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국사 의천 스님 이야기(275호)

의천 스님은 1101년 마흔일곱(법랍 36세)이란 젊은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다비 후 의천 스님의 사리는 오관산 영통사에 모셔졌다.사진은 개성 영통사 경선원 앞에 세워져 있는 대각국사 부도.

백성의 편에서 구상한 화폐 주조

의천 스님은 송나라에 머물 때 불교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의 실물 경제도 유심히 관찰해 고려의 대표적인 화폐인 해동통보(海東通寶)를 유통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당시 송나라의 수도인 개봉을 비롯해 여러 도시와 항구를 방문하면서 사람들이 화폐를 매개로 물건을 매매하는 모습은 그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참으로 신기하구나.”

어느 날 의천 스님이 인파로 북적이는 개봉의 시장거리를 유심히 관찰하며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곁에서 수행하던 제자 수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스님, 무엇을 보셨기에 신기하다고 하십니까?”

수개는 송나라로 밀항할 때 의천 스님을 수행해 배를 탔을 정도로 가장 가까이 시봉했던 제자였다.

“저렇게 물건을 사고팔 때 동전을 주고받으니 얼마나 편리하겠느냐?”

의천 스님 말대로 당시 송나라는 화폐 종류가 다양했고 그 수도 헤아릴 수 없었다. 쌀이나 포목을 화폐 대신 쓰던 고려 출신의 의천 스님이 보기에는 마냥 신기하고 부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 이전 시기의 한반도에 화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원전 957년에 최초의 화폐인 자모전(子母錢)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만큼 그 역사도 오래되었다. 다만 화폐나 금융에 대한 개념이 성숙하기 전이라 정식으로 주조된 화폐는 한시적으로 사용되다 자취를 감춘 반면 쌀 · 곡식 · 포목 등 실물화폐 거래가 오랜 세월 동안 이어졌다.

996년(고려 성종 15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전(鐵錢)인 건원중보(乾元重寶)가 발행되었다. 건원중보의 테두리는 하늘을 상징해 둥글게 만들고 가운데는 땅을 상징해 정사각형 구멍이 뚫린 모양이었다. 그 뒤 고려와 조선시대에 주조된 엽전은 모두 이와 같은 형태를 갖추었다. 건원은 당나라 숙종의 연호인데 그의 재위(756년~762년) 중에 주조된 화폐가 건원중보였다.

고려의 건원중보는 바로 이를 모방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당시 고려가 무슨 이유로 200여 년 전의 당나라 화폐를 모델로 삼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앞면엔 건원중보, 뒷면엔 ‘동국(東國)’이란 글자를 새겨 당나라의 건원중보와는 전혀 다른 화폐임을 부각시켰다. 고려의 건원중보는 철전과 동전 두 가지로 유통되었다고 하나 기존의 실물화폐와 함께 주점이나 음식점에서만 사용되다 자취를 감췄다.

그 후 100여 년이 지나 의천 스님이 송나라에서 화폐가 유통되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스님 말씀처럼 화폐를 사용하면 편리한 점이 많겠습니다.”

수개 또한 송나라 상인들이 물건을 거래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는 의천 스님의 말에 동의했다. 의천 스님이 다시 말했다.

“이 나라의 문물이 앞선 것은 서역과 빈번하게 교류할 뿐만 아니라 저렇게 편리한 거래가 이뤄지는 덕택 아니겠는가?”

“소승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이때 의천 스님은 귀국한 뒤 고려에서도 본격적으로 동전을 찍어내 유통시킬 것을 건의하기로 다짐했다. 비록 수행자이긴 하지만 왕족 출신의 그는 늘 백성의 편익과 나라의 부강을 모색하는 입장이었다.

한편 의천 스님은 송나라에 체류하는 동안 송나라 화엄종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는 그의 구법 여행이 일방적으로 송나라의 선진문물을 견학하고 고승들과 교류하는 것으로 그친 게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항주(杭州)에 있는 혜인원(慧因院)을 중창한 일을 일례로 들 수 있다.

