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274호)

“세계가 인정한 무형유산 걸작
‘판소리’ 대중화는 내 평생의 꿈”

개화기 이후 밀려든 서양 문물은 우리에게 ‘전통문화는 촌스럽고, 서양 문화는 멋스럽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교육현장에서도 한국문화보다 서양문화가 우월한 양 가르쳤다. 그렇다보니 전통문화의 맥을 이어오던 ‘소리패’ㆍ‘사당패’는 민중에게 친숙한 존재였을지 몰라도 소중히 지켜나가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진 않았다.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鼓手, 북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 창(唱, 소리)ㆍ아니리(말)ㆍ발림(몸짓)을 섞어 구연(口演)하는 판소리도 천대받은 우리 문화 중 하나다. 조선 후기 등장해 정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 전성기를 이뤘고, 일제강점기에도 나라 잃은 민중의 울분을 달래주었지만, 이후 대중의 외면 속에 명맥만 이어오고 있다. 2003년 유네스코는 이 판소리를 ‘인류무형문화유산(정식명칭,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했다. 우리가 망각하고, 간과했던 판소리의 진정한 가치를 국내보다 오히려 해외에서 인정한 셈이다.

201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보유자가 된 신영희(申英姬, 76) 명창은 판소리의 대중화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는 1988년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쓰리랑 부부’에 출연, ‘판소리는 고리타분하다’는 인식을 깨트린 바 있다. 8월 13일 서울 방이동 자택을 찾아 그녀의 소리인생 70년을 들어봤다.

춘향가를 부르고 있는 신영희 명창.

| 소리꾼이 되고픈 열 살 소녀

전란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2년 전남 진도. 책보를 둘러맨 열 살 소녀가 학교를 마치고 집 마당에 들어서는데 방안에서 흥보가 興甫歌 한가락이 흘러나왔다. 판소리 명창인 부친이 누군가를 가르치고 있었다. 평소 자신에게는 소리를 가르쳐주지 않던 부친, 버릇없이 벌컥 방문을 열고 들어가 고함을 내질렀다. “어른이 되어 가지고 소리를 그것 밖에 못해요?”

“아버지에게 소리를 배우던 이는 제 친구의 부친이 되는 안득윤 安得潤 선생이었어요. 버릇없는 행동이었지만, 평소 잘 알던 사이였고, 조그만 애가 문 앞에 서서 그런 소리를 하니 어이도 없었겠지요. 그분이 ‘그럼, 네가 한번 불러 보거라.’ 하시더군요. 책보를 팽개치고, 보란 듯이 흥보가를 이어받아 소리를 내질렀어요.

아버지는 판소리가 험난한 길임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딸에게만은 소리를 가르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피는 못 속인다고 제가 그런 행동을 보였던 거죠.”

땅이 비옥해 ‘옥도 玉島’로 불렸던 진도는 조선시대 이름난 귀양지였다. 당쟁에서 밀려나 유배를 온 사림 士林들은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고, 그들이 뿌린 학문과 예술은 이곳에서 꽃을 피웠다. 진도가 남도 판소리의 큰 맥을 잇는 연유다. 그래서 진도에는 애 · 어른 가리지 않고 소리를 못하는 사람이 없다. 어린 신영희도 진도아리랑과 강강술래를 즐겨 불렀다. 하지만 부친은 오빠와 남동생에겐 국악을 가르치면서, 소리를 곧잘 하던 그녀는 멀리했다. 여자 소리꾼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그 길이 얼마나 지난 至難한 길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친 신치선 申致先(1899~1959) 선생은 어전에서 판소리를 해 감찰벼슬을 했던, 동편제의 명창 송만갑 宋萬甲(1865~1939) 선생의 맥을 이은 명인이다. 스승 김정문 金正文(1887~1935)과 함께 당시 관립극장인 협률사 協律社에서 활동하다 마흔에 낙향, 후학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 사건 후 부친은 딸을 제대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스승에게 배운 ‘수궁가’ 중 ‘토끼 배 가르는 대목~뒤풀이’, ‘흥보가’ 중 ‘박타령’, ‘심청가’ 중 ‘초앞부터 심청이 물에 빠지는 대목’, ‘춘향가’ 중 ‘초앞~옥중상봉’을 딸에게 가르쳤다.

열 살 소녀는 마른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소리 실력이 늘어갔다. 자식의 남다른 재능에 부친은 지음知音이 찾아올 때면 잠든 딸을 깨워 소리를 시키곤 했다. 몇 십리 떨어진 마을까지도 데리고 다녔다. 그러던 차에 가족은 목포로 이사를 했다.

