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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2. 경주 양동마을
  • 글 · 이지휴 사진 · 이강식 기자
  • 승인 2019.03.19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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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 남쪽에 있는 해발 100m 높이의 성주봉에서 바라 본 마을 전경.

경주 손 씨, 여강 이 씨 500년 집성촌
이언적 등 명현(名賢)의 향훈 오롯

경주 양동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고등학교 졸업 직후 국민은행에 입사했다. 이후 35년 간 객지생활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 적지 않은 곡절을 겪었다. 하지만 일흔이 된 지금도 어릴 때 추억은 생생하다. 어쩌면 고향 마을로 돌아온 후 양동전문해설사로 일하면서 옛 기억을 자주 떠올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전통문화가 일상이던 어린 시절

돌이켜보면 당시 또래 아이들과 밤낮없이 개구쟁이 짓을 많이 했다. 봄이면 앞산 성주봉에 올라 보릿고개에 허기진 배를 진달래꽃으로 채웠고, 그 꽃으로 누가 더 크게 꽃방망이를 만드는지 내기도 했다. 철에 따라 밀서리, 감자서리, 수박과 참외서리도 했다. 한 여름에는 안락강(安樂江) 섶다리 건너 백사장에서 고무신을 손에 든 채 뛰어다녔고, 싫증나면 수초(水草)하나 없는 강바닥 자갈에 숨어있는 피라미를 손뼉 치며 몰아 피라미구이를, 가을에는 마른 논에 들어가 메뚜기를 잡아 메뚜기구이를, 겨울에는 언 논에서 썰매 타기와 팽이치기, 연 날리기를 했다. 밤이 되면 사랑채에서 청년들이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짰는데, 그 사이에 끼어 앉아 한국전쟁 이야기나 도깨비 · 허깨비 이야기를 들으며 밤을 새웠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잘 어우러져 있다.

설날 세배를 드리고, 차례를 지낸 후에는 친척들이 모두 종가[無忝堂]에 모여 안부를 묻고 음복을 나눴다. 정월 초에는 농악과 함께 집집을 돌면서 지신밟기를 했는데, 집 주인은 돈이나 곡식을 주었다. 이 돈과 곡식을 모아 대보름날 줄다리기 준비를 했다. 이 줄다리기는 흔히 알고 있는 줄다리기와는 다르다. 줄의 지름이 어른 허리둘레만큼 굵고, 줄 머리는 당시 내 키만큼 높았다. 길이도 100미터에 달했다. 줄다리기 때는 양동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 청장년들도 모여 하루 종일 놀았다. 점잖은 선비들과 노인들은 방문을 열고 구경하다가 흥에 겨워 구령에 따라 영차 영차 용을 쓰기도 했다. 보름달이 뜰 즈음에는 남녀 청소년들이 설창산(雪倉山)에 올라 보름달을 향해 절을 하며 소원을 빌었다. 지금도 규모는 작지만 정월보름에 줄다리기 등 민속놀이를 하고 있다.

필자 이지휴(왼쪽) 씨가 방문객에게 마을을 안내하고 있다.

논매기가 끝난 음력 7월쯤 날을 정해 농기구를 씻고 정비를 했는데, 이를 ‘호미씻기’라고 한다. 이날은 그해 가장 농사를 잘 지은 상머슴을 선발해 황소에 거꾸로 태우고 안락강에서 출발해 마을로 들어왔는데, 준비한 음식과 술로 농사의 노고를 위로하며 지주와 머슴들이 허물없이 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나락 타작이 끝나면 비두(比斗, 첨성대의 옛말)만한 뒤주들이 부잣집에 한두 개씩 만들어졌고, 청년들은 밤에 손전등을 들고 처마 밑에 둥지를 틀고 있는 참새를 잡아 옴밥(참새를 곤 국물로 지은 밥)을 만들어 먹었다. 또 겨울이면 장꿩이나, 산토끼를 사냥했다. 토끼 가죽은 추운 겨울에 귀마개를 만들어 쓰곤 했다.

