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손끝에서 피어나는 마음(274호)

왕꽃우물 광장 건널목을 지납니다.
9월입니다.
가혹했던 여름 폭염의 흔적은 기억을 잃어버린 듯 하늘 높이 뭉게구름 둥실 띄운 채, 아무렇지도 않게 푸른 하늘 속으로 사라져 버렸네요.

건들건들 부는 가을 건들바람에 살살이 꽃이 흔들리고 있어요.
광장에 들어서자 재즈바이올린 소리가 점점 가까워집니다.
Les Feuilles mortes 枯葉 가을이면 어김없이 들리는 샹송이죠.

“나를 사랑했던 당신, 당신을 사랑했던 나, 그러나 삶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갈라놓아요.”
자크 프레베르의 시에 조세프 코스마가 곡을 붙인 노래로 영어제목으로 Autumn Leaves로 알려져 있죠. 아마 당신도 아는 그 노래.

파스텔톤 분홍셔츠에 무릎 나온 헐렁한 바지를 입은 백인 연주자의 연주가 참 좋습니다. 무심히 지나치기엔 무엇보다 몹시도 애잔하군요.

공연이 끝나고 사람들의 앵콜에 그가 답한 연주는 우리나라 가수 이선희의 ‘인연’입니다.
그는 무슨 인연으로 여기 고양시 꽃우물까지 왔을까요.

가사 내용 중 이런 내용이 있죠.
“고달픈 삶의 길에 당신은 선물인 걸 이 사랑이 녹슬지 않도록 늘 닦아 비출게요.”
문득 인연이란 걸 생각해봅니다.

아픈 인연들만 가득했습니다. 모든 것이 힘들었고, 무기력 속에서 저절로 좋아지리라 기대했던 거품 같은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가깝게는 가족의 인연조차 소중함을 느끼기에 앞서, 내게는 바꿀 수 없는 커다란 상처의 텃밭이기만 했었죠.

그 어느 누구에게도 나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 어느 누구와도 나의 가족사나 지금 살아가는 내 모습을 이야기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나는 고립되어 갑니다. 고립되고 있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안전선을 적당히 그어 놓습니다. 나는 영리하게 외로워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나의 삶 자체는 나의 허상이 만든 마리오네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한다면 당신이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들켜야한다면 그건 당신이고 싶습니다.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어쩌면 까마득하게 잊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에 대한 추억은 너무 짧은 분량이지만 오랜 세월동안 나직한 속삭임으로 따스한 비밀이 되었습니다. 그건 무언가 통할 것 같은 강렬한 동질감과 이끌림 그리고 호감이었습니다.

복학생이었던 당신을 스터디그룹에서 처음 만났죠.
낯가림이 심해 어딘가에 속하는 걸 몹시 쑥스러워하던 나에게 당신의 존재는 과감히 그 스터디 그룹에 참가하도록 했죠.
그 당시 대학생들이 모이면 모임자리에서 누군가는 노래를 불렀고 때로는 돌아가며 노래 부르곤 했었죠.

이 중에 누가 엘비스 프레슬리를 좋아하는 사람 있나요?
나는 손을 들었죠.
왜 좋아해요?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나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좋아요.
진부한 대답을 당돌한 어투로 말했고, 당신은 나를 위해 부르겠다며 엘비스 프레슬리의 ‘Good Luck Charm’을 불렀어요.

당신이 내 고단한 인생에 맑은 기억 한 자락, 그리고 노래제목과도 같이 고단함에 맞설 ‘행운 부적’을 선물했던 순간입니다.
대학 축제 때 내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청했지만 당신은 갈 수 없는 이유를 들어 완곡하게 거절했죠. 그런데 다른 이의 파트너가 되어 춤을 추고 있었어요.
친구가 갑자기 훈련 들어가 친구 대타로 나왔다며 내게 당신 아버님의 유품인 엘피판을 선물했어요. 프랑스 샹송가수인 Patachou의 엘피판. 그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곡 ‘장미빛 인생’이 있었죠.

당신이란 사람에 이끌려 달려가는 나를 당신은 경계하며 걱정했죠.
난 알았어요. 당신이 참으로 선한 사람이란 걸. 그리고 당신 말대로 당신이 잘 살진 않지만 잘 살아왔다는 것을.

기자로 티비 뉴스에 나오는 당신을 오랫동안 보아왔죠.
뉴스는 꼭 당신이 나오는 방송으로 보았습니다.
당신도 나이 들어가고 나도 늙어가고 이제 더 이상 당신은 뉴스에 보이지 않습니다.

고마운 당신.
당신이 장밋빛 인생을 사랑했던 한 여대생을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누군가에게 기억되지 않아도 누군가를 기억하며 가슴 따뜻해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소중한 인연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으로도 좋습니다. 난 괜찮습니다.

고마운 당신, 안녕!
내 생애 이처럼 아름다운 날.

오승희

시인. 숙명여대를 졸업하고, 유도회한문연수원을 수료했다. 육군장교로 정보사령부 중국어통번역장교로 근무했으며, 2013년 〈유심〉 시조부문으로 등단했다. 201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상작가며, 시조집 〈슬픔의 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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