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친구를 향한 때 묻지 않은 童心

<삽화=배종훈>

고사(固辭)의 마음이 있었지만 얼결에 수락을 하다 보니, 걱정도 되지만 한편으로 설렘도 있다. 나는 문학을 공부한 후 아나운서가 되어 방송을 하고, 때로 글을 쓰고 살아왔다. 하지만 주로 남의 글을 읽는 즐거움이 있었을 뿐 평론을 하거나 분석을 해 본 적은 없다. 또한 불자로 살아왔지만 기회가 닿아 두어 해 동안 새벽잠에서 깨어 서너 번 〈묘법연화경〉과 〈한글 팔만대장경〉을 소리 내어 읽었던 적 외엔 부처님 말씀을 깊이 공부한 적도 없다. 그런데 앞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느낄 수 있는 책을 연속으로 읽어 드리려니 이 또한 걱정이 앞선다. 다만 인간 세상사를 말한 그 어느 책, 어떤 이야기도 부처님 법 아닌 게 없을 것이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겠다.

이번 호에는 생텍쥐페리(1900~1944)의 〈어린 왕자〉를 읽어드리려 한다.

“에계, 그 흔하게 얘기하는 어린왕자?”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듯하다.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래서 오히려 〈어린 왕자〉를 택했다. 그토록 유명한 〈어린 왕자〉지만 아마 읽은 이보다 읽지 못한 이가 훨씬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읽었더라도 학창시절이거나 오래전에 읽었다면, 세상을 살아보며 풍파를 겪은 지금 다시 읽어보면 어떨까 싶어 골라 봤다. 〈어린 왕자〉는 한두 번 읽고는 그 깊은 맛을 음미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서 혹시, 아직 그 책과 인연을 맺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이번 기회에 인연 맺어보시길 바란다.

나는 〈어린 왕자〉를 책으로도 여러 번 읽었지만, 특이하게도 ‘오디오 북’으로 수십 차례 들은 적이 있다. 오래 전부터 작은 산골에 살며 서울에 있는 방송국에 오가는 무료한 출퇴근길에 자동차 안에서 〈어린 왕자〉가 수록된 CD를 두고 듣고, 듣고, 또 들었다. 머리가 나빠서는 아니다. 들을 때마다 느끼는 공감과 감동의 희열 때문이었다. 운전을 하며 혼자 웃기도 하고, 어떤 때는 운전을 하며 혼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뭔가 잊으려고 늘 술을 마신다는 술꾼이 산다는 별의 술꾼 이야기나, 어린 왕자가 사는 별로 짐작되는 ‘소행성 B612호’를 일찍이 발견했던 터키의 천문학자가 국제천문학회에 나가 그 소행성의 발견을 발표했지만 좋은 옷을 입고 가지 않고, 그 나라 민속의상을 입고 간 탓에 소행성 발견 업적을 인정받지 못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매번 가식으로 가득한 우리의 현실을 듣는 것만 같아 웃음이 터지곤 했다. 그리고 여러분도 그렇겠지만, 어렵게 길들여진 친구 여우와 헤어지는 장면에서는 언제나 눈이 침침해짐을 느꼈다. 지금까지도 나는 황금빛 밀밭의 일렁임은 아닌, 단풍든 가을 벌판을 볼 때조차도 여우와 어린왕자가 생각나곤 한다. 어쨌건 그 얇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 한 권을 눈으로 귀로 수십 번 읽고 들었다. 어떤 때는 나만 유난을 떠는 줄로도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우리 부부의 계사(戒師) 스님이자, 인생의 스승이셨던 법정 스님(法頂, 1932~2010)의 수필집 〈무소유〉에는 ‘어린 왕자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가 달린 ‘영혼의 모음(母音)’이란 수필이 수록돼 있다. 스님은 ‘1965년에 처음 접한 그 책이 너무나 좋아, 스무 번도 더 읽었노라.’고 쓰셨다. 그 수필을 쓰신 해가 1971년으로 돼 있으니 그렇다면 그 후 스님께선 어린 왕자를 얼마나 더 여러 차례 읽으셨을까? 그리고 스님은 왜 그토록 여러 번을 읽으셨을까? 그런 공감이 통쾌하기도 했고, 또 스님은 어떤 점이 그토록 좋으셨는지 궁금했다. 스님은 이렇게 쓰셨다.

“너와 마주친 것은 하나의 해후였다. 너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관계의 바탕을 인식할 수 있었고, 세계와 나의 촌수를 헤아리게 되었다.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사물이 보이게 되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게 된 것이다. 너를 통해서 나 자신과 마주친 것이다.”