의천 스님이 유학할 무렵, 송나라에는 정원법사 등 화엄종의 대가들이 많았으나 정작 화엄종 사찰이나 교세는 쇠락한 상태였다. 이에 의천 스님은 스승처럼 섬기던 정원법사와 상의해 본래 선종 사찰이던 혜인원에서 화엄대산림(華嚴大山林) 법회를 보름 동안 열게 했다. 이때 송나라 철종 황제와 황태후에게 받은 금은을 모두 처분해 화엄대산림에 참여한 대중들에게 골고루 보시했다. 그리고 대장경 7,500여 권을 혜인원에 기증한 데 이어 고려로 귀국한 뒤에도 금으로 쓴 대화엄경 3본을 보내 기증했다. 또 장경각 및 부속 건물을 세울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혜인원은 선종에서 화엄종 중심 도량으로 바뀌었다. 이후 송나라 사람들은 혜인원이 고려 우세승통의 도움으로 중창된 사찰이란 뜻에서 절 이름을 아예 고려사(高麗寺)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그 뒤 고려사는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쇠락해졌으나 근래에 다시 재건되어 항주를 찾는 한국인 참배객들을 맞고 있다.

해인사 은거 시절

의천 스님이 송나라에서 목격한 뒤 고려에 도입해 정착시키려던 화폐 주조에 대한 이야기는 한동안 진전을 보지 못했다. 천태종 개창과 교장 발간을 위한 일들이 그만큼 분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1092년 가을이었다. 어머니 인예태후가 서경(평양)으로 요양을 갔다가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 부고를 접한 의천 스님은 평양으로 달려가 크게 슬퍼하며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단순히 모친을 여의는 것 이상의 영향을 주었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가장 큰 후원자를 잃은 셈이라 의천 스님의 의욕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심신이 극도로 피폐해진 의천 스님이 궁궐로 들어가 둘째형이며, 당시 국왕이던 선종을 알현했다.

“폐하, 소승은 잠시 짐을 내려놓고 저 남쪽에 있는 해인사로 내려갈까 합니다. 윤허하여 주십시오.”

선종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승통이 갑자기 그 먼 곳으로 가려는 이유가 뭐요?”

“산천에 은거하며 지친 몸과 마음을 쉬고자 할 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이때 선종이 부탁했다.

“나 또한 날이 갈수록 병세가 깊어지는데 승통마저 곁을 떠나면 어쩌란 말이오? 그 뜻을 거둬주시오.”

“송구하옵니다. 부디 옥체를 잘 보전하시어 나라와 백성을 다스려주시길 부처님께 발원합니다.”

의천 스님은 이렇게 사양하며 끝내 해인사행을 고집했다. 그가 해인사에 머무는 동안에도 선종은 여러 번 사람을 보내 개경으로 올라와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그의 답변은 늘 한결같았다.

그런데 선종이 얼마 후 승하했으니 의천 스님은 말할 수 없이 송구스럽고 허망했다.

“아아! 무상한 인생이로다.”

의천 스님은 선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북녘 개경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런 와중에도 해인사에 은거하려는 마음은 떠나지 않았다. 이 무렵 의천 스님은 자신의 심경을 담은 4수의 시를 지었다. 그 중 일부는 이렇다.

부귀영화는 모두 봄꿈과 같은 것

모였다 흩어지고 흥하고 망함이 물거품 같네.

선종이 붕어하자 왕위는 열한 살 된 아들 헌종에게 이어졌다. 한동안 이어지던 형제 계승의 전통이 무너진 데다 새 왕의 나이가 어려 국정이 혼란해졌다. 그런 와중에 헌종도 의천 스님에게 사람을 보내 상경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의천 스님은 어린 조카의 부름에는 더욱 응할 수가 없었다. 상경할 마음도 없었고, 막상 상경하면 본의 아니게 권력다툼에 끼어드는 모양새가 될 텐데 그건 출가수행자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셋째 형인 계림공(鷄林公) 왕휘는 그와 생각이 달랐다. 형제세습으로 이어지던 왕위를 어린 조카에게 빼앗겼다는 억울함이 그를 지배했을 것이다. 결국 헌종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른바 ‘이자의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를 빌미로 계림공은 실권을 쥐었고 곧이어 오매불망하던 왕위를 이어받았다. 역사의 기록은 이렇게 되어 있으나 사실상 왕휘가 정변을 일으켜 헌종을 몰아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훗날 숙종으로 불리게 될 왕휘는 결단력이 있었고, 새 임금치고는 원숙한 나이인 42세에 즉위한 까닭에 나라는 금세 안정을 찾았다. 이런 점에서 고려 숙종과 조선 세조는 여러 모로 닮았다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숙종 또한 선종, 헌종처럼 의천 스님에게 상경할 것을 촉구했다. 처음엔 사람을 보냈으나 여의치 않자 직접 편지를 보내 설득했다.

