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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진 바와 사뭇 다른, 호연지기 가득한 하회나의 살던 고향은1(276호)
  • 글 · 김재호 사진 · 이강식 기자
  • 승인 2019.01.21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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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전경. 낙동강이 마을을 휘휘 둘러 흐르고 있다. 하회마을과 부용대를 오가는 배가 마을쪽 백사장에 정박해 있다.

'안동과 하회마을'

그 옛날 안동과 풍산들녘

사실 내 고향은 안동에서 100리 쯤 떨어진 경북 영주다. 하지만 고등학교 3년을 안동에서 유학하였고, 10년이 지난 뒤에 대학생활을 안동에서 다시 시작하였다. 그 후 줄곧 안동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아예 하회마을 입구로 삶터를 옮긴 상태다. 그러고 보니 안동은 비록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내가 살아온 삶 속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제2의 고향이 되어버렸다. 20년을 넘게 이곳에서 강의하고 연구하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어르신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록 ‘안태고향(安胎故鄕)’은 아니지만 고향이 되어버린 셈이다. ‘안태고향’은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고향을 뜻한다. 내가 이 표현을 처음 들은 것은 민속학을 공부하면서 시골 답사를 하던 때인데, 이제는 자연스럽게 입에 익어버렸다.

비록 안태고향은 아니지만 어릴 적 집안 어른들을 통해 안동, 특히 하회마을에 관해 이러저러한 이야기는 많이 듣고 자랐다. 내 기억으로는 이종사촌이 풍산 유씨라 이모부께서 하회마을에 대해 여러 차례 자랑하듯 들려주셨던 것 같다. “고래등 같은 높은 기와지붕이 마을에 즐비하다.”, “풍산 유씨들은 성씨를 말할 때 ‘유’씨가 아니라 ‘류’씨로 표기한다.” 등의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그 당시는 그런가보다 생각하며 어렴풋이 하회마을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곤 했던 기억이 있다. 중학교 가서 우리말 음운법칙 중 하나인 두음(頭音)법칙을 처음 배웠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린 것도 이모부가 해준 이야기였다. ‘류’자를 ‘유’로 발음하고 적는 것이 우리의 음운법칙상 바름에도, 그런 점을 어겨가며 고집스럽게 글자 그대로 풍산 ‘류’씨라고 한다는 사실이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40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말이 생각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한국전통가옥인 기와집과 초가집이 잘 어우러져 있는 하회마을.

아버지께서는 겨울 김장철이 다가와 무를 다듬을 때면, 무 중에서 제일 맛있는 무가 바로 ‘풍산 갯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특히 주먹 쥔 팔뚝을 펴 보이시면서 “무가 크고 아주 맛이 좋아. 최고”라고 하셨다. 흥미롭게도 그 이야기는 나중에 민속학을 공부하면서 하회마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지금은 안동 시내 방향에서 하회마을을 들어가기 위해서 넓은 풍산들녘을 빙 돌아 들어가게 되는데, 풍산들녘은 안동지역에서 가장 넓은 곡창이다.

하회마을 외곽을 빙둘러 조성해 놓은 둘레길.

이와 관련한 내용은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에도 나오는데 “안동사람들은 아주 넓은 곳을 이야기할 때, 흔히 풍산들에 비유하는 언어적 습관이 있다.”는 대목이다. 그런 곡창지대로서의 풍산들녘도 전체적으로 벼농사를 짓기 시작한 역사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의외로 잘 모르고 있다.

하회마을의 흙담. 널판장으로 담의 외벽을 친 후 그 사이에 흙을 짓이겨 넣는 방식으로 쌓아, 일정 폭마다 금이 그어져 있다.

좀 더 이야기를 풀어보면, 일제강점기, 즉 왜정 때만 하더라도 풍산들녘의 많은 부분, 특히 낙동강에서 가까운 곳은 범람으로 인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는 땅이었다. 그런 사정은 당시 조선총독부가 펴낸 지도를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흔치 않은 지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낙동강을 따라 제방이 건설되지 않은 상태여서 여름철 장마가 지면 강이 범람하여 주변이 물에 잠긴 곳이 많았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공부하였듯이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제는 자국 내 부족한 식량을 조선에서 조달하기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한다. 바로 산미증식계획 아래 토지조사사업과 농지개량사업을 실시하게 되는데, 전국의 많은 하천을 비롯하여 풍산지역의 낙동강 제방이 이 시기에 축조되었다. 그 덕에 강 주변의 너른 땅이 서서히 토지로 개간되기 시작했다. 결국 오늘날의 풍산들녘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관광객들이 흙과 돌로 만든 돌담길을 따라 하회마을을 둘러보고 있다.

