다.

3개의 홍예 천장에는 각각 용머리가 있다. 스님들이 관리 감독해 건립한 다리여서 그런지 사찰 홍예교의 용머리와 모습이 거의 같다. 용머리에 담긴 ‘벽사(闢邪)’의 의미도 그대로 담긴듯하다. 홍교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홍교를 바라보면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져 색다른 운치가 있다. 민초들의 고통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다리를 놓았을 당시 스님들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듯하다.

홍교 오른쪽에는 1980년대 초 다리를 보수할 때 홍교에 이어 확장한 것으로 보이는 다리가 놓여 있다.

고려 때 고막대사가 신통력으로
만든 함평 고막천 석교

전남 함평에도 스님이 건립한 돌다리가 있다. 함평군 학교면 고막리에 위치한 보물 제1372호 고막천 석교다. 고려시대인 1274년(원종 15) 무안 승달산 법천사의 고막대사(古幕大師)가 신통력을 부려 놓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고막천 석교는 ‘똑다리’, ‘떡다리’, ‘독다리’로도 불리는 널다리 형태의 다리다. 고막리에서 떡을 만들어 이 다리를 건너 영산포 등지로 나가서 팔았다고 해서 ‘떡다리’로 불리기도 했다.

지역민들은 ‘고막대사가 신통력으로 다리를 놓았기 때문에 큰 홍수에도 견딜 수 있고, 700년이 지나도록 다리의 원형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여긴다. 석교가 있는 고막천은 나주군과 함평군의 경계를 따라 북에서 남으로 흘러 영산강에 합류하는 하천인데, 고막대사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듯 보인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쌀 100석을 실을 수 있는 배가 영산강을 거슬러 고막천을 통해 고막리까지 드나들어 장(場)이 번성했다고 한다.

석교의 길이는 약 20m, 너비는 3.5m, 높이는 2m에 달하는 남한에서 유일한 고려시대의 다리다. 사용된 석재 중 큰 것은 길이가 4m, 두께가 35㎝에 달한다. 예전에는 이 석교가 함평에서 나주나 영산포로 나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지금은 인근에 도로가 개통되면서 마을에서 들로 나가는 농로역할을 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풍파를 견디느라 다리의 석재는 군데군데 깎이고 패였지만,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다.

마을에서 내려다 본 함평 고막천 석교.

이 다리는 고식(古式) 석축방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간결하고 투박하다. 다듬거나 모양을 내지 않은 화강암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평평하게 노면(路面)을 만들어 연결했다. 교각(橋脚)은 총 5개로, 각 교각의 기둥과 노면 사이는 사각 형태의 굄돌을 받쳤다. 굄돌은 1개 또는 2개를 얹었는데, 모양이 일정하지 않고 크기도 제각각이다.

노면의 양쪽으로 난간돌을 6개씩 놓고 그 사이에 2줄로 판석을 깔았다. 노면의 중앙에는 중간석을 끼워 교차통행을 하도록 해놓았다. 돌기둥 위에는 노면을 잘 떠받칠 수 있도록 시렁돌을 올렸는데, 이 돌은 양쪽으로 50㎝ 가량 돌출돼 있어 새가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마치 나무를 잘라 만든 듯, 자유자재로 돌을 자르고 짜 맞춘 솜씨가 돋보인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보수를 하면서 엉성하게 조립해 본래의 품격을 잃었다.

2001년 다리를 보수할 당시 바닥에 박혀있던 나무 말뚝의 탄소 연대를 측정했는데, 최소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판명됐다. 이를 근거로 현재까지 민간지역에 건립된 다리 중에서 축조연대가 밝혀진 가장 오래된 돌다리임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셈이다.

석교는 마을길 아래편에 있다. 비탈을 조금 내려가면 다리가 나오는데, 벌교 홍교와 마찬가지로 하천 폭이 넓어진 탓인지 옛 다리에 석재를 연결해 하천을 건널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석교의 형태를 흉내 내서 연결했으면 수백 년 후에 문화유산이 될 수도 있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든다.

요즘 세상에서 ‘신통력으로 다리를 놓았다.’는 말을 믿을 사람은 없겠지만, 불교의 ‘자타불이(自他不二)’ 사상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위해 정성을 다해 다리를 놓았을 고막대사의 자비로운 마음이 지역에 오래오래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막천 석교 오른쪽에도 벌교 홍교와 같이 근래에 건립한 다리가 이어져 있다.

