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월간금강 특집
3대 지표의 21세기적 회향3.1운동 100주년과 천태종 3대 지표

대한불교천태종의 3대 지표는 천태종의 이념이자 실천원리이다. 애국불교 · 생활불교 · 대중불교의 실현은 천태종의 목표일뿐 아니라, 한국불교가 추구하는 이념적 종착지이기도 하다. ‘위대함’이란 시대정신의 소산이면서도 그 시대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만약 어느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인물들에게만 유용한 이념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주의(主義)나 주장은 될 수 있을지언정 진리를 표방할 수는 없다. 따라서 3대 지표는 21세기의 나침반이기도 하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기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실천 핵심은 생산불교

〈천태종 약전〉(1970, 불교사상사)에서는 이 3대 지표의 실천덕목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첫째, 기복불교에서 작복(作福)불교를 지향한다.
둘째, 유한(游閑)불교에서 생산불교를 지향한다.
셋째, 우상불교에서 실천불교를 지향한다.
넷째, 생활 즉 ‘불교’라는 이념을 실천한다.

3대 지표 가운데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두 번째의 생활불교이다. 물론 불교가 생활 속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당위성(當爲性)을 근거로 하는 것이지만, 그 슬로건 속에는 이미 기성의 불교가 일상생활과 유리된 채 혼자만의 안일에 빠져 있다는 통렬한 비판의식이 깔려있다. 새로운 불교의 출발은 그 이율배반적 모순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는 성찰의식이 담겨 있다.

이 3대 지표는 다시 지혜복덕 창조, 주경야선(晝耕夜禪) 정진, 생산불교 개척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수행과 노동은 일치되어야 하며, 생활 그 자체가 곧바로 불교적 이상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선언이다. 사실 한국의 불자들에게 치명적 약점이 있다면 그것은 불교적 가치관과 자신의 삶을 별개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절에 있을 때만 불자, 일주문 밖을 나서면 비불교적 인격으로 돌변하는 이중성이다. 물론 불교적 가치를 현실 속에 응용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렵다는 것과 실현불가능하다는 생각은 다른 것이다. 힘들어도 실천하려는 의지가 불자의 기본적 자세여야 한다는 점이다.

1970년 경 소백산 조림작업 중에 점심공양을 하는 신도들. 당시 소백산은 민둥산이었다.

불교의 목표는 무엇인가? 중생제도이며 깨달음의 추구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결한 출가정신이 매너리즘에 빠져들고 급기야 스스로의 안일에 빠져든다. 따라서 대중들은 일상생활에서 멀리 떨어진 기복불교의 허상에 매달리게 된다. 기복은 이기적 행복추구이며, 동시에 물질적이고 직접적인 목표에 집착하는 행태이다. 유한불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정신 대신에 현실적인 안일에 파묻히는 행위를 가리킨다. 우상불교라는 말은 형식주의를 가리킨다. 사물의 핵심,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 겉모습에만 현혹되는 무지를 말한다.

따라서 3대 지표의 핵심은 생산불교라고 볼 수 있다. 즉 받는 불교에서 주는 불교, 복을 바라는 마음에서 복을 짓는 인연으로의 질적(質的) 변환을 뜻하는 말이다.

기미독립선언서 보성사판 복제.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 올바른 삶의 방편은 십선업

21세기의 불교는 지난 세기와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21세기가 지난 2,000년과는 차별화되는 새로운 시점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인류는 인종, 영토,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말미암은 투쟁과 갈등의 시대 속에서 표류해 왔다. 그 이기적인 야만심이 낳은 과보는 생태계 파괴, 지구 온난화, 제3세계의 기근 등이다. 그 반성의 출발점은 인간성의 회복, 서로 다른 생명상호간의 차이성 인정으로 나타난다. 이른바 글로벌 사회, 문화의 세기가 그 대안이다.

실제로 생명공학의 발전, 인터넷의 무한보급, 인공지능의 활성화 등은 인류가 여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무한한 가능성의 미래를 엿보게 한다. 따라서 미래의 불교는 전혀 새로운 질서 속에서 출범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불교계 안에서도 이 새로운 시대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루어지고 있다. 과연 로봇 스님도 성불할 수 있을까? 사이버세계에서의 범죄는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가? 장기 교체와 생명 연장은 어디까지 용인되어야 하나? 등의 문제에 대해서 불교적 해답을 제시해야만 한다.

불교 가르침의 핵심은 인간과 중생들에 대한 근원적 이해, 그 고통의 현실로부터의 완전한 해탈이라는 구체적 목표 아래 진행되어온 교설이었다. 우리는 이 2,600년 전통 위에서 그 새로운 응용을 모색해야 하는 시점이다.

3대 지표에서 제시하는 올바른 삶의 방편은 십선업(十善業)으로 대변된다. 즉 몸으로 저지르는 살생 · 도적질 · 음행의 셋과 입으로 저지르는 네 가지 악업 곧 망령된 말 · 악담 · 이간질시키는 말 · 번드르르하게 속이는 말 등이며, 마음으로 저지르는 세 가지 업 탐욕 · 성냄 · 어리석음의 열 가지 죄업을 소멸하는 삶이다.