초가집 처마에 메주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농촌마을에서만 간혹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런 전통문화는 아쉽게도 지금에 와서는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양동마을에서는 매년 4월부터 10월까지 격주로 제기 만들기, 주령구(酒令具) 만들기, 연 만들기, 투호놀이, 인절미 만들기, 한과 만들기, 명주실 뽑는 물레 돌리기 등을 경주문화원에서 무료로 시연하고 있다.

양동마을 안쪽 길은 깨끗하고 정비가 잘 돼 있다.

〈천자문〉 가르쳐 준 ‘설미 할배’

내가 열한 살이던 1959년 추석 즈음 발생한 사라호 태풍은 양동마을에 엄청난 재앙을 가져왔다. 개울둑이 터져 마을은 호수가 되었고, 초가집 지붕은 물에 떠다녔다. 물이 빠진 후 등교를 했더니 학교 교실 마룻바닥은 파도모양으로 들떠 있었다. 결국 마을 정자에서 수업을 받았다. 이후 마을에 전염병(장티푸스)이 돌아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 즈음, 할아버지께서 한학을 공부하라는 엄명을 내려 ‘설미 할배’라고 부르던 마을 어른께 〈천자문〉부터 사서삼경까지를 배우게 됐다. 이 할배는 상투를 틀고 있었고, 여름에도 항상 버선이나 양말을 신었다. 마을 바깥 외출은 1년에 서너 번 선산(先山, 조상의 무덤)을 다녀오는 외에는 거의 하지 않던 분이다. 사서삼경에 통달했음은 물론 일어 · 영어 · 러시아어 · 중국어도 구사했다. 사람들은 이 할배에게 세상의 모든 소식을 훤하게 알고 있다고 해서 ‘양동라디오(Radio)’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 할배와 관련해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일제강점기 때 단발령이 내려 일본 순사가 상투를 자르라고 독려할 때 이 할배는 끝까지 버텼다. 어느 날 순사가 또다시 와서 상투를 자르라고 독촉하자, 머슴에게 소여물 써는 작두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런 후 머리를 작두사이에 넣고 “내 머리를 잘라라.”고 했단다. 이 모습을 본 일본 순사는 혼쭐이 나 도망을 갔고, 두 번 다시 상투 자르라고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는 전매국(한국담배인삼공사의 전신)과 세무서에서 엽연초(잎사귀를 자르지 않은 채 말린 담배)와 밀주(密酒) 단속을 자주 왔다. 전매국에서 엽연초 조사를 나왔다는 말을 들으면, 한약재를 자르는 작두로 엽연초를 썰었다. 그리고 할배에게 전매국 사람이 다가오면 “그대는 어디서 오시는가?”하고 물었다. “전매국(專賣局)에서 왔습니다.” 답하면 “그래요, 그 나라는 연초사정이 좋은가? 우리나라는 연초사정이 좋지 않아 이렇게 썰어 피운 다오.”하고 말문을 막아 돌려 돌려보냈다고 한다.

세무서에서는 밀주 단속을 나오면, 술독을 사랑방에 놓아둔 채 세무서 직원을 불러놓고 “요번에 담근 술은 맛이 어떤지 접구(接口, 술잔을 입에 대는 것)나 한 번 해보지요.”하고 건넸다. 직원이 거절을 하면 “어른이 권하는 것은 사양하지 않는 것이 예법이요.”하며 강권을 하여 발길을 붙들었다. 그 덕분에 마을 내 술독 있는 집들은 술독을 숨겨 단속을 피할 수 있었다.

진흙과 돌로 쌓은 담장이 정겹다.

