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손 끝에서 피어나는 마음

친구여, 가까이에 오고 있는가? 겨울은 참 길었다네. 겨울바람은 너무도 가혹했다네. 그리운 사람 더욱 그립고, 외로운 사람 더욱 외로운 이 죽일 놈의 겨울은 도무지 해빙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꽁꽁 얼어붙은 연못에 삐쭉 올라 온 어느 짐승의 허연 뼈가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네.

봄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다고
생살을 에는 바람을 맞으며
강둑에 지는 노을 바라보며
그가 고개를 떨구자
겨울이 그랬다
피하지마
그럭저럭
지나가는 상처라면
그게 상처냐고
골수로 파고드는 아픔이
살아가는 밑천일 거라고

떠나지마
서러운 건 잊고
행복했던 것만 기억하자
내가 좀 심했어
가는 길목을 가로막고서
겨울이 그랬다

- 자작詩 ‘겨울이 그랬다’

하지만, 사방에서 들려오는 자네 소식에 가슴이 떨려 잠 못 들고 있다네. 겨우내 우릴 괴롭힌 동장군도 반격하듯 몰려오는 자네 위력에 무기력해져 뒷걸음질치고 있더군. 섣달 햇살의 가는 모가지에 날선 비수를 들이대며 마지막 잎새의 숨통을 누르던 그 겨울이 보냈던 복면 쓴 자객은 줄행랑칠 태세라네. 행여 못된 동장군의 매운 시샘에 오는 발걸음 멈추지는 말게나. 관심 어린 애정으로 애태우며 어귀에서 기다리는 내가 있으니 자네는 어찌 든든하지 않겠는가?

고맙네. 가난하고 약한 우리는 자네만이 유일한 희망일 뿐이지. 다시는 내 곁을 떠나지 말게나. 다가서면 어느새 더욱 멀어져서 내심 서운하고 서럽기도 하네만, 어쩌겠나 깊은 뜻은 모르겠지만 재회의 기쁨을 배가시키기 위한 자네의 친절한 배려심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오늘은 우리가 지독히 싫어하는 쌀뜨물 같은 황사비가 내렸다네. 숨통 조이는 눈 아픈 비바람이 푸석푸석 먼지내며 뿌려대더군. 때아닌 불청객에 발걸음이 주춤했겠네만 지레짐작 풀이 죽어 용기를 잃지는 말게나. 다시는 남의 땅을 감히 넘보지 못하도록 꽃의 장막을 단단히 펼쳐 놓겠네.

길었던 밤은 끝났어
때마침 앳된 햇살
가지런히 내려오면
비처럼 뜨거운
눈물이 뿌려질 거야
아마도 사랑은
다시 오고 있겠지
이미 중독되어 버린
진저리치게 그리운
들녘 고수의 향처럼

- 자작詩 ‘춘분1’

이제 갓 난 애기 꽃봉오리들이 흙먼지 비바람에 무사했을까? 시름시름 앓고 있지나 않을까? 걱정으로 하얗게 밤을 새웠다네. 그러나 다들 다행히 무사하였네. 뜻 깊은 희망메시지가 아니겠는가? 지나고 나면 아무 일 없듯이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일에도 상처로 자포자기하는 청년에게 억수비 흘레바람 휘몰아쳐도 아름다운 꽃을 활짝 피어내어 세상에 화려함의 극치를 선사하는 꽃봉오리가 큰 위로가 될 것이네.

어여 오게나,
잰걸음으로 어여 오게나!
어여 와서 자네와 함께 사랑 듬뿍 담은 봄 피자 함께 만들어서 메마른 정에 굶주인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로 하세. 얼어붙은 인정을 녹여 봄의 정경을 재료로 만드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봄 피자를 만들어 볼께요
먼저
높푸른 하늘을 얇게 펼쳐 깔고
싱그러운 햇살과
치자향 나는 바람 한 웅큼을
골고루 뿌려 주세요
그 위에 
쑥 캐던 봄처녀의 수줍은 미소를
반달 모양으로 썰어 얹은 후
아지랑이 어리는 설렘을
핑크빛이 나도록 구워 주세요
끝으로
황매화 만발한 섬진강 풍경을
토핑으로 올려서 드셔 보세요
얼마나 맛있을까요?

- 자작詩 ‘봄 피자 만들기’

밑창이 너덜너덜한 신발을 신고 끝도 없이 걸어가야만 했던 겨울, 해져 서늘한 외투를 걸치고 눈물로 버티어내던 그 겨울이 결코 가지 않을 것 같더니 멀리서 꽃구름 타고 달려오는 자네의 향기에 밤을 꼬박 새워 마중을 나가도 나는 그저 기쁨의 눈물을 펑펑 쏟을 것이네.
친구여, 어여 오시게!

- 자네를 갈망하는 벗으로부터

 

공석진

시인. 한국문인협회, 고양문인협회 회원이며, 시와 창작작가회 회장을 지냈다. 시집 <너에게 쓰는 편지>, <정 그리우면>, <나는 시인입니다>, <흐린 날이 난 좋다>, <지금은 너무 늦은 처음이다>와 시화집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등을 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