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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에 佛母 유성 스님, 마지막 꿈은 세계펜화박물관 건립”
  • 글 · 윤완수 기자
  • 승인 2018.11.29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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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에게나 한 가지 이상의 재능이 있다. 다만 그 재능을 발견했느냐, 하지 못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재능을 일찍 발견한 사람은 재능을 일찍 꽃피우기 마련이다. 김영택(73) 화백은 그림에 대한 재능을 일찌감치 발견해 한평생 그 길을 걸었다. 디자인을 전공해 20대에는 내로라하는 대기업을 다녔고, 이후 20년 간 기업을 경영해 40대에는 세계 톱디자이너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지천명에 이르러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다. 바로 펜화. 그리고 23년 간 한 우물을 파고 있다. 그를 10월 29일 인천 숭의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외모 콤플렉스를 겪던 미술 천재

한국전쟁 직후, 인천 창영초등학교에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데생을 잘 그렸다. 아이는 미술반에 들었다. 전란의 상흔이 가시지 않아 먹고살기조차 어려웠던 시절, 지역 명문 제물포고에 입학한 후에도 미술반 활동을 계속했다. 미술학원 한 번 다니지 않았던 아이는 홍익대에 입학원서를 넣었다.

석고 데생과 구성(構成)으로 실기시험을 치렀다. 자신 있었던 데생은 잘 마쳤는데, 구성 시험 마지막에 물감을 엎지르고 말았다. 그럼에도 홍익대 미술대학(공예과)에 차석으로 입학했다. 소심한 성격과 달리 자존심은 누구보다 강했던 그는 공부든, 미술이든 2등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했다.

“어릴 때부터 정밀묘사를 잘 그렸어요. 중학교 때 펜과 잉크, 물감으로 500환짜리 지폐를 그렸는데, 앞면만 그린 그림 지폐에 사람들이 깜빡 속아 넘어갔어요. 물론 그 일로 아버지한테 크게 혼이 났지만요.

홍익대를 다니던 시절 데생을 하는 김영택.

그 즈음 한옥에서 살았는데, 엄마가 생활하기가 너무 불편해보였어요. 안방 옆에 부엌이 낮게 위치해 있었는데, 작은 상에 밥과 반찬을 담아 안방까지 여러 차례 옮겨야 했어요. 집 구조를 어떻게 바꾸면 엄마가 편해질까 생각하며 건축설계를 독학으로 배웠어요. 공간개념이 좋았는지 평면도를 머릿속에 떠올려 지었다가 헐었다가 했어요.

사진을 배운 것도 이 무렵이에요. 친구 집에 코닥 35미리가 있었는데, 제 것처럼 썼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우리 건축문화재와 외국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깨달았고, 엽서 따위를 수집하기도 했죠.”

미술적 재능을 타고났던 김 화백.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 외모 콤플렉스가 심했다. 반면에 자존감은 하늘을 찌르다보니 자존심 상할 일은 애당초 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미팅한번 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당시에 얼마나 시건방졌는지, 만약에 얼굴까지 반반했으면 꼴사나워서 못 봐줬을 것”이라고 자평했다.

건방질 수 있었던 건 자신감의 표출이었으리라.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대학 졸업한 1972년 제일기획에 입사했다. 이후 대한항공 · 일양약품 · 나라기획에서 아트디렉터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근무했다. 그리고 5년 만에 자신의 회사를 설립했다. 바로 홍인디자인그룹이다. 주로 광고대행과 함께 그래픽디자인을 맡았다. 즉, 기업이나 단체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체계화 · 단일화해 이미지를 제고하는 CIP(Corporate Identity Program)와 제품의 특성을 시각디자인화해 경쟁력을 높이고, 차별화를 꾀하는 브랜드 이미지 통일화 작업인 BIP(Brand Identity Program)를 진행했다.

졸업식에서 부모님과 함께.

