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의 새해 소망, 새해 다짐(276호)

어머니는 43세 때 8남매의 막내로 저를 낳으셨어요.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어요. 제가 9살이 되던 해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후 아버지는 밤낮 술로 지새우시다 새해를 맞고 3일이 지나 어머니를 따라가셨죠. 결국 8남매는 할머니의 손에 맡겨졌고, 제 인생도 큰 전환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생업으로만 생각하던 간호사

“여자애가 뭔 공부야, 중학교 졸업하고 집안일하다가 시집이나 가.”

할머니는 틈만 나면 제 처지를 확인시켜 주셨어요. 그 열등감을 이겨내려고 더욱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16살이 되던 해에 고등학교를 반드시 진학하겠다는 오기로 가출을 감행했고, 결국 저는 고등학교 진학을 허락 받아 춘천 고모 댁에서 집안일을 도와주면서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저는 원하던 대학교에 합격했지만, 가정 형편상 전액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전문대학교 간호학과에 입학하게 됐어요. 그렇게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간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어요.

생사를 넘나드는 병원생활은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월급날만 기다리며 의욕 없이 살아가고 있었지요. 그렇게 살던 어느 날, 응급수술 ‘콜’이 울렸고 저는 ‘하필 새벽 두 시일 건 뭐야.’라는 투덜거림과 함께 수술실로 향했습니다. 그런 제 눈앞에 펼쳐진 건 엄청난 양의 피를 콸콸 쏟아내고 있는 산모와 아수라장인 수술실 풍경이었어요. 습관적으로 수술기구를 정리하는 제 두 손은 입사 첫날만큼이나 떨리고 있었어요.

환자의 피는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이 끝날 때까지 수술실 바닥을 흥건히 적셨습니다. 긴박한 순간이 지나고, 환자의 혈압이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왔고, 창백하던 얼굴도 제 색을 찾았죠. 산모는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건강을 회복한 후 수술실을 찾아온 산모의 환한 미소는 제게 간호사로서 살아갈 원동력을 심어주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간호사를 생업으로만 여겼던, 초보 간호사였던 저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새 생명의 경이로움에 빠지다

인생에서 도전이란 두려운 일이지만 분명 자신을 성장시켜줍니다. 수술실 간호사로 10년이 넘는 경력을 쌓아오던 저는 이후 산부인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됩니다. 새 생명의 잉태와 새 생명이 태어나는 그 경이로운 순간을 함께할 수 있다는 건, 앞서 10년 간 수술실에서 생명을 살리며 느꼈던 기쁨과는 또 다른 차원의 기쁨을 주었습니다. 인간이 느끼는 고통 중에 최고의 고통이라고 표현되는 출산의 순간이 지나고, 아이를 마주하는 엄마아빠가 느끼는 감동과 기쁨은 저 또한 겪어보지 않았다면 공감할 수 없었겠지요.

급속한 출산율 저하는 사회적으로 큰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병원 역시 출산율이 매년 낮아지고 있습니다. 저명한 산부인과도 문을 닫거나, 수요가 증가하는 요양병원으로 변경하곤 합니다. 저출산은 불과 30~40년 전만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입니다. 제가 간호대학을 다닐 때만해도 산아억제정책으로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캠페인을 펼치며, 각 가정에 콘돔을 나눠줘 얼굴을 붉혔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하지만 현재는 한가정당 1~2명의 자녀가 당연해졌고, 젊은 부부 중에는 아이를 낳지 않고 사는 경우도 많습니다. 원인은 아이를 낳은 후 여성들의 경력단절, 그리고 감당하기 어려운 양육비 등 아이를 낳아 기르기 힘든 사회적 환경에 있습니다. 저 역시 맞벌이로 두 아이를 키워온 엄마로서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사회경제적 관점이 아니라 개인의 삶을 기준으로 생각해볼 때 육아가 어렵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을까요? 나라를 빼앗겼던 시대에도 생명은 태어났고, 전쟁 중에서도 생명은 태어났습니다.

제 어린 시절, 어머니들은 집안일과 농사를 병행하시며 현대 여성들과 다를 바 없는 바쁜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에는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 남편들의 가사분담, 육아 참여는 꿈도 꾸기 어려웠던 시대였지요. 이에 비해 현재 남편들의 공동육아는 필수가 되어가고 있고, 산후조리원 프로그램 역시도 아빠들의 참여와 교육에 힘쓰고 있습니다. 또한 육아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 자녀 양육하기에 좋은 환경이 되었습니다.

‘엄마의 행복’은 여자만의 특권

그렇지만 여전히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건 부담스런 일입니다. 저 역시 아이를 키울 때 시부모님의 도움을 받았기에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해올 수 있었습니다. 직장을 다니는 엄마다보니 아이들에게 해주지 못한 점과 아이들을 키우며 포기했던 부분 역시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아이의 태동을 느꼈던 순간부터 키우며 느꼈던 행복의 순간들은 제가 포기한 경제적인 가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각자 삶의 가치는 다르겠지만, 엄마로서 겪는 행복은 여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 생각합니다. 행복도 불행도 모두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는 <법구경>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삶이란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행복과 불행으로 나뉩니다. 인생을 득과 실로만 따진다면 결코 진정한 행복에 닿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물질이 주는 행복은 잠시뿐이다. 진정한 행복은 정신이 물질을 지배해야 하고, 본래 깨끗한 인간의 본성을 찾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바로 보고 내가 부처와 같은 존재임을 자각하고 매 순간 깨달음 속에서 살아가려 애쓰라.’

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가르침이라 여겨집니다.

올해는 황금 돼지의 해입니다. 다산과 재물을 상징하는 돼지는 예로부터 길몽으로 좋은 기운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올해는 이 좋은 기운을 받아 출산에 대한 새로운 분위기가 만들어져 ‘부모가 되는’ 진정한 행복을 좀 더 많은 부부가 경험해보길 바라봅니다. 나이가 들면서 나타나는 몸의 변화는 세월의 흔적으로 남았지만, 그 대신 세상을 바라보는 깊이와 나 자신에게 집중하며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올 한해, 무엇에 쫓기듯 정신없이 살기보다는 ‘존재하고 있는 지금’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임을 깨닫게 해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마음수행에 힘써보길 소망합니다.

최미선

천안 삼성미즈산부인과
산후조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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