조선 초 이후 손 씨, 이 씨 집성촌으로

우리나라의 집성촌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에 형성되었다. 그 원인은 상속제도에 있다. 임진왜란 전까지 상속제도는 고려시대의 상속제도인 ‘남녀균분상속제도(男女均分相續制度)’였다. 즉 남녀 차별 없이 동일하게 상속을 하고, 제사도 돌아가면서 지냈다. 부인이 상속을 많이 받았거나, 어머니가 많은 농경지를 상속 했을 때, 남편 또는 아들이 농경지 관리를 위해 처가의 동네나 외가 동네에 가서 사는 경우가 흔하다보니 집성촌이 형성되지 않았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형제자매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됐고, 제사도 자식에게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상속제도가 유가(儒家)의 종법제도(宗法制度)로 바뀌게 된다. 이때부터 재산을 장자에게 상속하고, 제사 등 권리와 의무를 장자가 함께 맡게 되면서 집성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여강 이 씨 종택인 무첨당 전경.

양동마을에 손 씨와 이 씨가 정착하게 된 것도 비슷한 경우지만, 시기는 좀더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말 만호(萬戶) 유복하(柳復河)라는 분에게 무남독녀가 있었다. 청송 안덕에서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선생이 혼인 후 처향살이를 하게 됐고, 손소 선생의 둘째 딸과 연일 옥동에 살던 찬성공(贊成公) 이번(李番) 선생이 혼인해 처향살이를 시작한 게 그 시초다.

여강 이 씨 문중 후손을 가르치던 서당인 강학당.

중국 당나라 때 풍현(豊縣) 동남쪽에 주(朱) 씨와 진(陳) 씨가 한 마을에 살면서 서로 상생을 하며 가문의 명예와 자부심을 가지고 경쟁을 했다고 한다. 경쟁이 자극제가 되어 당나라 때 명현(名賢)을 가장 많이 배출했다고 한다. 양동마을 역시 조선 500여 년 동안 손 씨와 이 씨가 함께 살면서 혼인도 맺기도 하고, 마을과 관련된 일을 상의해 화목하게 처리하였다. 반면 가문의 명예나 자부심과 관련해서는 한 치 양보 없이 치열하게 경쟁했다. 양동 인근 마을 사람들이 양동 손 씨와 이 씨는 날마다 싸운다고 말할 정도였다.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무첨당 현판.

그러나 선의의 경쟁을 해온 덕분에 이름난 인물과 문화재와 서책을 많이 남길 수 있었다. 아무리 큰 농촌마을이라도 선비와 노인들이 시를 쓰고 가사를 읽고, 마을의 잡다한 일을 토론하고 쉬는 정자는 한두 채씩 있다. 그러나 양동마을은 경쟁적으로 건축하다 보니 이런 정자가 10여 채나 된다. 아동을 가르치는 서당도 손 씨는 ‘성산제(聖山齊)’, 이 씨는 ‘강학당(講學堂)’이 있다. 조선시대 때 가문의 명예를 빛내는 방법은 과거(科擧)에 응시해 문과에 급제하는 일이었다. 조선시대 경주부는 서쪽으로 청도, 남쪽으로 양산을 경계로 할 만큼 넓었다. 지금 경주시의 두 배를 넘었다. 조선 500년 동안 경주부윤 관내에서 문과 급제자는 총 59명이 배출됐다. 이 중 양동마을 손 씨와 이 씨 양 가문에서 29명이 급제를 했다. 향시(鄕試)인 진사과는 총 87명이 배출됐는데, 두 마을에서 35명이 합격하였다. 가문의 명예와 자부심을 위해 피나는 노력과 경쟁을 한 결과라고 하겠다.

서백당 내에 있는 수령 500년이 넘은 향나무.

공존과 경쟁의 결과,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건축물과 문집도 많이 남겼다. 특히 양동마을에는 임진왜란(1592년) 전에 건축된 가옥이 4채나 있다. 그 중 3채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여주 이 씨의 종택인 무첨당(無忝堂, 보물 411호), 회재 이언적 선생이 경상감사로 있을 때 모친과 동생을 위해 지은 고택 향단(香檀, 보물 412호), 우재 손중돈 선생의 고택인 관가정(觀稼亭, 보물 442호)과 경주 손씨 종택인 서백당(書百堂, 국가중요민속문화재 23호) 등이며, 양민공 손소 선생의 초상화는 보물 1216호로 지정돼 있다.

