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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3_순천 낙안읍성200여 초가 옹기종기 풍류와 기개 600년 이어져
  • 글 · 송갑득 사진 · 이강식 기자
  • 승인 2019.05.22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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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서쪽 성곽에서 바라본 민속마을 전경. 마을 주민들이 살고 있는 옛 초가집 지붕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전남 순천시 낙안에 대한 기록은 1,500년 전 마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낙안읍성은 조선 초에 세워졌다. 백제 때는 ‘파지성(波知城)’이라 불렸고, 고려 태조 23년(940)부터 ‘낙안(樂安)’이라 불렸다. 읍성을 둘러싼 성곽은 조선 태조 6년(1397) 낙안 출신 김빈길 장군이 부민들과 함께 토성으로 쌓았다가, 세종 6년(1424) 석성으로 개축했다. 조선을 대표하는 계획도시라 할 수 있다.

정유재란 때 성곽 일부와 해자(垓子) · 적대(敵臺) 등이 훼손됐는데, 인조 4년(1626)낙안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이 보수 · 증축했다. 성곽 길이는 1,410m, 면적은 67,000여 평으로 평지에 쌓은 성이다. 성문은 세 곳인데 낙풍루(樂豐樓, 동문) · 쌍청루(雙淸樓, 남문) · 낙추문(樂秋門, 서문) 등이다.

필자는 1946년 낙안읍성에서 태어나 군대생활 3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이곳에서 살았다. 필자의 할아버지가 그랬고, 아버지도 그렇게 살았다. 그렇다고 논밭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살림이었다. 오히려 가진 게 없다보니 다른 곳에 가서 살 수도 없었고, 고향을 버리고 떠날 수 없었다. 그렇게 산지 5대째, 필자 나이도 이제 일흔 중반이다.

새마을운동 겪은 후 사적 지정

장독대가 가지런히 늘어서있는 풍경이 정겹다.

1970∼80년대, 마을 친구들은 ‘가난이 싫다.’며 서울과 부산 등지로 떠나갔지만 필자는 떠나지 못했다. 오라는 사람도, 오라는 곳도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떠나는 건 큰 모험이었다. 당시만 해도 가난한 집에 입하나 줄이는 것은 집안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 줄 알면서도 부모님 곁을 떠나 혼자 도시로 나가서는 제대로 못살 것만 같았다.

군대를 제대하고 고향에 돌아와 마땅한 일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잠시 친구 따라 서울에 올라가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일을 마치면 남산에 올라가 서울 야경을 바라보며 눈물도 많이 흘렸다. 높은 빌딩과 수많은 사람들, 모두가 선망하는 서울이었지만 작은 몸뚱이 하나 편히 누울 곳 없는 서울이 싫었다. 고향 작은집이 마냥 그리웠다. 가난했지만, 친척처럼 서로 일손을 도우며 기쁜 일 슬픈 일 함께 나누며 정을 나누고 살던 고향마을 사람들이 그리웠다. 결국 몇 달간의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의 권유로 마을 이장을 맡았다. 1970년 시작된 새마을운동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던 때였다. 매일 아침 마을회관 스피커에서는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로 시작하는 새마을운동 노래가 울려 퍼졌다. 날마다 들려오는 노랫소리만큼이나 마을이장은 바빴다. 우리 마을은 대부분 조선시대 지은 낡은 초가집이었는데, 초가를 걷어내고 슬레이트나 기와를 올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집을 헐고 새로 지을만한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낙안읍성 민속마을. 옛 부엌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러던 중 1983년, 정부에서 ‘옛 고을문화를 복원  ·   보존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겠다.’며 낙안읍성을 사적 제302호로 지정하였다. 당시 낙안읍성은 동내리  ·  남내리  ·  서내리 3개 마을로 200여 호 800여 명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사적으로 지정된 후 일부 현대식 가옥을 강제 철거  ·  이주시켰고, 현재는 108가구 중 80여 호에 주민 25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주 과정에서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철거예정 가옥 주민들은 ‘보상과 이주 대책이 부실하다.’며 버스를 대절해 서울 국회의사당과 당시 문화공보부 청사를 찾아가 시위를 했다. 전통 초가집에 살고 있던 보존대상 가옥 주민들 역시 ‘주민의 생활대책 없는 보존은 안 된다.’며 대책을 요구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군(郡)에서는 마을이장을 맡고 있으니 주민들을 설득해달라고 요구하고, 주민들은 이장이 주민들 편에 서서 시위에 적극 나서라고 닦달해 중간에서 여간 난처한 게 아니었다.

민속마을보존회가 구성되고, 군 당국에서 민속마을이 되면 마을생활체험장 운영과 난전식당 운영에 주민을 참여시키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민원은 잦아들었다. 복원사업이 본격 추진되면서 관리사무소가 개소했는데, 보존회와 마을 여러분들의 추천으로 관리사무소 청원경찰로 활동하게 됐다. 그런데 낙안읍성이 일부 복원되자, 마을을 찾는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관광객을 상대로 한 외지 노점상과 주민들의 불법 음식점이 생겨났다. 이런 행위와 불법 시설물로 인해 골머리를 앓기도 했다.