하나은행이 투자금융회사였던 1982년, 광고대행과 디자인을 함께 맡아 업계 최하위 매출액을 2년 만에 1위로 끌어올렸다. 에바스 화장품 초창기에 검정색 감마밀 화장품의 BIP를 개발해 매출을 급신장시키기도 했다. 극광 T&C의 봉황 심벌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란 그의 디자인관을 잘 보여준다. 그는 서구적 디자인 기법으로 개발한 서구 스타일의 심벌마크는 한국 기업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해 항상 독창적인 디자인을 창출해냈다.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김 화백.

프랑스에서 펜화를 만나다

뛰어난 디자인은 보기도 좋아야 하지만, 회사 매출에 기여해야 한다. 기업 심벌은 디자인이 아름다워야 하지만, 그 속에는 기업의 특성이 녹아있어야 한다. 디자인과 심벌은 그 위에 단순함과 독창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엄청난 분량의 전문서적을 수집하고, 그 속에 파묻혀 연구에 몰두했던 외골수 집념은 결국 김영택을 세계 정상의 디자이너 반열에 올려놓았다. 1993년 디자인계의 명예의 전당으로 불리는 ‘디자인 앰버서더’ 칭호가 그 증거다.

김 화백은 1993년 국제디자인단체인 ITC로부터 ‘디자인 앰버서더’ 칭호를 받는다.디자인계의 명예의 전당으로 불리는 이 상은그를 세계 정상의 디자이너 반열에 올려놓았다.

‘디자인 앰버서더’는 국제디자인단체인 ITC(International Trademark Center)가 각국의 그래픽디자이너 가운데 수년간 뛰어난 작품을 발표한 최고의 작가에게 수여하는 인증서로, 그해 전 세계에서 57명이 선정됐다. 일간지에서 앞 다퉈 인터뷰 기사를 실었고, 방송국에서 특집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이듬해 벨기에 오스탕드에서 열린 제1회 세계디자인 비엔날레에 초청을 받았다. 그곳에서 또 하나의 운명과 마주한다.

“1994년이었는데, 당시는 외국 나가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죠. 그래서 일주일 정도 일찍 출국해 프랑스로 갔어요. 루브르박물관에서 ‘근대 일러스트의 아버지’로 불리는 귀스타브 도레(1832~1883)가 펜화로 그린 그림성서를 봤는데, 대단했어요. 세느강가 기념품점에서도 펜화 엽서를 팔고 있었어요. 그때 깨달았죠. ‘아, 이것이 내가 갈 길이다.’

유럽의 건축문화재를 그리기 위해 유럽에갔을 때. 폭설 속에서 한 컷.

대학을 졸업하고, 20여 년 간 광고와 디자인 계통에서 일했지만, 항상 저작권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어요. 당시 퍼스널컴퓨터 보급이 시작될 땐데, 손으로 하는 작업은 컴퓨터가 아무리 발달해도 못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기록펜화 장르라면 데생을 잘 그리는 나의 장점을 살릴 수 있겠다는 판단도 했구요.”

지천명(50)의 나이. 잘 나가는 기업을 놓아두고 엉뚱한 분야에 열정을 쏟는 건 누가 봐도 현명한 판단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주저 않고 그 길을 선택했다. 서양 펜화를 보고 인생의 전환점을 삼았지만, 서양의 발달한 펜화 기법을 답습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서양 기법이 몸에 밸까봐 외면했다. 서양 펜화와는 또 다른,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법을 만들고 싶었다.

주말마다 배낭을 메고 전국의 건축문화재를 찾아다녔다. 그러길 수 년. 한눈을 판 게 원인이었을까? 갑작스레 회사가 부도를 맞았다. 출판사를 하던 친구와 어음을 돌려쓴 게 문제가 됐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 그 와중에도 손에서 펜을 놓지 않았다.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에 세워진 몽생미셸(Mont Saint Michel). 10세기 말에 세워진 프랑스 대표 사원이다. 현재도 수도원으로 운영 중이다. 종이에 먹펜, 41×58㎝, 2012

석정 스님께 받은 법명 ‘상천(常泉)’

2002년 초, 통도사를 찾았다. 현암사(출판사)에서 제작한 펜화 달력을 내세워 며칠 머물고자 했다. 종무소에서 서성이는데 삼직 소임을 맡고 있던 태연 스님이 말을 걸어왔다. ‘달력을 주지 스님을 드리고자 한다.’고 했더니, 주지 스님께 안내해줬다. 주지 스님은 절에 두 개 밖에 없는 법사실을 흔쾌히 내줬다.

