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월간금강
편지, 손 끝에서 피어나는 마음지금 제 나이가 되신 아버지를 그리며

새해가 오는가 했는데 어느새 춘분이 지나고 있습니다. 거짓말처럼 날이 포근합니다. 추위란 원래 그런 것이겠지요. 봄 앞에선 슬슬 꼬리를 숨기니 말입니다. 아버지, 그곳에도 봄은 왔는지요? 가끔 아버지 생각이 날 때마다 막연히 잘 계실 거라는 믿음이 앞서서인지 안부도 여쭙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글은 아버지께 쓰는 첫 편지이니 말입니다. 글이 두서없는 것은 그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참 많은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아버지와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눈 지 벌써 50여 년이나 흘렀습니다. 중학생이었던 제가 그때의 아버지보다 지금은 나이가 훨씬 많아져 버렸어요. 너무나 변해버려 사진 속의 젊은 아버지가 지금의 저를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한눈에 알아보면 좋겠습니다. 알아보셔야 해요. 아버지 없이 지났던 수많은 시간이 저는 엄청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정말 미웠습니다. 미워하기로 했습니다.

늦은 밤, 열 살짜리가 오빠 대신 아버지 심부름을 갈 때 어두운 골목길이 무섭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습니다. ‘네가 달리기를 잘하지 않니?’라는 말을 일부러 믿었습니다. 제가 가지 않으면 더 어린 동생에게 시킬까 봐 제가 갔던 것이거든요. 물론 제가 손잡고 갈 수 있었지만요. 나중에 험한 세상을 살아낼 때 담력이 꼭 필요해서 그랬다는 말도 미웠습니다. 아버지는 무조건 우리가 클 때까지, 스스로 자립할 때까지는 살아계셔야 했습니다.

담력보다 더 필요한 것이 아버지였다는 것을 그때의 아버지는 잘 모르셨던 것 같습니다. 채 오십도 못 된 나이에 그리 빨리 가시려고 그랬던 것이라고 생각도 해보았습니다만,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데 그때는 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가끔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거나 그립다거나 하는 따위의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아버지가 절실히 필요할 때 저는 이를 악물고 일부러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보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겠어.’라는 말이 더 맞는 표현이니까요.

아버지, 아세요? 엄마가 돌아가실 때 했던 ‘아버지 곁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던 말씀을 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라도 그랬을 거거든요. 올망졸망 여덟이나 되는 자식들을 벌거숭이 땅 위에 내던져놓고 어떻게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릴 수 있습니까? 그건 반칙입니다. 되돌릴 수 없는 계약 위반입니다. 아버지는 섭섭하시겠지만 저는, 한 번쯤은 꼭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쓰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편지를 쓰면서 처음부터 제 말만 했네요. 아버지가 하고 싶었던 말, 미처 못다 한 말도 많았을 텐데 귀를 닫고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네요. 이제 지난 이야기는 그만하겠습니다. 그때의 아버지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져 버린 지금, 남들처럼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더 편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만약 아버지께서 살아계셨다면 주름살과 흰머리, 돋보기를 껴야 글자가 잘 보이는 자식들과 밥을 함께 먹으면서 출가한 자식들의 자식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너무도 많이 변해버려 적응하기 어려운 세상 이야기, 초고령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요? 세대 단절과 이웃과의 단절, 층층의 끼리끼리의 문화, 질풍노도의 부동산 신화 이야기, 최저 임금과 고난이도의 청년 취업난 이야기 등을 하고 있을까요? 아버지는 새벽 5시면 라디오를 켜서 그날의 일기예보를 제일 먼저 체크 하셨죠. 식구 수에 비해 우산 수가 적어 자식들이 함께 우산을 쓰고 학교에 갈 수 있게 하셨던 것처럼 사람 조심, 길 조심, 차 조심하라고 하셨을까요? 어쩌면 연세가 너무 많아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외로이 요양 병상에 누워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수식어 없이 편하게 아버지를 불러봅니다. 지금 제 나이가 되신 아버지라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요? 지금 저는 많은 시간을 보냈어도 여전히 세상살이가 쉽지 않습니다.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도 여전히 살아가는 것이 서툴고 약지 못하며 새로운 것이 신나고 즐겁지가 않습니다. 오래된 물건들을 버리지도 못하고 껴안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 예전처럼 책 읽기를 여전히 좋아하는데도 안경 쓰고 보는 것이 성가십니다. 꼭 읽어야만 하는 도서목록만 나열해놓고 겨우겨우 조금씩 읽기는 하지만 영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걷기는 규칙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미세먼지로 바깥나들이조차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100세 시대답게 모든 게 좋아졌습니다. 의료보험 혜택도 좋아졌고, 먹는 것도 그때보다 영양이 훨씬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늦게까지 돈벌이를 해야 하니 많이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눈만 뜨면 부지런해야 하고, 열심히 또 열심히 일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셨을까요?

아버지, 그때나 지금이나 남북은 통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평양을 거쳐 저 멀리 블라디보스토크 · 만주 · 모스크바를 다녀왔던 그때처럼 남북이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 기억에 약간 남아있습니다만, 여전히 설렘만 무성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때보다 분위기는 훨씬 부드러워져서 머지않아 유라시아대륙횡단열차를 타고 북한과 러시아와 유럽을 다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가능해진다면 대륙간횡단열차 안에서 아버지께 두 번째 편지를 쓸 수 있겠지요.

아버지, 지금의 제 나이가 되신 아버지의 모습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지만,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모습으로 살고 계실까요? 지금은 금연을 권하는 세상이라 담배를 좋아하셔서 많이 힘드실 것이고, 길에서 피우면 벌금도 물어야 하니 화를 내실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저희가 마땅히 금연을 권해드렸을 겁니다. 그리고 금연을 하셨을 테구요. 아버지, 편지가 정말 두서없이 길어졌습니다. 이 봄, 지금의 제 나이가 되신 아버지를 마주하며 제가 살아가는 방향을 가늠해보니 조금이나마 아버지를 만난 것 같아 정말 다행입니다.

‘그래, 정말 열심히 잘 살아왔다.’, ‘지금처럼 열심히 살면 된다.’라고 천천히 적어봅니다. 아버지, 다음 편지 때까지 잘 계셔야 해요. 옆에 계신 엄마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박해림

1996년 〈시와 시학〉에 시 부문으로 등단했다. 이후 2001년 서울신문 · 부산일보 신춘문예에서 시조, 1999년 〈월간문학〉에서 동시 부문에 당선했다. 아주대학교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집 〈그대, 빈집이었으면 좋겠네〉, 시조집 〈못의 시학〉, 동시집 〈간지럼 타는 배〉, 시평론집 〈한국서정시의 깊이와 지평〉 등 다수가 있다. 수주문학상과 김상옥시조문학상을 수상했다.

글 · 박해림  ggbn@ggbn.co.kr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글 · 박해림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