낙안민속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낙안읍성 위 산책로.

마을이장에서 문화해설사로

민속마을이 자리를 잡으면서 청원경찰의 역할보다 낙안읍성 성곽과 관아 등 이곳저곳을 관리하면서 마을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안내하고 홍보하는데 열중했다. 초기에는 역사적 자료가 없어 관광객 안내에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여러 문헌을 통해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게 됐고, 마을 원로들을 찾아뵙고 전해 내려오는 전설  ·  세시풍속  ·  민요  ·  놀이문화 등을 수집했다. 이를 토대로 1995년에 사비를 들여 낙안읍성 안내책자를 발간  ·  배포하기에 이르렀다.

고을 사또가 업무를 보던 동헌.
필자가 펴낸 낙안읍성 안내책자 표지.

이 책자를 제작 · 배포할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한문으로 된 역사자료를 번역하는 일이었다. 고맙게도 여러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펴낼 수 있었다. 책을 펴낸 후 신문과 방송, 월간지 등에 필자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됐다. 특히 ‘6시 내고향’과 ‘맛 따라 길 따라’에서 낙안읍성 지킴이로 소개된 후 승주군에서 별정직으로 특채 제안을 해오기도 했다. 하지만 고사했다. 또 도시에 나가있는 친구들이 방송을 보고 전화를 하거나, 관광객들이 아는 체를 할 때는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낙안읍성 안내책자는 현재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13쇄까지 발간했다.

이렇게 고향에서 고향의 문화를 지키며 살다보니 20여 년의 세월이 훌쩍 흘렀다. 청원경찰을 퇴직하고, 순천시 문화관광해설사도 그만두려고 하니, 낙안읍성 소장님이 낙안읍성 명예별감으로 추천해주셔서 지금까지 낙안읍성에 관한 자료수집과 문화해설을 하고 있다. 부족한 사람을 도와준 모든 분께 감사할 뿐이다. 나는 고향 낙안읍성을 누구보다 사랑한다. 그리고 고향에 대한 자부심도 그 누구보다 강하다. 낙안읍성을 소개하는 글을 여러 신문과 잡지에 기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낙안읍성 성문을 들어서면 시간이 흐르다 멈추어 버린 듯,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온 듯 아련한 추억에 빠지곤 한다.

남도의 따스한 인정이 넘쳐나는 낙안읍성은 필자 뿐 만아니라 여러분에게도 고향집 어머님 품속 같은 마을로 여겨질 것이다.

문화  ·  문화재, 그리고 불교

외부에서 바라본 낙안읍성. 성으로 들 필자가 펴낸 낙안읍성 안내책자 표지. 어가는 입구에 방어시설인 해자(垓子)가 설치돼 있다.

낙안읍성에는 문화재와 명소가 다양하다. 읍성 옛터가 사적 302호이고, 오늘날의 영빈관에 해당하는 객사는 지방유형문화재 170호로 지정돼 있다. 또 국가지정 민속 보존 가옥으로 민가 9동이 지정돼 있으며, 수령(守令)이 집무를 보던 동헌, 수령의 숙소로 사용하던 내아(內衙)도 잘 보존돼 있다. 지방유형문화재 자료 47호인 임경업 장군 선정비 외에 노거수(老巨樹) 15그루가 지방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이순신 장군에게 술과 절을 받았다고 전하는 장군목(푸조나무).

노거수 중 푸조나무는 둘레가 15m에 달하는데 이순신 장군이 정유재란 때 해전을 앞두고 빙허루에 올라 ‘전쟁은 사람이 하지만 이기고 지는 것은 하늘이 정해 준다.’고 말한 후 여러 장수들과 함께 객사 옆에 심어 국운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고 전해지는 나무다. 주민들은 이 나무를 ‘이순신 장군에게 술도 받았고, 절도 받은 나무’라고 하여 ‘장군목’이라 부르기도 한다. 2012년 태풍에 의해 부러져 2018년 가을에 대목(아들 목)을 심어 대를 잇게 했다.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일화가 전하는 은행나무.

낙안읍성은 세시풍속의 전승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주민들과 낙안읍성보존회에서 장승과 솟대를 세우고 지신밟기, 농악놀이를 하고, 임경업 장군 비각에서는 추모제와 마을 당산제를 지낸다. 이밖에도 관광객들과 함께 줄다리기를 하고, 횃불을 들고 성곽을 돈 후 달집을 태우며 한해 액운을 쫓기도 한다. 또한 주말에는 수문장 교대의식과 전통혼례 등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 읍성에서는 판소리와 가야금을 배울 수도 있으며, 길쌈 · 짚풀공예 · 대장간 체험도 해볼 수 있다.

