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편지, 마음을 배달합니다

세상 한복판 서 있는 그대에게

그대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하고 있고 시간 또한 현기증이 날 만큼 급히 흘러간다. 바야흐로 글로벌 자본주의 세상이다. 이 세상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잔인한 정글세상이다. 넋을 놓고 가만히 서 있으면 나 스스로가 세상에게 잡아먹히고 소멸된다.

세상의 모든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헤맨다. 금수저나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건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건 모든 젊은이들은 세상을 향해 도전하듯이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에는 일자리들이 수없이 많은 분야에 걸쳐 얼마든지 있다. 내가 알지 못하고 뚫지 못해서 못 찾고 못 들어가는 것이다. 일자리가 없다고 절망하고, 피시방에서 게임이나 하고, 핸드폰이나 주물럭거리며 환상에 젖어 살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대에게는 ‘젊음’이라는 무한대의 자산이 있다. 어떤 한 가지 일에 그대가 가지고 있는 자산을 투자하여야 한다.

젊음이란 무엇인가. 심장에 푸른 피가 가득 들어 있고, 그것이 두려움 없이 펄럭펄럭 뛰고 있는 것이 젊음이다.

| 시시포스와 프로메테우스

관현악단 지휘자였던 토스카니니는 늘그막에 들어 이렇게 말했다.

“신(神)은 왜 노인인 나를 17세 소년의 피로 괴롭히는가.”

그는 관현악단 지휘를 할 때 악보를 보지 않았다. 이미 외워버렸기 때문이다. 연습을 할 때, 단원들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음에 들 때까지 닦달하고 채근했다. 그의 열정은 언제나 17세 소년의 피처럼 끓고 타올랐던 것이다.

인간은 운명적으로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 일을 하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세상을 위해 해야 한다. 그 일에 신명을 다해야 한다. 인간은 왜 어떤 한 가지 일을 죽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인가.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그리스 신화에 ‘시시포스’라는 신이 있다. 그는 형벌을 받고 있는 신이다. 시시포스는 바위를 굴리고 산정으로 올라가 그것을 정상에 올려놓으라는 형을 받았다. 시시포스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바위를 굴리며 올라가 정상에 올려놓으려 하지만 바위는 그때마다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그는 산 아래로 내려가 다시 굴리며 올라가 정상에 또 올려놓아야 한다. 그렇지만 다시 바위는 굴러 떨어진다. 그 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일을 반복하고 있다.

실존주의자인 알베르 카뮈는 그 신화를 앞세워 인간의 실존을 말했다. 부조리의 영웅, 혹은 신을 멸시하고 자기의 성실성을 믿고 운명에 도전하는 인간의 실존인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라는 신도 형벌을 받고 있는 신이다. 그 신은 인간에게 불과 문명과 예술을 주었다는 죄목으로 제우스에 의해 형벌을 받고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카프카스 산기슭에 쇠사슬로 묶여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독수리들이 그의 간을 뜯어먹고 있다. 그 간은 아무리 뜯어먹어도 신은 영원한 생명체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라난다. 그것은 인간의 문명이 과학과 예술에 의해 영원히 소멸되지 않고 번창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인간은 시시포스와 프로메테우스처럼 살아야 하는 운명을 지고 세상에 태어났다. 이 세상에서 이러저러한 일을 성취했다고 알려진 모든 사람들은 시시포스와 프로메테우스처럼 일생을 산 사람들이다.