“저녁예불에 앞서 범종을 칠 때는 일부러 범종각을 찾아갔는데, 큰 울림이 들릴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졌어요. 전국을 돌며 펜화를 그린 지 7년째였는데, 통도사는 제게 남다르게 다가왔어요. 때마침 태연 스님이 내년(2003년) 사찰 달력을 그려줄 수 있겠냐고 하시더군요. 흔쾌히 응했죠. 대학 강의할 때를 제외하고, 그곳에서 1년 반을 머물렀어요.

펜화 작업 사진기를 활용한 건 통도사에 1년여 동안 머물 때다.한 작품을 위해 수백 컷의 사진을 찍는다.

달력 작업을 위해 통도사를 대표하는 문화재인 영산전 팔상도(보물 1041호)를 그리고 있는데, 한 스님이 다가와 ‘저 그림은 당신이 그린 거예요’라고 말씀하세요. 영산전 팔상탱은 1740년 13명의 화승(畵僧)이 합작해 그렸는데, 저의 전생이 그 중 한 분인 유성(有誠) 스님이라고 하시더군요.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게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게 됐죠.”

금강산 보덕암. 종이에 먹펜, 43X60cm, 2008

통도사에 머문 1년 반은 김영택 펜화의 전환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직 펜화에만 몰두하다보니 기법이 진화했다. 또 현장에서만 작업을 하던 이전과 달리 해가 진 후 방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는데, 해법은 사진이었다. 낮에 대상을 구석구석 사진에 담았다가 밤에 사진을 보면서 작업을 했다. 작업시간이 늘어난 만큼 그림은 세밀해졌다. 시간이 지나면 감색(減色)되는 잉크대신 먹물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통도사는 그의 전생에 깊은 불연이 있었던 도량이기도 하지만 현생에 불연을 맺어준 도량이기도 하다. 1년여의 통도사 생활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가 됐고, 통도사 달력이 인기를 끌면서 불교계의 ‘러브콜’을 받게 됐으며, 단청장 석정 스님께 ‘상천(常泉)’이란 법명까지 받았으니 말이다. 지금도 이름 앞에 붙이는 ‘늘샘’이 여기서 따온 호(號)이다.

사실 그는 불교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할 수 있는 청해 무상사(淸海 無上師) 문하에 1994년 입문한 바 있다. 월간잡지 〈지오(GEO)〉를 발행하던 서정권 대표가 건네준 한 권 책이 인연을 맺어줬다. 채식과 오계를 철저히 지켜야 하는 6개월간의 입문과정을 거치며, 정신적으로 크게 성숙해졌다. 이를 계기로 펜화가의 길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됐고, 전생이 ‘화승 유성 스님’이었다는 말도 수긍하게 됐다.

나이 쉰에 잘 나가던 기업을 놓아두고 주말마다 배낭 메고 전국 건축문화재를 찾아다녔다. 풀밭에 앉아 작업을 하고 있는 김 화백.
펜화는 섬세한 작업이다. 20배율 돋보기를 보며 사포로 갈아 1mm 안에 5번의 선을 긋는다.

2004년 첫 전시…지난 7월 첫 해외展

그의 독창적 기법이라 할 수 있는 ‘김영택 원근법’도 통도사에서 토대를 다졌다. 사람의 눈은 사진과 달리 사물의 크기 · 거리 · 비례가 동일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즉, 사람은 자신이 보고자 하는 사물에 초점을 맞춰 크게 본다. 그래서 사람의 시각적 특성을 최대한 살린 도법(圖法)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작품이 해남 미황사다. 대웅전의 배경이 되는 달마산을 15% 정도 확대해 달마산 암봉을 두드러지게 그렸다. 그렇게 세월과 함께 진화한 김영택 펜화의 세계를 처음 공개한 게 2004년 6월이다.

김 화백은 그 만의 독창적인 도법(圖法)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작품이 해남 미황사다.대웅전의 배경이 되는 달마산을 15% 정도 확대해 달마산 암봉을 두드러지게 그렸다. 종이에 먹펜, 36X48cm, 2005.