낙안읍성 민속마을 돌담. 대충 쌓은듯 보이지만, 제법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다.

낙안은 불교와 인연이 깊은 고장이다. ‘낙안(樂安)’이란 명칭은 안락국토, 즉 부처님의 세계라는 뜻을 품고 있다. 읍성에서 남서 방향으로 징광사지(證光寺址)가 있는데, 중국에서 들여온 불교경전을 인쇄해 전국 각 사찰로 보낸 곳이다. 그 뒷산은 금화산(金華山)인데 부처님을 의미하고, 우측 존재산(尊宰山)은 부처님의 제자인 가섭존자를 의미한다. 읍성 동남쪽에 있는 ‘제석산(帝釋山)’은 제석천, 그 아래 ‘도리등(회정마을)’은 도리천, 동쪽 ‘오봉산(五峯山)’은 오백나한, ‘금전산(金錢山)’은 금전비구를 뜻한다고 한다.

또 금전산에는 납월매로 유명한 금둔사(金芚寺)와 금강암(金崗庵)이 있다. 서쪽 백이산(伯夷山) 고개는 ‘분계재(分界峙)’라고 부르는데, 사바세계와 극락세계의 경계를 의미한다. 즉 낙안읍성은 안락국토인 부처님의 세계, 재 너머는 중생의 세계라는 의미다. 이외에도 벌교 뒷산인 ‘부용산(芙蓉山)’은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을, 수정마을 ‘보리마당’은 부처님이 득도하신 보리수를 의미한다.

심청전을 보면 심청이가 임당수에 제물로 바쳐졌으나 부처님의 가피로 중국 황후로 태어난다. 그 후 관음보살상을 만들어 조선 땅에 보내는데 그 불상이 낙안포에 닿아 ‘성덕’이란 처자(보살)가 불상을 곡성 관음사(觀音寺)에 모셨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낙안읍성 동문입구 좌측에 있는 고인돌 군.

낙안은 제주도처럼 삼다(三多)의 고장으로 불린다. 이곳의 ‘삼다’는 돌과 술과 소리다. 낙안읍성 동문 앞 고인돌 군(群)은 그 증거 중 하나이다. 택지조성과 경지정리를 하면서 고인돌이 많이 훼손됐는데, 다행히 읍성 주변에는 아직도 195기의 고인돌이 남아있다. 인근 지역에서는 패총무덤과 선사시대 유물이 다량 출토되기도 했다. 돌이 강인함을 나타내고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을 대변한다면, 술은 예(禮)와 흥을 아우르고, 소리는 멋과 풍류로 표출된다. 낙안은 동편제의 대가인 국창 송만갑 선생이 태어난 곳이고, 가야금병창을 집대성한 오태석 명인의 고향이다. 두 분의 생가가 모두 읍성 내에 있다.

항일투쟁으로 인해 폐군(廢郡)의 아픔

낙안은 구국충절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일제에 항거해 3.1만세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해 ‘낙안 3.1운동 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1920년대 소작쟁의(小作爭議)를 벌인 발상지이기도 하다.

낙안읍성 옥사. 죄수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사실 이런 항일의식이 고취된 배경은 조선시대 왜구들의 노략질과 무관치 않다. 오랜 기간 왜구들에게 수탈을 당하다보니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조선이 침탈당할 때 이 지역 출신 나철 선생과 오기호 · 이병채 지사 등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부에 격문을 전하고, 조약의 부당함을 항의하기도 했다. 이들은 또 1908년 한일합병 조약이 체결되자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을사오적을 암살하려다 실패, 일본 경찰에 붙잡혀 유배 또는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렇게 일본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사사건건 대항하다 보니 일제가 이 지역을 좋아할 리 없었다. 일제는 1908년 10월 전국 행정구역을 개편한다는 명목 아래 항일투쟁무력화를 목적으로 낙안군을 폐군(廢郡)시키기에 이른다. ‘낙안군’이란 명칭이 질곡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배경이다.

낙안읍성 동문인 낙풍루 입구.

낙안읍성은 드라마와 영화 속에도 자주 등장했다. 대표적인 작품은 ‘대장금’, ‘상도’, ‘허준’, ‘불멸의 이순신’, ‘태극기 휘날리며’, ‘왕이 된 남자’, ‘디워’, ‘용가리’ 등이다. 또 한국관광공사가 가족들과 함께 둘러볼 명소 16선으로 추천한 바 있고, 미국 CNN 방송은 한국 방문 시 꼭 들러봐야 할 곳 50선에 선정하기도 했다.

낙안읍성은 2012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잠정 등록되었는데, 2022년경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세계인의 문화유산으로 거듭나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송갑득

 

낙안읍성 명예별감. 낙안읍성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이장과 문화관광해설사를 역임했다. 저서로 〈낙안읍성〉·〈민속 문화이야기〉 등이 있고, 현재 〈인생살이〉를 집필 중이다.

글 · 송갑득 사진 · 이강식 기자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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