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전통에만 의존 말고
오늘의 불교문화 일으켜
젊은 불자에 다가가야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한 마리 말에게 물을 먹이는 일의 비유로는 좋지만, 많은 말들을 물 먹이는데는 전혀 쓰일 수 없는 비유이다. 많은 말들에게 물을 먹이려면 아예 말들을 물가에서 놀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부처님의 가르침이 좋다 하더라도 그것이 일상적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접해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억지로 어찌어찌 한 사람에게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그 다음 그 사람이 그 말씀의 귀하고 좋은 점을 알아서 받아들이게 한다는 건 참으로 대책없는 일이다.

그런 관점에서 불교의 포교 현황을 살펴보면 어떨까? 많은 분들이 애를 써서 수많은 포교 방편을 열어 놓았다 할 수 있고, 그렇게 애쓴 분들의 노력에는 참으로 감사를 드린다. 그렇지만 그런 노력들을 펼치는 바탕 자체가 너무 열악하여 그분들의 노력이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우리 불교 포교의 현실이다. 종단 차원의 지원, 그리고 의식있는 지도자 그룹들의 새로운 지평의 개척이 부족하여 정말로 참신하고 효과가 있는 방편들이 매우 부족하다는 점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포교의 궁극적 목표는 불교가 문화로 정착되어 자연스럽게 우리들 삶 속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말들이 아예 물가에서 놀도록 하여 거기 끌고 가는 데 들이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현실의 불교문화는 어떨까? “찬란한 불교문화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현실의 문화가 그 위대한 전통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다면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현실의 불교문화는 그 위대한 전통에 비하면 참으로 부끄럽다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젊은 세대들을 위한 불교문화는 거의 불모지나 마찬가지이다. 불교는 여전히 과거의 전통에만 의존해 있고, 전통 타령만 하고 있다고 매도를 당해도 변명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오늘날의 정신과 예술·문화가 총 집결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오늘날의 절’ 하나쯤은 있어야 되지 않는가? 전통을 녹여 내면서도 오늘의 음악과 연결되어, 젊은 불자들이 삶 속에서 부를 수 있는 불교 노래들은 얼마나 있는가? 불교의 정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젊은이들의 오락이나 게임은 있기나 한가?

얼마 전 특별한 계기로 〈천수경〉을 노래로 부르는 작업을 하였다. 용기를 내어 필자가 새롭게 번역을 하고, 작곡가에게 의뢰를 하여 새로운 곡을 만들었다. 그것을 발표하기 위해 연습을 해 나가는 동안 정말 저절로 집에서 〈천수경〉 노래를 흥얼거리고, 거기서 신심이 우러나는 귀한 체험을 하였다. 조그만 예에 불과하지만 큰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예, 오늘의 불교문화를 일으켜 낼 가능성과 시발점을 느끼게 하는 귀한 예가 아닐까 싶다. 자연스럽게 그 속에서 노닐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게 하는 ‘오늘의 불교문화’ 포교 일선에서 좋은 방편을 개발하기 위해 애썼던 분들의 노력이 그런 불교문화의 성취로 아름답게 회향되도록 불교종단들과 불자들의 힘이 모여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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