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분황사지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

경주 구황동 원지ㆍ창녕 계성 고분군도

신라시대 선덕여왕 때 창건된 경주 분황사의 옛 터가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경북 경주 분황사지(芬皇寺址)와 구황동 원지 유적 일원(九黃洞 園池 遺蹟 一圓), 경남 창녕 계성 고분군(桂城 古墳群) 등 유적 3곳을 사적으로 지정했다고 2월 26일 밝혔다.

사적 제548호 경주 분황사지는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의 하나로,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된 ‘분황사’의 옛 터로, 신라 자장(慈藏) 율사와 원효(元曉) 대사가 주석하면서 불법(佛法)을 전파했던 유서 깊은 사찰이다.

1990년부터 2014년까지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분황사는 창건 당시 신라 최초의 품(品)자형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當式) 가람으로 건립됐으며, 이후 3번 중건됐다. 조선 광해군 원년(1609)에 현재의 금당인 보광전을 건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분황사는 황룡사, 흥륜사 등과 함께 통일신라 이전 왕경(경주)에 건립됐던 칠처가람(七處伽藍) 중 한 곳이며,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이 있는 유서깊은 도량이다. 또 장기간의 체계적 발굴을 통해 가람의 배치 양상과 그 변화상뿐만 아니라 경역의 대부분을 규명해 낸 사찰이라서 역사적ㆍ학술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적 제549호 경주 구황동 원지 유적 일원은 경주 황룡사지와 관련한 전시관 건립 부지로 선정돼 1999년 시굴조사를 하던 중 통일신라시대의 석축ㆍ담장ㆍ우물 등의 유적이 발견돼 2004년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한 원지 유적이다.

원지는 중심부에 크고 작은 인공섬 2개가 있고, 그 주위에 입수로와 배수로ㆍ건물지ㆍ담장ㆍ축대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 출토된 여러 유물을 통해 원지의 조성 시기ㆍ변화상ㆍ공간배치 등을 알 수 있어 통일신라시대 조경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구황동 원지는 동궁과 월지, 용강동 원지에 이어 원지의 조성연대ㆍ규모ㆍ내부구조 등을 확인한 세 번째 신라왕경 원지 유적으로 희소 가치가 있다.

구황동 원지 유적 일원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분황사지와 나란히 붙어 있어 한때 분황사에 속한 사원지(寺園池)로 여겨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발굴조사 결과 출토되는 다양한 유물의 시기를 추정하여 볼 때 두 유적은 조성 시기와 형태가 다른 별개의 유적으로 밝혀졌다.

사적 제547호 창녕 계성 고분군은 영축산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린 구릉 사면부에 조성된 261기의 대규모 고분군이다. 고분군의 서북쪽으로는 계성천이 흐르고 있으며, 능선 여러 갈래에 봉분이 있다. 특히 정상부에는 지름 30m가 넘는 대형무덤 5기가 있다.

1917년 고분군의 분포도가 처음 작성된 이후 최근까지 5차례 발굴조사가 이뤄졌으며, 그 결과 5세기에 축조된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인 대형 고총 고분과 6~7세기에 축조된 앞트기식 돌방무덤(횡구식 석실)이 모두 확인됐다. 이러한 축조 양식의 변화는 고분군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며 나타나는데, 이를 통해 창녕 지역에서의 가야의 성립, 발전과 쇠퇴 과정을 추정해볼 수 있다.

이 고분군에서는 뚜껑굽다리접시(유개고배, 有蓋高杯)와 긴목항아리(장경호, 長頸壺), 원통모양그릇받침(통형기대, 筒形器臺) 등 창녕양식의 토기류, 금동관 조각(편), 금제 귀걸이, 은제 허리띠 등의 장신구류와 말띠드리개〔행엽(杏葉)〕, 발걸이〔등자(鐙子)〕, 말안장 꾸미개〔안교(鞍橋) 등의 마구류와 무구류도 다량 출토됐다.

계성 고분군은 고분의 변화 양상과 출토 토기 양식 등을 통해 창녕과 주변 지역의 5~7세기 고대사 연구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유적이다.

경주 분황사지 출토 금속류 유물. <사진제공=문화재청>
경주 구황동 원지 유적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
경주 구황동 원지 출토 금속류 유물. <사진제공=문화재청>
창녕 계성 고분군 3호분 발굴조사 모습.<사진제공=문화재청>
창녕 계성 고분군 1호분 출토 토기. <사진제공=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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