…… 비록 내가 가지 못하고 누차에 걸쳐 정성을 다해 간청해도 산으로 들어가 은거하려고만 하니 이는 과인이 원하는 바가 아니오. 옛날에 달자(달통한 사람)는 인자하지 않으면 은혜가 아니라 여겨 때로는 세속에 나오고 때로는 속세에서 물러난다 하거니와 바라건대 한번 나와 주면 과인의 뜻에 맞춰 주는 것이오.

이렇게 여러 번 신하들을 보내고 교서를 내려 상경할 것을 요구하자 의천 스님은 “예를 갖춰 두터이 말씀하시니 의리로 보아서도 거절할 수 없겠습니다.”하며 개경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흥왕사 주지로 복귀하여 천태종 개창, 인예태후가 추진하다 귀족들의 반대로 중단했던 국청사 불사 재개, 교장 발간, 그리고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화폐 발행 등의 일로 다시 동분서주했다. 분주히 수많은 일을 벌이고 부지런히 매듭을 지어나갔다.

빛을 본 해동통보

1097년, 의천 스님은 숙종에게 화폐를 만들어 경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뜻의 청주전표(請鑄錢表)라는 글을 올렸다. 송나라 구법 여행 때 다짐했다가 미뤘던 숙제를 그제야 마친 셈이었다. 이 글에서 그는 백성들이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무거운 쌀이나 포목을 운반하는 번거로움과 보관의 문제 등 여러 가지 불편을 지적한 뒤 화폐를 주조해 사용하는 장점들을 일일이 열거했다. 아울러 “당연히 고쳐야 할 것을 고치지 않으면 이는 거문고와 비파가 고르지 않은데도 고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여 화폐를 주조해야 할 당위성을 설득했다.

결단력이 있었던 숙종은 우세승통의 의견에 크게 공감하며 주전도감을 설치하도록 명했다. 주전도감은 화폐를 발행하고 관리하게 하던 기관이었으니 오늘날의 한국은행과 같았는데 그 책임자로는 좌사낭중(左司郎中)으로 있던 문신 윤관(尹瓘)이 임명되었다. 훗날 윤관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족을 정벌해 9성을 설치하는 등 고려의 영토를 넓힌 것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주전도감에서는 5년 동안 치밀한 준비를 한 뒤 1102년 마침내 해동통보 1만 5천관을 주조했다. 해동통보는 처음 재상, 양반(문반, 무반), 군인 등에게 보급되어 유통되었다. 해동통보 외에 삼한중보(三韓重寶), 동국통보(東國通寶), 동국중보(東國重寶), 해동중보(海東重寶) 등도 만들어졌다. 물론 해동 · 삼한 · 동국 등은 모두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용어로, 중국 화폐가 아닌 고려만의 화폐라는 뜻으로 작명한 것이다. 이때는 이미 해동통보를 주조하고 유통시킬 것을 건의했던 의천 국사가 열반한 뒤였다.

해동통보를 봉급으로 받은 사람들이 화폐 유통의 장점을 털어놓았다.

“이렇게 엽전을 주고 쟁기도 사고 호미도 살 수 있다니 참으로 편하고 신기하오.”

“그렇긴 하오. 엽전은 운반하기도 좋고, 쌀처럼 썩거나 바닥에 흘릴 염려도 없으며 오랫동안 보관하기도 편리하니 말이오.”

하지만 화폐의 가치를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이런 쇠붙이가 정말 가치가 있는 것이오? 만약에 상인들이 이 엽전을 안 받아주면 어쩝니까? 무슨 곡식이나 생선처럼 구워 먹을 수도 없고…….”

이런 형편이라 해동통보는 주조된 지 3년이 지나도록 백성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고려 정부는 미곡을 방출하고 주점과 음식점을 열어 백성들이 엽전을 내고 술과 음식을 사먹도록 권장하는 정책까지 폈다. 그런데도 해동통보를 비롯한 화폐들은 얼마 후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문화와 예술이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렀던 고려시대였으나 경제제도는 이처럼 더디게 발전했던 것이다.

