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과학(275호)
우주의 실체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
지난 호에서는 ‘제2차 마음과 생명 회의’의 일부를 간략하게 소개한 바 있다. 이번 호에서는 1997년 10월 27일부터 5일간 ‘신물리학과 우주론’이란 주제로 인도 다람살라의 달라이라마 공관에서 열린 제6차 ‘마음과 생명 회의’의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회의는 미국과 유럽의 저명한 과학자 여섯 명과 달라이라마, 그리고 두 명의 통역이 참가한 가운데 하루에 8시간씩 빈틈없이 진행되었다.
제6차 회의 선정 위원
핑켈스타인(D. R. Finkelstein) : 조지아공과대학 물리학과 교수
그린스타인(George S. Greenstein) : 애머스트대학 천문학과 교수
피에트 헛(Piet Hut) : 프린스턴 대학원 천체물리학과 교수
뚜 웨이밍(Tu Weiming) : 하버드-옌친 연구소장
아서 자이언스(Arthur Zajonc) : 애머스트대학 물리학과 교수
안톤 차일링거(Anton Zeiliner) :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학 물리학과 교수
‘신물리학과 우주론’ 주제
달라이라마는 회의에 들어가며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하였다.
“대승불교에서는 초기부터 회의적(懷疑的) 자세를 취하라는 것이 기본입장이었습니다. 부처님도 회의적 자세가 더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회의적 자세는 자연히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하게 합니다. 그런 의문들은 명확한 해답을 얻게 되며, 그렇지 못할 때는 연구를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의 사상은 신앙보다는 연구에 더욱 의존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자세가 과학자들과 대화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한편 과학자 측의 인사말 속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서 이 회의의 의미를 더해 주었다.
“서구 과학계가 위대한 성취를 하게 하기 위하여 티베트불교로부터 매우 정교한 사상과 철학적 통찰력을 도입함으로써 현재까지 회피해온 현대물리학의 난해한 과제들에 광명을 불어넣기를 희망해 왔습니다. 우리는 최종적 해결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문제들에 대한 새롭고 신선한 접근법을 찾고자 합니다.”
과학자들 중에는 ‘어떤 건전한 지적 기반 아래 과학자들이 한 종교지도자와 대화할 수 있느냐?’고 의문을 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위의 두 인용문이 그들의 의문에 대해 적절한 답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 인용문은 불교신자나 과학자들에게도 큰 의미를 부여한다. 달라이라마는 ‘마음과 생명 회의’의 초기부터 이번 회의의 주제와 같은 물리과학에 대한 대화를 기다려왔기 때문에 매우 난해한 문제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하고 있다.
이 회의에서 논의된 주제는 ‘양자역학의 실험과 역설(逆說)’, ‘양자(量子) 실상의 철학적 조명’, ‘공간, 시간 및 양자’, ‘공간과 시간의 불교적 관점’, ‘양자 논리와 불교 논리의 만남’, ‘과학적 지식과 인간 경험’, ‘우주의 새 모습’, ‘우주의 기원과 불교인과론’ 등이었다. 이들의 대화 속에는 우리의 흥미를 자극하는 주제들이 많다. 우주의 실체에 대한 대화의 일부를 인용한다.
‘삼천대천세계’에 대한 대화 요지
달라이라마 : 과학자들이 더욱 강력한 망원경을 개발하면 수십억 광년의 먼 거리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150억 광년의 거리에 있는 은하계를 관찰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그 이상의 거리에 있는 은하계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거리가 아무리 멀다고 해도 결국 우주가 유한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교로서는 문제가 생깁니다. 불교의 문헌에 따르면 우주는 무한합니다. 과학계의 빅뱅(Big Bang)설과 견줄 만한 불교의 진동우주발생론(Oscillating Cosmogony)에 따르면 우주는 성장(成長)과 대붕괴(大崩壞)를 반복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주 전체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과정은 모든 우주보다는 하나의 세계 체계(World System)에 해당합니다. 아마도 이와 동류의 개념은 하나의 은하계 또는 하나의 은하계단(Galaxy Cluster), 아니면 우주의 어떤 특정 부분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우주의 어느 부분에서는 하나의 세계 체계가 무너져 내리고, 같은 시간에 다른 부분에서는 다른 세계 체계가 생성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변화가 무한히 반복되지만 그들 사이에 동시성은 없습니다.
그린스타인 : 계속된 창조, 그것은 바로 별의 생성입니다. 우리는 별들이 생성되고 어느 순간 폭발하거나 붕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별들의 생성과 폭발은 달라이라마 성하의 설명과 같이 동시성이 없습니다.
달라이라마 : 저의 말은 하나의 별이나 하나의 항성계(태양계)가 아니고 은하계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삼천대천세계, 즉 10억 개의 항성계가 하나의 세계 체계이므로 하나의 은하계에 비유됩니다. 그들은 서로 같이 생성되고 공존하여 머물다가 같이 무너져 흩어지지만 정확한 동시성은 없습니다. 금강승(Vajrayana) 밀교에서는 하나의 삼천대천세계뿐만 아니라 10억 개의 삼천대천세계 또는 그와 같은 세계의 10억 배의 은하계단이 논의됩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은하계뿐만 아니라 은하계단과 나아가 메가 은하계단(mega galaxy cluster)이 있다고 봅니다.
그린스타인 : 그러면 그것들이 끝없는 진화의 과정에 있다고 봅니까? 거기에 전체적인 시작은 없습니까?
달라이라마 : 정확히 그렇습니다.
차일링거 : 그렇다면 삼천대천세계는 어디서 출현했습니까?
달라이라마 : 허공의 입자들(space particles)입니다.
그린스타인 : 말씀과 같이 허공의 입자로부터 나왔다면 우주가 아니라 은하계입니다.
달라이라마 : 허공 입자들은 이전의 은하계의 잔류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우주’라는 용어는 어느 특정 은하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한한 전체를 의미합니다.
차일링거 : 달라이라마 성하시여, 지금까지 우리는 삼천대천세계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앨런(Alan Wallace, 6차 회의 진행자)의 말에 따르면 그 수효는 생명이 사는 세계의 수라고 하는데 맞습니까? 불교에서는 거기에 실제로 생물이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달라이라마 : 물론 그렇습니다.
차일링거 : 그런 세계가 매우 많겠지요?
앨 런 : 삼천대천세계의 체계에는 중생이 살지 않는 세계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중생이 사는 세계만을 계산한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으로 달라이라마 성하와 서구의 과학자들이 내다보는 삼천대천세계 모습의 일단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준
건국대 명예교수. 전북대 화공과를 나와 서울대 대학원에서 공학박사를 취득했다. 마흔에 불교에 입문, 봉선사 통신강원에 입교해 월운 스님 문하에서 수학하며 불교서울전문강당을 졸업했다. 1983년부터 퇴직 때까지 19년 간 건국대 불교학생회 지도교수를 맡았다. 교수불자연합회장과 참여불교재가연대 총회의장을 역임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