“인사동 학고재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어요. 3개 층 전관을 빌렸는데, 첫날 아침부터 폭우가 쏟아졌어요. 당연히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죠. 그런데 폭우를 뚫고 한 사람이 찾아왔는데 탤런트 고두심 씨였어요. 그 자리에서 ‘봉암사 일주문’을 구입하시더군요.

며칠 지나 백발에 한복을 입은 도사 같은 분이 작품 안내를 청했는데, 몇몇 작품에서 좋은 기가 뿜어져 나온대요. 고두심 씨가 구입한 작품을 보였더니 ‘좋은 작품에 출연해서 칭찬을 많이 받겠네.’하더군요.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그해 연말 KBS와 MBC에서 연기대상을 수상하셨어요. 마수걸이를 잘 한 덕분인지 첫 전시회 때 작품은 물론 도록 500여 권과 엽서세트 · 포스터까지 완판을 했죠.”

2004년 인사동 학고재에서 열린 첫 전시회 때‘봉암사 일주문’ 작품을 구입했던 탤런트 고두심 씨와 함께.

펜화에 입문한지도 25년. 그동안 300여 점을 작업했다. 긴 세월만큼 연륜도 쌓였다. 어떤 펜촉을 써야 하는지, 어떤 잉크를 사용해야 하는지조차 몰랐던 ‘어수룩한 펜화가’는 가는 펜촉을 구입해 20배율 돋보기를 보며 사포로 갈아 1mm 안에 5번의 선을 긋는다.

그동안 〈펜화로 읽는 한국 문화유산〉, 〈아름다운 우리 문화유산〉 등 두 권의 책도 펴냈고, 서울 예술의전당 미술아카데미에서 제자도 양성했다.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국펜화가협회를 설립해 회원전을 연지도 어느덧 8년째. 지난 7월에는 일본 동경 주일한국대사관 한국문화원에서 첫 해외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 전시회에는 황룡사9층탑 복원도 · 불국사 대석단 · 경복궁 근정전 등 한국의 고건축물과 함께 일본 고건축물 14점 등을 선보였다. 세계 정상의 펜화가 반열에 올랐다고 자부하는 김영택 화백. 그에게 청년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지난 7월 일본 동경 주일한국대사관 한국문화원에서 첫 해외전시회를 열었다. 개막식에서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노력하면 이루어진다.’는 식의 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안 되는 걸 너무 고집스레 밀고가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어요. 저의 경우는 전생의 공덕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사람이 성공을 이룰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되 ‘최선을 다해도 실패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현실에 만족한 상태에서 미래에 대한 꿈을 키우자는 말입니다.

저는 현실에 만족을 잘하는 편입니다. 자주 스스로를 칭찬하고, 합당한 보상도 잘 합니다. 그러면서 미래를 꿈꿨어요. ‘현실은 불행하지만 어쩌고저쩌고’ 이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꿈은 이뤄질 수도 있고,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어요. 현실에 만족하면서 꿈을 좇아야 불행하지 않고, 후회가 남지 않아요. 꿈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현실에 만족하고 살았다면 괜찮은 삶 아닌가요?”

의외의 대답이다. 윤회와 전생을 믿는, 자기 철학 뚜렷한 그 다운 답변이다. 내년 1월 홍릉 수림아트센터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김 화백. 그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제안해온다면 모든 작품을 기증해 ‘세계펜화박물관’을 세우고 싶다고 털어놨다. 젊은 시절 그래픽디자이너로 일가(一家)를 이뤘고, 중년을 넘어 그 위에 펜화라는 꽃을 피운 김영택 화백. 그 결실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2007년부터 2년 간 중앙일보에 ‘펜으로 복원한 한국건축문화재’를 연재했다.그 중 ‘황룡사 9층 목탑 복원도’. 종이에 먹펜, 47.5×66cm, 2016.
김 화백은 최근 작업실을 고향인 인천으로 옮겼다. 숭의동 사무실에서 도록에 사인을 하고 있다. 〈사진=정현선 기자〉

글 · 윤완수 기자  yws37@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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