열반과 위대한 발자취

해동통보가 유통되기 1년 전인 1101년 음력 10월 초의 일이다. 두어 달 전 병을 얻게 된 의천 스님은 개경 총지사(摠持寺)에 머물며 생애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었다. 어떤 병인지는 기록에 전하지 않지만 자나 깨나 책을 읽는가 하면 후학들을 가르치고 수행과 일에 전념하느라 자신의 건강을 돌아보지 못한 게 원인이었을 것이다.

우세승통이 병석에 누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숙종은 즉시 관리를 보내 문병하게 했으며 명의들로 하여금 정성껏 약을 지어 바치도록 했다. 그럼에도 의천 스님의 병세에 차도가 없을뿐더러 나날이 건강이 악화하자 몸소 총지사로 달려가 문병했다.

“승통, 이게 무슨 일이오? 그동안 너무 무리를 했던 모양이오.”

“송구하옵니다, 폐하!”

“어서 기운을 차리고 일어서야 하오.”

하지만 의천 스님은 고개를 저었다.

“도를 깨닫기 위해 출가한 몸이니 무슨 미련이 있겠습니까? 때가 되면 홀연히 떠나야지요. 하오나 소승, 눈을 감기 전 폐하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숙종이 애통한 표정으로 무슨 부탁인지를 물었다.

“소승 이제까지 수많은 스님들의 책을 읽고 직접 송나라로 건너가 명망 높은 고승들에게 도를 물었습니다. 하오나 신라 때의 원효 스님처럼 덕이 높고 훌륭한 고승은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처럼 원효 스님은 가장 위대한 동방의 성인이지만 그 분을 기리는 비석하나 변변치 않은 게 안타깝습니다. 폐하께서는 부디 원효 스님께 최고의 시호를 내리시고 후학들이 그 덕을 영원토록 기리게 해주십시오.”

“내가 무슨 부탁인들 못 들어주겠소? 하지만 내게도 우세승통에게 부탁이 있다오.”

숙종이 이렇게 운을 떼자 의천 스님이 물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소승이 어찌 폐하의 부탁을 받들 수 있겠습니까?”

“그냥 고개만 끄덕여주면 될 일이오.”

이때 의천 스님은 가만히 숙종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먼 훗날 우세승통이 열반하면 대각국사(大覺國師)란 시호를 내리고자 하니 그 뜻을 받아주시오.”

의천 스님이 희미한 미소를 보이고는 겨우 대답했다.

“폐하, 대각이란 부처님께나 올려야 할 명호입니다. 소승에겐 과분한 이름이니 그 뜻을 거둬주십시오.”

이처럼 의천 스님이 정중히 사양하자 숙종도 더 이상 고집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의천 스님이 부탁한 대로 원효 스님에 대해선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경주 분황사에 원효대사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며칠이 지난 10월 5일, 의천 스님은 마흔일곱(법랍 36세)이란 젊은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비교적 짧은 생애였으나 그가 남긴 발자취는 크고 깊었다. 우세승통 의천 스님이 입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온 나라 백성들이 슬픔에 잠겼다. 이때 숙종은 며칠이나 식음을 전폐한 채 고려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혈육이던 의천 스님의 죽음을 슬퍼했다. 다비를 마친 후 의천 스님의 사리는 오관산 영통사에 모셔졌다. 숙종은 의천 스님이 정중히 사양했던 대각이란 시호를 내려 생전에 세운 위대한 업적을 영원토록 기리게 했다.

곧이어 의천 스님을 추모하는 비석이 여러 사찰에 세워졌는데 화엄종 사찰이던 개성 흥왕사와 영통사, 당시 천태종 사찰이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은 선봉사(경북 칠곡군) 비석들은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이 땅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수많은 고승이 배출되어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고 빛나는 문화유산과 정신적인 가르침을 남겼다. 한국 천태종을 본격적으로 개창하신 대각국사 의천 스님 또한 원효대사, 의상대사와 함께 이 땅의 위대한 선지식으로 오늘날에도 대중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끝)

 

이정범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뒤 우리 역사와 불교인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왔다. 저서로 〈서프라이즈 한국사〉, 〈어린이 삼국유사〉, 〈다큐동화로 만나는 한국 근현대사〉, 〈그대 마음이 부처라네〉, 〈시와 소설로 만나는 원감국사〉, 〈붓다가 된 엿장수〉 등이 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