결국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풍산 갯무’는 풍산들녘이 논으로 개간되기 이전에 생산되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장마의 범람이 우려되어 봄 농사인 벼농사는 하지 못하고, 장마가 다 지나간 뒤에 강변의 기름진 모래땅에서 가을 농사로 무를 키운 것이다. 특히 ‘갯무’라고 하였던 것으로 보아 갯벌과 같은 땅에서 키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표준어로 ‘무’라는 표현은 왠지 어색하다. 내 기억으로 어릴 적 표준어는 ‘무우’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무’로 바뀌었다. 예전 안동 지역에서는 ‘무’라고 하기보다는 ‘무꾸’, ‘무수’, ‘무시’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런지 사투리가 된 이 단어들이 훨씬 더 정감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473호 만송정. 하회마을 북 관광객들이 흙과 돌로 만든 돌담길을 따라 하회마을을 둘러보고 있다. 서쪽 강변을 따라 펼쳐진 넓은 모래 퇴적층에 있는 소나무숲이다.

민속학으로 만난 하회마을

안동과 하회마을을 좀 더 많이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라기보다는 대학교에서 민속학을 공부하면서다. 학과의 특성상 지역 답사를 많이 다니면서 현장을 눈으로 보고, 어른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안동문화를 알게 됐다. 물론 그 전에 구경 삼아 하회마을을 둘러본 적은 있다. 1980년대 후반 친구들과 처음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주차장에서 마을까지 셔틀버스가 운행되고 있지만, 그때는 비포장도로를 한참이나 걸어서 들어갔던 것 같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하회마을은 탈춤이 특히 유명하다. 그런데 그 탈춤이 그냥 사람들이 추고 싶어서 추는 것이 아니라 몇 년마다 마을에서 모시는 신의 신탁(神託)에 의해, 특히 마을의 안녕을 위해서 췄다는 것을 배우고 나서 참으로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보니 비록 탈춤 과정에서 양반들을 조롱하는 내용이 다수 나오긴 하지만, 양반들이 탈춤을 추지 못하게 막지 않고 후원을 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은 탈춤을 추는 사람들이 모두 외지인들이고, 동민들의 합의에 의하거나, 신탁에 의해 탈춤을 추는 것도 아니어서 원래의 생동감이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실제 마을에서 동제(洞祭)를 지내고 탈춤을 추던 광경을 상상하면 정말 장관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 현장을 직접 가보고 싶어 혼자 하회마을을 답사한 적도 있다. 아마 90년대 초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회마을 중앙에 있는 삼신당 당목. 마을의 중앙에 있다.

마을 중앙에 있는 삼신당에도 가보고, 하회의 걸출한 인물이자 〈징비록(懲毖錄)〉의 저자인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 대감의 종가인 충효당과 서애 선생의 형님인 겸암 유운룡 선생의 종가인 양진당 등을 둘러보았다. 요즘은 안내판이 있어서 삼신당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그 때는 안내판이 없어서 찾기가 수월치 않았다. 아마도 삼신당은 마을신을 모신 곳으로, 성스러운 곳이기에 일부러 안내판을 세워놓지 않았던 것 같다. 삼신당 하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다. 고목인 삼신당 당목의 위용도 대단했지만, 삼신당으로 가는 담벼락 사이의 좁은 길과 옛 흙담이 더 정겨웠던 것 같다. 좁은 양쪽 길가의 담벼락을 눈여겨보니, 흙담의 일정 폭마다 금이 그어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금을 통해 예전에 흙담을 어떻게 쌓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널판장으로 담의 외벽을 친 후 그 사이에 흙을 짓이겨 넣는 방식으로 담을 쌓다보니, 널판장 크기마다 금이 생긴 것이다. 하회마을에는 수많은 유교 문화와 문화재급의 건축물이 있지만 나는 그것보다 오히려 삼신당 가는 길가의 흙담이 더 기억에 남는다.

삼신당에 옆에 있는 건물터. 사찰이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확실치 않다. 다만 마을의 중요한 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회의 숨은 자랑과 풍수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회마을의 자랑거리를 한 번 꼽아본다. 하회마을은 풍산 유씨들이 고려말에 풍산면 상리(上里)에서 옮겨와 세거지(世居地)로 성장하였다. 유성룡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곳인 만큼 유적과 유물이 참으로 많다. 관련 자료를 보려면 오늘날 충효당 안뜰에 있는 영모각(永慕閣)으로 가면 된다. 영모각은 박물관인 셈인데 유성룡 선생 종가에서 전해오던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다. 국보 132호인 〈징비록(懲毖錄)〉을 비롯하여, 보물 160호인 류성룡종손가문적(柳成龍宗孫家文籍) 11종 22점과 보물 460호인 류성룡종손가유물(柳成龍宗孫家遺物)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 중에서 소개하고 싶은 유물은 분재기(分財記)다. 이것은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인데, 정확한 명칭은 ‘서애선생모부인곤문기(西厓先生母夫人昆文記)’라고 한다. 서애 선생의 어머니께서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눠주기 위해 작성한 문서이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일종의 상속문서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지금으로부터 400~500년 전인 조선 중기(선조 27년, 1594년)에 남녀 차등 없이 자식들에게 균등하게 상속했다는 점을 이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라고 하면 남녀차별은 물론이고 적서(嫡庶)차별, 신분차별 등이 심했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그런데 이 문서를 보면, 일정 부분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유성룡의 모친은 남편이 세상을 뜨자 집안의 재산을 상속받았고, 나이가 더 들어 임종을 앞두었을 때 자녀들에게 차등 없이 재산을 나눠주었다. 아마도 영의정까지 지낸 유성룡 조차도 이때만큼은 한 집안의 작은 아들로서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상상이다.