당시 목포는 당대의 명창들이 번갈아 머물던 예향 藝鄕이다. 신영희는 3년 간 박동실 朴東實(1897~1968) 선생을 사사한 안기선 安基先 선생에게 ‘적벽가’ 일부와 ‘춘향가’ 중 ‘어사분발~박석티’를 배웠다. 소리 욕심에 새벽 4시면 일어나 유달산에 올라 정자인 유선각 아래 작은 굴에서 소리를 했다. 아침 먹고 올라가 저녁밥 먹을 때가 되어 내려왔다. 하루 종일 소리만 하는 나날이었다.

1980년 4월 발생한 강원도 ‘사북 사건’을 모티프로, 80년대 초 무대에 올린 연극 ‘쥬라기의 사람들’의 한 장면. 상대역은 배우 이주실(74) 씨<위>. 1986년 2월 서울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연한 창극 ‘사랑보쌈(원제-장끼전)’의 한 장면. 장끼로 분한 신영희 선생의 표정이 재미있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제22회 백상예술대상 연기부문 특별상을 수상한다<아래>.

| 인분을 먹고 목소리를 되찾다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소리를 했다. 녹음기가 없던 시절이라 종이에 가사[辭說]를 적어 연습했는데, 제대로 하지 못하면 진도를 나갈 수 없었다. 그날 배운 소리공부를 그날 체득하겠다는 욕심이 화를 불렀다.

“14살로 기억해요. ‘억’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거예요. 거의 1년을 고생했어요. 식초에 계란 흰자를 섞어먹는 등 여러 방법을 써봤지만 낫질 않았어요. 결국 6개월 정도 인분거른 물을 마셨어요.

인분은 정말 어혈을 풀어주는데 효과가 있어요. 아무렇게나 마시는 건 아니고, 병이나 대나무 마디를 벼나 솔잎으로 막은 다음, 막대기에 매달아 재래식 변소에 박아 넣으면 맑은 물이 담기는데 그걸 마시죠. 1년쯤 되어 제 목소리를 찾을 수 있었어요.”

큰 고비를 넘긴 후 장월중선 張月中仙(1925~1998) 선생에게 박동실 계통의 ‘춘향가’ 일부와 ‘유관순전’을 배웠다. 이 스승은 창극 · 범패 · 민속춤까지 두루 능했는데, 창극과 무용을 배운 것도 이 무렵이다. 최일환 선생은 가야금병창과 ‘안중근 열사가’, ‘이준 열사가’를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배움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스승 김소희 선생은 1995년 세상을 떠났다.2주기가 되는 1997년 4월 스승의 고향인 전북 고창에서 열린 추모 2주기 기념행사를 마친 후 유족과 제자들과 함께.
1981년 국창 송만갑 선생의 생가인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 길목에 추모비가 세워졌다.원로국악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비 제막식을 봉행한 후 김소희 선생과 함께 축하공연을 가졌다.

열일곱에 지병이 있던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사실 부친이 후학을 가르쳤지만, 학채 學債를 제대로 내는 제자는 드물었다. 그렇다보니 가계家計는 모친이 홍주를 내려 네 식구를 거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마저 자리에 눕고 말았다. 결국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소녀가장이 됐다. 고등학생인 오빠와 초등학생인 남동생의 학비, 모친의 약값과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꿈을 놓지 않은 덕분에, 목포KBS와 전속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20대에 들어서도 여러 스승을 모셨다. 박봉술 朴鳳述(1922~1989) 선생에게 ‘적벽가’ 일부와 ‘이준 열사가’, 강도근 姜道根(1918~1996) 선생에게 ‘흥보가’와 ‘적벽가’ 두 바탕, ‘춘향가’ 중 ‘초앞~오리정 이별’, 김준섭 金俊燮(1913~1968) 선생에게 ‘수궁가’, 김상용 金相用 선생에게 ‘수궁가’와 ‘춘향가’ 두 바탕, ‘심청가’ 중 ‘초앞~황성 가는 대목’을 배웠다. 그렇다면 끝없는 배움 속에서 동일한 마당을 여러 스승에게 배운 그녀의 유파는 어디라고 해야 할까?

“판소리에서 ‘○○제’할 때 ‘제 制’는 사람 이름 뒤에 붙여 명창의 소리 형태를 말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동편제 · 서편제 · 중고제처럼 소리의 유파를 말해요. 초기에는 이름난 소리꾼의 출신지역이나 계보를 기준으로 구분했는데, 여러 스승에게 배우다보니 지역보다는 소리의 형식으로 구분하게 됐어요. 동편제는 힘 있는 소리, 서편제는 여성적이고 애절한 소리라는 식이죠.