1. 산목숨을 해치지 않는 일 [不殺生]
2. 주어지지 않는 물건을 뺏지 않는 일 [不偸盜]
3. 그릇된 이성관계의 단절 [不邪淫]
4. 망령된 말 멀리하기 [不妄語]
5. 속이는 말 하지 않기 [不綺語]
6. 이간질시키는 말 삼가기 [不兩舌]
7. 악담이나 욕지거리 하지 않기 [不惡口]
8. 인색하고 탐내는 마음 없애기 [不慳貪]
9. 원한 품는 마음, 성내는 마음 품지 않기 [不怨瞋]
10. 그릇된 견해를 버리기 [不邪見]

신 · 구 · 의의 삼업(三業)은 윤회의 근본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 삼악업을 불각(不覺) 즉 깨닫지 못한 삶으로 규정한다. 반면 이 불각이 상사각(相似覺)과 수분각(隨分覺)을 거쳐 본각(本覺)에 이르는 과정을 불교에서의 수행정진이라고 본다.

위에서 열거한 십악업을 해소하는 단계는 세 가지이다. 첫째, 몸으로 저지르는 세 가지 악업, 살(殺)· 도(盜)· 음(淫)을 단절하는 단계이다. 두 번째는 입으로 저지르는 죄업 네 가지를 소멸하는 단계이다. 마지막 단계가 내면의 완성이다. 즉 십악업을 제거하는 윤리적 실천은 행위 → 언설 → 마음으로 서서히 소멸하는 것이며, 십악업 대신에 십선업이 자리 잡는 경지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정행(正行)이다.

서양종교의 중심개념은 성스러움(Das Heilige)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올바르다’는 가치판단을 소중하게 여긴다. 팔정도 이래 실천 · 수행해온 올바름은 천태종 3대 지표에서 강조하는 핵심적 가치이다. 그리고 그 올바름의 구현이 ‘반야(般若)’이다.

| 3대 지표의 사회화

3대 지표의 21세기적 회향은 ‘불교적 가치의 현실적 응용’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생활 즉 불법(佛法)이라는 상월대조사의 가르침은 내면의 완성과 그 사회화를 뜻한다. 사회와 가정 속에 불교적 질서가 정착하려면 우선 불교 내부의 불합리한 요소들이 개선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십선업의 정착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할 점은 불교계율이 갖는 ‘실용성과 상징성의 긴장’ 문제이다.

실제로 지난 50년 동안 우리는 경제대국을 지향해 왔고, 그 산업화의 속도 또한 격렬하고 빨랐다는 현실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증폭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급격한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에 미흡하였고, 불교를 비롯한 전통사상 등을 골동품적 가치 이상으로 평가하지 않으려는 어리석음이 빚은 필연적 과보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한국의 대표적 세 종교인 불교 · 개신교 · 가톨릭은 그 사회적 책무에 대한 공동의 책임의식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와 국가사회가 추구하는 이상이 서로 대립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종교는 사회를 위해서 있어야 한다는 자각이 선행되어야 한다. 종교가 사회를 위해 있는 것이지, 사회가 종교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가 추구하는 내면의 정화가 곧바로 건전한 사회를 이룩하는 길이냐 하는 점에는 이론이 있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완벽한 사회적 조직과 법령완비가 곧 인간행복의 조건이냐 하는 문제도 상존한다.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방편은 내면의 완성을 추구하는 3대 지표가 이 사회의 지배적 경향으로 발전하는 길 뿐이다. 이것을 우리는 ‘3대 지표의 사회화(Socialization)’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미래불교의 성패는 결국 우리가 표방하는 진리의 세계에 얼마나 가깝게 다가서느냐 하는 내용적인 문제이다. 종교 간의 대립에서 제외해야할 부분은 진리성에 대한 다툼이다. 우리가 이웃종교의 진리성을 문제 삼기 이전에 주목해야할 점은 그들 종교를 믿는 신도들이 이미 다수 포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현실을 외면한 채 자신의 진리성이 가진 정당성만을 내세우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각자가 표방하는 진리에 얼마만큼 그들이 가까이 있느냐 하는 문제라는 뜻이다.

잣 방울에서 잣을 골라내기 위해 작업을 하고 있는 천태종 스님과 신도들.

3대 지표와 우리의 일상생활이 하나일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깨달음의 문에 들어선 것이다. 다만 불교적 깨달음을 지나치게 미화(美化)한다든지, 요령부득의 법어(法語)로 호도하는 일 등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법어의 형식이 한문게송 투성이라든지, 선적(禪的)인 언설로 일관하는 점도 문제이다. 우리가 한글대장경의 완간을 불교현대화의 시발로 보는 이유는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늘의 우리 언어’로 되살려냈다는 점 때문이다.

미래종교의 우열을 구분할 때 결코 신도의 숫자, 포교당의 대형화 등이 우선적 잣대가 되지는 않으리라 본다. 어느 종교가 그 사회에 얼마나 유용하게 자리매김했는가하는 사회적 평가가 관건이다. 또 각 종교의 내부가 얼마나 청빈하고 검소하냐 하는 내면적 가치가 그 종교의 건강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천태종은 짧은 연륜 속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주목할 만한 경우이다. 특히 대중들을 교화하는 기도의례의 정착은 특기할만하다. 다만 그로부터 야기된 기복성향의 문제, 여성출가자들의 위상정립 등은 풀어야할 과제이다. 지난 50년을 천태종단의 발전과 정착시기라고 한다면 다가오는 세기는 천태종단의 세계화 전략이라고 본다. 불교세계화는 우리 시대의 당면과제이기 때문이다.

천태종 주관으로 2004년 7월 3일 1군단 연병장 특설무대에서 봉행된 호국영령천도 민군합동 위령대재.

정병조

동국대 명예교수,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를 받았다. 동국대학교 윤리문화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동 대학 교무처장 · 도서관장 · 부총장, 인도 네루(Nehru) 대학교 초빙교수, 금강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했다.

글 · 정병조  ggbn@ggbn.co.kr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글 · 정병조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