400여 년 전 안동은 유교 문화의 전통이 말할 수 없이 강했다. 그 시절에 자식이지만 남녀를 평등하게 대했음을 보여주는 문화재가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또한 신기하다. 이 자료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조선 사회는 어떤 사회였을까?’, ‘조선시대도 전기 ·중기 · 후기에 따라 많이도 다르구나.’, ‘아마 지 역에 따라서 삶과 문화에 많은 차이가 있겠지.’

마지막으로 하회마을의 백미(白眉)라고 할 만한 곳을 소개한다. 그것을 보려면 만송정(萬松亭)을 지나, 낙동강을 건너 옥연정을 들러 부용대에 올라야 한다. 강을 건너려면 배를 타야 하는데, 요즘은 모터배가 있지만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뱃사공이 긴 장대로 강바닥을 짚어 운전하던 배를 타야만 했다.

하회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부용대. ‘부용’은 ‘연꽃’을 뜻한다.

그렇게 강을 건너서 옥연정을 돌아 산길을 조금 걸어 부용대에 오르는데, 가뿐 숨을 몰아쉬고 정상에 오르면, 제일 먼저 사방이 탁 트인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서 현기증이 날 정도의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너머로 가옥들이 옹기종기 들어선 하회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좀 더 시야를 넓게 하면 동북 방향으로 학가산이, 동쪽으로 화산(花山)이 보인다. 하회 사람들은 화산을 ‘꽃뫼’라고 부르고, 마을을 돌아가는 강을 ‘화천(花川)’, 즉 ‘꽃내’라고 부른다. 순우리말로 된 이쁜 이름들이다.

하회마을 주민들이 초가집의 지붕을 교체하고 있다.
오래된 기와에 자생하는 와송.

부용대에 서면 하회마을이 이름 그대로 물돌이 마을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하회의 풍수지리를 이야기할 때 흔히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혹은 수태극(水太極) · 산태극(山太極) 등을 언급하는데, 부용대에 올라보면 그것이 무엇을 두고 표현한 것인지를 단박에 깨달을 수 있다. 수태극(水太極)은 낙동강이 마을을 한 바퀴 돌아나가니 태극의 형상을 띠어 그리 불렸음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산태극(山太極)은 어떨까? 이 대목에서 하회 사람들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동네 주변의 산세 정도를 갖고 산태극을 논하지는 않았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산태극을 이루는 두 극점의 연원은 한반도의 뼈대라 할 수 있는 백두대간 태백산맥에 있다. 거기서 한 줄기 큰 기운이 소백산을 거쳐 학가산을 지나 동네 뒷산인 화산에 이르고, 그 기운은 다시 마을로 흘러들어 삼신당에 모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다른 한 기운은 태백산맥의 줄기를 타고 영천 보현산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거슬러 올라와 부용대에 맺혀 다른 한 태극의 극점을 이룬다고 보았다. 이 거대한 양극(兩極)의 기운이 태극의 형상으로 모여드는 곳이 하회마을이기 때문에 조화롭고, 영화롭고, 평화로울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참으로 스케일이 크다. 그래서인지 부용대에 설 때마다 온 우주를 내 안에 품어내는 우리 조상들의 큰 호연지기를 느끼며 감동하곤 한다.

이번에 소개한 안동과 하회마을이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면, 필자의 의도가 제대로 받아들여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서애 유성룡 선생의 종택인 보물 제414호 충효당(忠孝堂). 이 집은 서애 선생 사후에 후손들이 지었다.

김재호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강사.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전문위원, 경상북도 문화재위원, 안동대학교 대학원 민속학과 BK21플러스사업팀 연구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생태적 삶을 일구는 우리네 농사연장>과 공저 <전통과 조화의 큰 마을 금소>, <전통과 상생의 산촌마을 신전>, <물의 문화와 생명성> 등이 있다.

글 · 김재호 사진 · 이강식 기자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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