동시대를 함께 지구별에서 살았다곤 하지만 만날 수도 만난 적도 없었던 30년 인생 선배, 그것도 기독교 중심의 사회에서 산 서양의 ‘생텍쥐페리’의 글을 읽으며 어쩜 스님은 그토록 공감하고 감동해서 수십 번을 읽으셨을까? 작가가 의도하지 않고 쓴 그 마음이 부처님 마음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이 점이 바로 한 번 읽은 독자들도 또 읽어야 하는 이유이며, 오래 전 읽은 독자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이런 점이 궁금해서라도 아직 안 읽은 독자들이 〈어린 왕자〉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지구별에서 만난 여우와 서로 길들여진 어린 왕자가 여우와 작별할 때 나눈 여우의 인사는 이렇다. “그럼 비밀을 가르쳐 줄게. 아주 간단한 거야. 오직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사바(娑婆)의 세상은 온통 숫자의 크기와 규모의 크기와 보이는 것에 대한 집착과 보여주기 위한 경쟁과 보여주지 못함에 대한 안달과 그래서 과시와 과시욕과 과시 경쟁에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삽화=배종훈>

우리 모두 어린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엄마아빠가 세상의 전부였고, 학교 선생님이 전부였고, 형제와 자매가 좋았고, 때 묻고 보잘 것 없는 장난감 하나가 세상의 전부였고, 못난(잘못된 표현이지만) 동네 친구가 그렇게 좋았던, 자신이 살던 동네의 앞뒤 산과 시냇물이 세상의 전부인줄 알고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어른이 된 지금은 아귀다툼의 투쟁에 내몰려 살고 있다. 슬프지 않은가!

그래서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를 써서 비록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은 어린 시절의 다정한 친구, 레옹 베르트(1878~1955)에게 바친다고 했을 것이다.(참고로 작가이자 비행사였던 생텍쥐페리는 프랑스에서 살다가 독일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미국으로 망명했지만, 레옹 베르트는 〈어린 왕자〉가 출간되던 1943년 프랑스에 머물러 있었다. 생텍쥐페리는 이듬해 참전 중에 지중해 상공에서 실종됐다.)

우리는 비록 험한 세상을 살고 있지만, 마음의 한편은 늘 때 묻지 않은 시절로 돌아가고자 갈구(渴求)한다. 그나마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런 본성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에 작은 위안이 되고자 나는 〈어린 왕자〉를 읽어주려 한 것이다. 덧붙이자면 지난해부터 우리 집에서 시작한 〈무소유〉 책 읽기 모임도 연관이 된다. 이 모임은 불자와 이웃 종교인이 함께 모여 〈무소유〉를 읽으며 각자 삶의 이야기를 하는 모임인데, 하루는 어느 회원이 ‘우리, 법정 스님이 그토록 좋아하신 〈어린 왕자〉를 다시 한 번 읽읍시다.’하며 이 책을 십 수 권이나 사들고 참석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흥미삼아 어린 왕자가 자기별에 두고 온 책 속의 ‘장미’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말하고 싶다. 작가의 전 생애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책 속의 그 장미는 작가 생텍쥐페리의 아내나 사랑하는 여인의 상징일 것이다. 전쟁 때문이든, 우편 배송 때문이든 젊은 시절부터 늘 집을 떠나 위험한 비행을 해야 했던 그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은 없는 걸까?’하고 걱정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는 이 장미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녀린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지구를 여행하다가 장미정원의 5,000송이 장미꽃을 발견하고는 엎드려 운다. 그 대목에서 나는 슬픔을 함께 했다.

잃어버린 인간의 본성, 잃어버린 지난날의 순수를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불같은 열정과 순수로 살다 간 생텍쥐페리는 아마도 어른이 되어서도 그 순수와 동심을 잃지 않고 살았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린 왕자〉를 집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샘도 보이지 않는 끝없는 사막에 불시착해서, 고장 난 비행기를 고치며 생사의 기로에서 절망했을 생텍쥐페리가, 스스로를 위안하며 했을 것 같은 어린 왕자의 말을 끝으로 인용한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

이계진

방송인. 고려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후 30년간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제17대, 18대 국회의원. 현재 국방FM 시사프로그램을 진행 중이고, 〈무소유〉 읽기 작은 모임을 주관하고 있다. 저서로 〈아나운서 되기〉, 〈뉴스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딸꾹!〉, 소설 〈솔베이지의 노래〉, 〈바보화가 한인현 이야기〉, 〈이계진이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 〈똥꼬 할아버지와 장미꽃 손자〉, 〈3인 아나운서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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