제가 스승으로 모신 김소희 선생님의 소리는 ‘만정제 晚汀制’라고 불러요. 스승님 호가 ‘만정’인데, 송만갑 · 박동실 · 정정렬 선생을 사사하며 좋은 소리만 따와서 만들었어요. 여기에 입을 대는 사람도 있지만, 특정한 유파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춘향가를 부른다면 슬픔을 표현할 때는 서편제 소리를 내고, 힘 있는 부분을 부를 때는 동편제 소리를 내야 해요. 가사[辭說]에 따라 소리 형태가 달라져야 관객에게 감동을 줄 수 있지 않겠어요?”

| 김소희를 만나 만정제를 잇다

김소희 金素姬(1917~1995) 선생과 인연을 맺은 건 1974년이다. 공연 소식을 듣고 목포 중앙극장을 찾아갔는데, 무대에서 단가 短歌를 부르던 선생이 제대로 부르질 못했다. 감기가 심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집이 가까웠는데 모셔와 세발낙지로 상을 차려드렸다. 온돌방에서 한숨 주무시고 나더니 몸이 좋아져 공연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서울로 올라간 김소희 선생은 ‘상경해서 소리를 할 생각이 없느냐?’고 전화로 물어왔다. 목포에서 제자를 가르칠 땐데, 고향을 떠난다는 두려움에 1년을 망설였다. 얼마 후 백양사에 내려오셨다는 연락을 받고, 광주의 한 식당에서 다시 만나 소리 한가락을 들려드렸는데, 그날 이후 상경하라는 성화가 더욱 거세졌다.

결국 1975년 3월에 상경해 스승의 집에 새 둥지를 틀었다. 김소희 선생은 1964년 만정제 ‘춘향가’로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에 올라 있었는데, 상경한 그해 스승의 뒤를 잇는 전수장학생이 됐다. 이듬해부터 국립창극단에 입단해 창극을 활동했고, 1977년에는 남원춘향제에 나가 명창부 대상을 수상했다. 그렇게 한 걸음씩 만정제 소리를 익히며 영역을 넓혀갔다.

1979년부터는 연극을 병행했다. 침체된 국악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까싶어서다. 10대 때 장월중선 선생으로부터 창극을 배운 바 있어 연극은 낯설지 않았다. ‘진도 다시래기’ · ‘태’ · ‘불의 나라’ · ‘춘풍의 처’ · ‘무녀도’ · ‘쥬라기의 사람들’ · ‘국밥’ 등 10여 편에 출연했다. 1986년 ‘사랑보쌈’으로 제22회 백상예술대상 연기부문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연극을 하며 얼굴을 알린 덕분일까? 1987년 어느 날, KBS의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출연제의를 해왔다.

“당시 ‘쇼 비디오 자키’라는 프로그램에서 김한국 · 김미화 씨가 ‘아리랑남매’라는 코너를 하고 있었는데, 인기를 끌지 못했어요. 그 코너를 ‘쓰리랑 부부’로 바꾸면서 저를 감초역할로 불렀던 거죠.

처음엔 제의를 받고 망설였어요. 그렇게 입담이 좋지도 않았을 뿐더러 ‘전통음악을 하는 사람이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해 국악의 격을 떨어뜨렸다.’는 비판을 들을까 두렵기도 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번 기회에 ‘국악은 따분하다’는 편견을 깰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지인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니 이구동성으로 하라고 해요. ‘국악계 안에서만 판소리가 좋다고 말하면 누가 알아주느냐’면서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용기를 냈지요.”

| 말 많고 탈 많았던 ‘쓰리랑 부부’

아니나 다를까? 국악계는 물론 관련 공무원까지 ‘판소리 전수자가 코미디프로그램에 나오면 되겠느냐?’고 질책을 쏟아냈다. 당시만 해도 ‘코미디 프로그램은 저속하다’는 지적이 쏟아질 때였다. 김소희 선생도 ‘그만하면 안 되냐?’고 몇 번이나 만류했다. 그럴 때마다 ‘아무리 좋은 보석도 보석함에만 넣어두면 빛을 발하지 못한다. 국악을 대중화 시키려면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야 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쓰리랑 부부’의 인기가 치솟을수록 질책은 잦아들었고, 국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높아졌다. 북을 치며 추임새 넣길 2년여, 판소리는 대중 곁에 성큼 다가섰다. 그리고 1993년 개봉한 영화 ‘서편제’는 우리나라 영화사상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판소리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KBS ‘쇼 비디오 자키’의 한 코너였던 ‘쓰리랑 부부’는 시청률 60%를 넘나드는 인기절정의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영상 캡처.

 

하지만 영화의 인기가 줄어들며, 판소리 인기도 거품처럼 사그라들었다. 방송에서도 국악과 판소리는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다. 특집방송이 편성되면 밀려나는 1순위 프로그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게 홀대 받는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차라리 콩나물 장사나 할까?’ 생각했다.