나는 ‘사막을 건너가는 늙은 낙타의 눈에 어린 시간의 홀로그램’이란 시를 쓴 적이 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사막을 건너가는 늙은 낙타는, 강이나 바다처럼 너울거리는 신기루가 눈을 어지럽히고 부연 모래바람이 몰아치면, 바위를 굴리고 산정으로 올라가는 시시포스 선생을 생각하네. 눈이 침침하고 다리가 천근이나 되는 듯 무겁고 목이 마르지만, 아직 갈 길이 멀고머네. 흰 옷 입고 코와 입을 수건으로 가린 주인을 등에 태우고 가는 충직한 늙은 낙타는 당장 주저앉아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지고 싶지만 아직은 인내하며 더 가야 하네. 주인은 푸른 숲속의 맑고 차가운 물로 목욕하고 포도주 마시고 집시들과 더불어 달과 춤과 노래를 즐기려고 오아시스를 찾아가네. 늙은 낙타는 거기에 이르지 못하고 사막 한가운데서 뿌리 뽑힌 풀포기처럼 이우러질 때 이우러질지라도 사력을 다해 가야 하네. 그의 전생은 밤낮으로 자판기를 두들겨 시와 소설을 쓴 사람이었을까, 이제 이 사막에서 죽으면 다시 시인 소설가 무당으로 태어날까, 아마도 그럴 것이네. 그때는 다시 시시포스 선생처럼 한 생을 살 것이네. 해는 지평선에 머물러 있고 번한 불그죽죽한 빛만 남았고, 백야가 시작되네.”

| 무화과나무숲 아래 암컷고양이

이 세상에는 도전적으로 살고 있지 않은 것들이 없다. 그대는 모든 꽃들이 도전적으로 핀다는 사실, 물도 도전적으로 흐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는 한 겨울에 나목으로 살다가 봄이 되어 꽃을 피워내는 진달래 매화꽃 개나리꽃 나무들의 생명력을 예찬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식물들은 싹이 나오고 가지와 잎사귀가 자라고 난 다음에 꽃 피고 열매 맺는데, 그들은 마른 나무인 상태에서 먼저 꽃부터 터뜨린 다음 잎사귀를 드러내고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놀랍다.

물은 한사코 밑으로만 스며들 듯이 흐르지만, 흐르지 못하게 막아놓으면 점차 차오른 다음 넘쳐흐른다.

청년인 그대여, 운명에 순응하지 말고 자기 운명을 새로이 개척해가는 도전적인 기질을 가져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절망에 빠지지 말고 늘 도전적으로 살아라. 그러면 어떻게 도전적으로 살 것인가? 고양이에게서 배워라.

바둑무늬 털의 암컷고양이가 어치의 무지갯빛 홀로그램 선명한 날개 죽지를 입에 물고 의기양양하게 어기적거리며 나의 ‘달 긷는 집’ 앞을 지나간다. 무화과나무숲 앞의 길바닥에 납작 엎드려 허공 한 곳을 응시한 채 끈질기게 기다리곤 하던 암컷고양이, 나는 그녀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모른 체하고 피해 다녔다. 무화과나무숲에는 바야흐로 익은 무화과를 따먹으려는 어치들이 시끄럽게 우짖으며 우글거렸다.

나는 안다. 그녀의 참을성 있는 기다림과 치밀한 준비와 집중과 결정적인 순간, 창공으로의 힘찬 도약을.

그녀가 당당하게 물고 가는 무지갯살 어려 있는 검푸른 그 날갯죽지는 아마도 무화과를 따 먹으려고 몰려든 어치들 가운데 하나이리라. 어치를 애도하기보다는 고양이의 성공을 축하해 주어야 한다. 우리의 인생에도 시인이 쓰는 시에도 그게 있다. 끈질긴 준비와 기다림과 인내와 결정적인 순간의 창공 낚아채기, 그것은 치열한 도전인 것이다. 세상은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치열하게 도전한 자의 것이다.

한승원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목선〉이 당선되며 활동을 시작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소설 원효〉, 〈초의〉, 〈다산〉 등 다수의 소설을 쓴 이 시대의 대표 소설가다. 고향 율산마을에서 바다를 시원(始原)으로 한 작품을 써오고 있다. 현대문학상 · 한국문학작가상 · 이상문학상 · 대한민국문학상 · 한국소설문학상 · 한국해양문학상 · 한국불교문학상, 미국 기리야마 환태평양 도서상 · 김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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