양동마을 유물전시관 2층에는 중국 원나라 때 인물 진경(陳桱)이 중국고대사부터 남송시대까지 역사를 편찬한 역사서 〈통감속편(通鑑續編, 국보283호)〉, 원나라 마지막 황제 순제 때 법조문인 〈지정조격(至正條格)〉, 조선 초기의 남녀균분상속제도를 살필 수 있는 〈손소선생분재기(孫昭先生分財記)〉가 소장돼 있고, 옥산서원 유물전시관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국보 322-1호)〉, 회재 이언적 선생의 〈구인록(求仁錄)〉,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등 유작(遺作)과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이밖에도 중요민속자료 · 향토문화재 · 기념수 등 24점이 잘 보존되어 있어, 2010년 7월31일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양동마을은 삼남(三南, 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의 3대 길지(吉地) 중 한 곳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따르면 사람 살기에 좋다는 3대 길지는 경주 양동마을, 안동 내앞마을, 풍산 하회마을이다. 이곳은 마을이 번영하고, 뛰어난 인물이 많이 배출된다고 전하고 있다. 안동 하회마을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내앞마을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양동마을은 송재(松齋) 손소(孫昭),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등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해방 후에는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이 있었고, 한국전쟁 때는 안강 · 포항전투의 격전지였다. 이 와중에 폭격 등으로 많은 가옥들이 파괴되었다. 이후 도심 집중화로 많은 주민들이 이 마을을 떠났지만, 아직도 150여 호 480여 채의 한옥에 300여 명이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특히 안강 · 포항전투 때는 마을 초입 방간산 끝자락에서 학도병 700명이 전사한 안타까운 일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위령탑을 세워놓았다.

경주 손 씨 종택인 서백당 전경.

마음의 안식처, 내 고향 양동마을

2000년대 초, 국내 사정을 제대로 모른 채 외국계 회사의 캄보디아 지사를 퇴사하고 귀국했다. 그런데 국내는 IMF 금융위기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귀국을 했지만 갈 곳이 없었다. 가족들에게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건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한 동안 방황을 했고, 우울증도 찾아왔다. 갈 곳 없이 방황하고 있을 때, 문득 어머님이 보고 싶었다.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를 만나러 양동 간이역을 지나 굴다리를 넘어가는데, 발걸음이 너무나 무거웠다. 멀리서 고향집 불빛이 보였다. 혼자 주무시는 어머니를 놀라게 할 수 없어 살며시 들어가 뒷방에 여장을 풀었다. 아침에 놀란 눈으로 보시는 어머님에게 “제가 살던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어머님은 짐작을 하셨는지 말씀이 없었다.

경주 손 씨 문중의 서당인 안락정.

무료한 일상에 설천정 마루에서 들판만 바라보았다. 매미 울음소리, 경운기 소리, 밤이면 은하수가 되는 안강읍의 조명 등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 때 나는 편안하게 쉴 곳이 바로 고향이라는 것을 느꼈다. 오늘도 해질 무렵에 관가정 아래 600여 년 된 은행나무의 벼락 맞은 앙상한 가지에 까치밥처럼 걸려 지는 해를 바라본다.

“친구들아, 어릴 적 포근하였던 엄마 품이 그리우면 고향으로 돌아오라. 고향은 그대가 태어난 근본이 있는 곳이니, 엄마 품같이 돌아오는 그대들을 포근하게 맞아 줄 것이네!”

회재 이언적 선생이 경상감사로 있을 때 모친과 동생을 위해 지은 고택 향단.

이지휴

 현재 양동전문해설사. 1949년 경주 양동마을에서 태어나 1969년 국민은행에 입사했다.
1992년부터 태양무역 캄보디아지사 중역으로 근무했다. 2002년 경북문화관광해설사,
2014년 양동전문해설사가 된 후 양동마을에 대한 글을 영남문학 계간지 등에 연재했다.

글 · 이지휴 사진 · 이강식 기자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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