소리가 좋아 한눈팔지 않고 평생 한 길을 걸었는데, 대중의 관심이 낮아졌다고 애정이 식을 리는 만무하다. 오히려 그녀는 산간 오지마을 등 문화 사각지대를 찾아다니며 판소리 공연을 펼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40여 년 째 이어오는 교도소 · 양로원 공연으로 대신하고 있다.

“1976년부터 교도소와 구치소, 양로원 등을 다니며 공연과 봉사활동을 하고 있어요. 일 년에 두세 번 정도 짬을 내는데, 제자들과 국악 하는 지인들이 함께해요. 이 지역(송파구)에서도 ‘사람’이란 단체이름으로 봉사활동을 하는데, 9월 1일 양로원으로 자장면 봉사를 갈 예정입니다. 보통 판소리에 가야금병창을 곁들여 공연을 하는데, 좋아해주셔서 위로하러 갔다가 위로를 받고 오곤 하죠.

판소리는 외국인들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요즘 ‘퓨전국악’도 있지만, 외국인들은 전통국악을 더 선호합니다. 가끔, 스승님 생전에 유럽 · 미국· 일본 등 해외 순회공연을 갔을 때가 떠올라요. 특히 독일 공연 때의 함성소리와 기립박수는 지금도 눈에 선해요. 유네스코가 2003년에 판소리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한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소멸 위기에 처한 우리 문화유산의 진가를 파악했기 때문이겠죠.”

2007년 8월 세실극장에서 막을 올린 연극 ‘국밥’의 리허설 장면.
2013년 3월 신영희 선생은 스승 김소희의 뒤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보유자가 된다.인증서를 받은 후 당시 변영섭 문화재청장(신영희 선생 좌측), 제자들과 함께.

 

| 판소리 전승, 그 험난한 여정

열 살에 판소리에 입문한 신영희 명창은 당대의 소리꾼을 두루 사사한 후 서른 중반에 김소희 선생을 만났다. 그리고 생전에 20년 돌아가시고 23년째 만정제 판소리를 전승해오고 있다. 2013년 스승의 뒤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보유자에 오르며 그녀의 어깨는 한층 무거워졌다.

그 와중에 불연 佛緣도 맺었다. 서울 소격동에서 김소희 선생과 살 때 삼청동 칠보사까지 약수를 길러 다녔다. 그 인연으로 초등학교를 다니던 딸이 석주 스님께 붓글씨를 배웠다. 스승이 돌아가신 후 위패도 칠보사에 모셨는데, 3년 전에 스승의 고향인 고창 선운사로 옮겼다. 서우담 교림출판사 사장과 인연이 닿아 탄허 스님을 찾아뵀을 때는 ‘무현 無絃’이란 호를 받았다. 도연명의 ‘무현금’을 떠올리게 하는 과분한 이름이라 고이 간직만 하고 있다.

바쁘게 살다보니 제대로 된 신행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그녀. 대신 20년 전쯤 제자들과 진도에 갔을 때 발견한 돌부처님을 집안에 모셔두고 있다. 고동을 주울까하고 바닷가에 나갔는데, 물속에 무언가 반짝거렸다. 꺼내보니 손바닥 크기의 검은 돌 가운데 흰색으로 부처님 좌상 모양이 선명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지금도 거실에 모셔놓고 조석으로 합장을 올린다.

다시 태어난다면 사내로 태어나 남자소리를 하고 싶다는 신영희 명창. 그녀는 ‘요즘 판소리를 배우는 젊은이들이 자질에 비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한다. 예전엔 ‘이 길이 내 길이다.’, ‘판소리는 내 전부다.’하고 온 힘을 쏟아 부었는데, 요즘은 그런 제자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단다.

현재 전승되는 판소리는 열두 마당 중 다섯 마당에 불과하다. 이중 ‘춘향가’는 부부유별 夫婦有別, ‘심청가’는 부자유친 父子有親, ‘흥보가’는 장유유서 長幼有序, ‘수궁가’는 군신유의 君臣有義, ‘적벽가’는 붕우유신 朋友有信 등 오륜 五倫의 덕목을 담고 있다. 이런 내용을 제대로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다섯 마당을 곱씹어 즐기면 세상살이에 큰 자양분이 될 텐데, 젊은 세대들은 좀체 눈길을 주지 않는다.

판소리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선정된 지 15년. 그동안 문화재 당국의 인식도, 국민들의 관심도 별반 바뀐 건 없다. 사람들이 외면한다고 문화유산 전승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 그녀는 ‘창 唱은 상것이나 하는 소리’란 삐뚤어진 시각에 맞서 평생을 국악에 헌신한 스승의 길을 묵묵히 따를 뿐이다.

한국문화재재단이 ‘판소리로 듣는 우리의 고전문학’을 주제로 진행한‘2015년 득음 - 득음지설(得音知說)’ 공연에서 신영희 선생이 ‘춘향가’를 공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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