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망명정부 위치한 다람살라, 남루한 풍경과 경적소리 가득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 낡고 오래된 건물들이 보인다.

뉴델리에서 출발하는 다람살라행 비행기 역시 이른 아침 시간이어서 한국에서 출발할 때처럼 새벽 일찍 일어나야했다. 뉴델리 공항은 아침부터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로 붐볐고, 새치기 하는 사람들로 인한 작은 실랑이 속에서 수속을 마치고 나니 피곤이 더해졌다. 그렇게 상당히 먼 탑승게이트에 도착하고 나서야 분주했던 아침을 뒤로한 채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다람살라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게이트에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객은 물론 티베트 및 아시아 여러 나라의 스님들도 많았다.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지만 이 게이트에 모인 우리들은 모두 내일부터 다람살라에서 열릴 달라이라마 존자의 법회 참석이 목적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해 다람살라 법회에 참석했던 동료가 먹구름으로 잔뜩 어두워진 창밖을 가리키며, 오늘도 어쩌면 버스를 타고 10시간 넘게 가야할지도 모른다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다람살라로 우리를 데려다 줄 프로펠러 단 작은 비행기는 현지 기후가 워낙 불안정해서 자주 취소가 된다고 했다. 그래서 지난해도 비행기가 취소되어 뉴델리에서 무려 10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갔다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작된 빗방울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당연히 출발 시간은 뒤로, 또 뒤로 기약 없이 미뤄졌다. 1시간쯤 초조하게 기다린 끝에 다행히 빗줄기가 약해졌다. 무심하던 안내방송은 그제야 약한 비가 내리는 활주로로 우리의 이동을 허락해 주었다.

우리를 태운 프로펠러 비행기는 짙은 구름 속을 1시간쯤 날아 우리나라의 시골 버스정류장 같은, 군사시설을 빌려 쓰고 있어 소박한 분위기의 다람살라 공항에 도착했다. 뉴델리와는 달리 맑은 날씨 아래로 우리는 미리 예약해둔 택시를 탔다. 목적지는 저 멀리 보이는 높은 산봉우리. 택시는 서구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티베트 불교수행자 달라이라마가 계신 산봉우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시골길은 말로만 듣던 소떼가 많아 택시는 조금 달리다가 속도를 줄여야 했고, 그럴 때마다 인도의 속살을 느낄 수 있었기에 설레었다.

산으로 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더 달리자 걸어가는 사람과 오토바이, 온순한 개와 소들이 가뜩이나 좁은 길을 더 비좁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차들은 습관적으로 경적을 울려댄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가 도저히 스쳐지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좁은 길을 그들은 끝없이 경적을 울려대며, 그리고 언제나 그랬다는 듯 잘도 지나간다.

다람살라가 가까워지자 길거리 좌판과 남루하고 조그만 상점과 식당이 길 옆에 옹기종기 서있다. 다람살라가 관광지가 되면서 사람들이 늘어난 탓인지 길가에 방치된 쓰레기장에는 몇 마리의 소와 개와 원숭이가 음식물 쓰레기를 뒤지고 있다. 그 풍경에 신경질적인 자동차 경적소리는 배경음악처럼 깔린다. ‘티베트 불교, 명상, 마음의 평화 등’의 단어로 그려왔던 다람살라에 대한 이미지가 서서히 ‘남루함, 시끄러움, 복잡함 등’으로 대체되어가고 있었다.

택시가 멈춰선 곳은 우리의 시골장터 같은 거리였다. 이 거리는 자줏빛 승복을 걸친 티베트 승려, 티베트 승려가 된 눈 푸른 납자, 우리와 닮은 얼굴을 한 티베트인, 그리고 티베트 불교와 그 수행 전통을 알기 위해 모여든 외국인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호텔 문 앞을 지키고 선 터번을 두르고 멋진 콧수염을 기른 시크교도, 거리에서 마주치는 피부가 검은 인도인, 먼 옛날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온 아리안족 후예들인 흰 피부 인도인은 이곳이 해발 3,000미터가 넘는 고원으로 이루어진 티베트가 아니라, 망국의 아픔을 품은 티베트 망명정부가 인도 정부로부터 제한적으로 허락받은 가난하고 남루한 인도 서북부 산골짜기임을 깨닫게 한다.

