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을 삶 속에서 이루는 종교
부처님 터놓은 물꼬를
더욱 확장시켜 나가자

종교가 가지는 일반 특성들을 갖추고 있으면 그냥 종교다. 그것들이 어떤 특별한 모습을 띨 때 비로소 어떤 종교가 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불교가 불교인 이유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유에 충실한 모습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바로 불교가 불교라고 불리는 지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방법으로 모색을 할 수 있겠지만, 가장 빠르고 분명하게 불교의 특징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부처님의 생애를 살피면서, 불교가 불교로 선 지점을 찾는 일이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부처님께서 알라라 칼라마, 웃다카 라마풋다라는 두 스승의 교단에서 수행을 하고, 또 그 교단을 벗어나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부처님은 그 두 스승 밑에서 최고의 선정 경지에 도달하였고, 두 스승은 부처님에게 함께 교단을 이끌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것을 거절하고 오히려 그 교단에서 나오신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선정삼매 속에서는 괴로움이 없지만, 그것을 벗어나면 여전히 괴로움 속에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언제나 선정삼매 속에서만 살 수는 없는 것이니, 그것은 궁극의 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결국 부처님은 살아가면서도 행복한 궁극의 길, 삶 속에서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서신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큰 깨달음을 통해서 이룩된 종교가 바로 불교인 것이다.

그러니까 불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이 지점이다. 바로 살아가면서 행복할 수 있는 종교, 그 궁극을 삶 속에서 이루는 종교가 바로 불교인 것이다. 이야말로 우리 인류에게 주어진 복된 소식이요, 부처님께서 열어젖히신 가장 중요한 물꼬인 것이다. 불자들은 바로 이 지점을 주목해야 하고, 부처님께서 터놓으신 그 물꼬를 더욱 확장하여 도도한 흐름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의 불교는 어떠한가? 부처님이 떠나오신 그 지점에 머물고 있지 않은가? 물론 부처님은 떠나오셨다고 하여 선정수행의 전통을 버리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계ㆍ정ㆍ혜의 삼학 가운데 정(定)으로 그것들을 수렴하여 독특한 수행체계를 이루어 내셨다. 그렇지만 그것은 여전히 불교의 특성 가운데 올바르게 자리 잡아야 마땅하다. 삼매의 수행이 중요하지만, 그 자체에 몰입해서는 안 될 것이요, 언제나 우리 현실의 삶과 연결되고, 그 속에서 수행이 가능하도록 수없는 방법론을 만들어 내야 한다.

과연 이런 일들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 여전히 명상수행 중심의 불교는 삶과 동떨어져 있는 측면이 많다. 서양에서 불교세가 상당히 높아지고 있어, 앞으로는 불교도 수입불교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하는데, 서양에서도 불교의 명상수행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니 거기서도 우리의 바람은 채워지기 힘들 것 같다.

우리 현실을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수행방법론, 그것을 통해 현실을 역동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종교의 면모를 이룩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이 터놓으신 물꼬를 큰 흐름으로 확장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해야만 불교가 불교인 이유가 보다 확실해지는 것이 아닐까? 우리 불자들의 노력이 더더욱 절실한 곳이 바로 이 지점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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