신라 고승들이 佛法 전하려
반월성 오갈 때 건넌 월정교

불교의 나라 신라. 신라인들은 불심(佛心)으로 돌을 다듬고, 금속을 다듬어 빛나는 불교문화유산을 만들었다. 이 유산들은 지금까지 전해져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했다. 원효  ·  의상  ·  자장 스님,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 스님 등 내로라하는 고승들도 신라 사람이다. 고승들은 신라의 도성인 경주 반월성과 연결된 다리를 오가며 왕과 신하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을 것이다.

신라시대 당시 반월성 남쪽에는 문천(蚊川)이 흘렀는데, 그 위에는 현재 서울 한강 위 ‘00대교’ 같은 다리가 여럿 놓여있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월정교(月淨橋)    ·  춘양교(春陽橋)  ·  문천교(蚊川橋) 등의 다리가 그것이다. 이 다리 중에서 현재 복원된 다리는 월정교 뿐이다. 이 다리와 관련된 기록은 <삼국사기> 권 제9 ‘경덕왕 19년(779)’에 “이월에 궁중에 큰 연못을 파고, 또 궁성의 남쪽 문천(蚊川) 위에는 월정교(月淨橋)와 춘양교(春陽橋) 두 다리를 놓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경덕왕 대는 불교문화가 꽃을 피운 시기다. 당시에 조성된 불국사와 석굴암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세계적인 명소가 됐다. 불교문화의 전성기였던 만큼 왕과 신하, 백성들의 불교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강했을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월정교의 중요성을 감안해 문화재청과 경주시는 1984년부터 2년간 복원설계를 위한 자료수집과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주춧돌과 주변에 흩어져 있던 부재(部材)를 통해 조사한 결과 다리의 길이는 63m, 너비는 12m, 높이는 5m, 교각 사이는 13m였다. 조사과정에서 주춧돌 등 석재는 3,000여 점, 교각 사이에서 목재·  기와 조각 등이 수습됐다. 교각은 센 물살에 견디도록 배 모양으로 쌓았고, 나무로 된 다리가 있었음이 확인됐다.

이후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복원공사로 길이 66.15m, 폭 13m, 높이 6m의 교량을 복원했다. 또 다리 양 끝의 문루(門樓) 2개동을 건립하는 공사를 2016년 4월부터 진행, 2018년 4월 준공했다.

세간에는 월정교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야기를 전하는 다리로 알려져 있는데, 원효대사 입적 시기(686년)와 다리 조성 시기(779년)는 93년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듯하다. 옛 기록에 의하면 이들의 사랑 이야기가 된 다리는 문천교다. <삼국유사> 제4권 의해(意解) 제5 ‘원효불기(元曉不羈)’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스님이 어느 날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리겠는가. 나는 하늘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오.”

사람은 아무도 이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노래를 들은 태종(무열왕)이 “이 스님은 필경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 이때 요석궁(瑤石宮)에 과부가 된 요석공주가 있었는데, 왕이 궁리(宮吏)에게 명해 원효를 찾아 데려가라고 했다. 궁리가 원효를 찾으니,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다가 만났다. 이때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궁리가 원효를 궁에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곳에 쉬게 했다. 공주는 태기가 있더니 설총(薛聰)을 낳았다. ……

문천교는 ‘유교(楡橋)’로도 불린다. 현재 복원된 월정교에서 19m 아래쪽에 다리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안내판이 없어 유구(遺構)를 확인할 수 없다. 월정교는 최부자집이 있는 교동마을에서 보아야 전체를 볼 수 있다. 조명을 설치해 놓아 낮 풍경보다는 밤의 풍경이 더 매력적이다. 건물 외형을 보았으면 다리 위를 걸어보자.

복원한 경주 월정교 다리 위. 궁궐 또는 사찰의 회랑을 연상케 한다.

월정교는 원효 스님과 요석공주를 이어준 문천교가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월정교를 지나다니며 불법(佛法)을 전했을 고승대덕의 숭고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점이다. 신라의 고승들이 없었더라면, 또 도성으로 이어진 월정교와 같은 다리가 없었더라면, 과연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찬란한 불교문화유산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지금 우리가 되살리고 계승해야할 것은 문화유산을 조성한 선조들의 고결한 정신이 아닐까싶다.

경주 월정교는 낮보다 밤의 풍경이 더 아름답다.

글 · 사진 이강식 기자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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