불교는 세계 4대 고대 문명의 하나였던 인도 문명을 기반으로 한 위대한 유산이었다. 그런데 불교가 전해진 또 다른 대륙 중국은 역시 4대 문명의 하나였기에 ‘인도 불교’가 전해질 때 이미 중국 고유의 유가 · 묵가 · 도가 · 법가 등 고도로 발달된 사상과 철학이 사회 · 정치 · 도덕 분야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따라서 이미 중앙아시아를 거치며 변화를 겪은 인도불교는 중국으로 들어오면서 중국 고유의 사상과 큰 폭의 타협을 하면서 변용을 해 ‘중국화 된 불교’, 소위 ‘중국 불교’가 되었다. 한국불교와 일본불교는 바로 이러한 중국불교를 기반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인도에서 불교가 시작되었음에도 우리들에게 불교는 늘 ‘어려운 한문투성이’, 중국과 연관된 이미지를 자꾸만 연상하게 만든다.

이에 비해 티베트는 불교가 전래된 7~8세기, 중국처럼 외래 사상인 불교를 변용시킬 강력한 사상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지리적으로도 티베트는 인도와 네팔 북쪽에 접해 있어 당대 인도 최고의 거장들이 직접 티베트에 들어가 불교를 전해주었다. 그리고 9세기경에는 인도 대승불교의 주요한 사상 체계를 담고 있는 많은 경전들이 티베트 왕조의 대대적 지원 아래 티베트어로 번역되었다.

이렇다보니 티베트에 불교가 전해진 이후 티베트인들은 인도 대승불교에 대한 경이로운 전승과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티베트가 ‘붉은 얼굴을 가진 학자의 나라’로 불리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티베트인들이 번역한 〈티베트대장경〉은 중국인들이 번역한 〈한역(漢譯) 대장경〉과 더불어 위대한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불린다. 〈한역 대장경〉과 비교해봤을 때 〈티베트대장경〉은 인도 대승불교의 향취를 더욱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즉, 약 13세기경 인도 땅에서 소멸한 인도 대승불교는 그 이전에 지리적 무대를 히말라야 산맥 북쪽의 티베트로 바꾼 후, 그 곳에서 ‘붉은 얼굴을 가진 티베트인들’에 의해 매우 체계적이고 심도 깊게 고찰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이렇게 인도 대승불교의 맥박이 살아 숨 쉬고, 방대하고 정교한 불교 사상을 정립한 티베트 불교는 오늘날 ‘라마교’라 불리면서 불교가 아닌, 불교와 비슷한 제3의 어떤 티베트 토속 종교라는 왜곡된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라마’란 거룩한 · 성자 · 스승의 뜻으로 티베트에서 불교 최고의 스승을 일컫는 말이다. 물론 티베트 불교에 있어 라마(스승)의 존재는 티베트 불교와 티베트 사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키워드이긴 하지만, 가톨릭을 ‘교황교’라고 부르지 않듯이 ‘라마교’라고 부르는 건 티베트 불교를 아주 좁은 의미로 한정시키는 표현이기에 주의를 요해야 한다.

그러나 그토록 수준 높은 문화적 역량과 함께 당시 세계 최강이던 당나라를 군사력으로 위협하던 토번(吐蕃, 티베트의 옛 이름) 제국의 영광도 지금에 와서는 신경질적인 자동차 경적소리에 흩날려 사라져, 이곳 다람살라는 그저 티베트 망명정부가 자리한 인도 서북부의 시골도시일 뿐이다. 그래서 바티칸과 같은 성 베드로 성당은 고사하고, 그들 고향에 두고 온 포탈라궁전과도 비교할 수도 없는 조그마한 건물이 달라이 라마 14세의 거처가 되었다.

필자 역시 망명정부라는 아픈 역사의 기억을 공유한 국민인 탓일까? 좌판을 깔고 졸고 있는 ‘붉은 얼굴’의 티베트인들을 보며 왠지 모를 서글픔이 마음 한편으로 다가왔다.

정상교

현재 금강대학교 불교문화학부 교수. 천태종립 금강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 후 일본 동경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동국대학교(경주) 티벳대장경역경원 전임연구원을 역임했다. 저서로 〈도쿄대학 불교학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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