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국사 의천 스님 이야기(274호)

의천 스님의 가사. 고려 선종 4년에 왕이 하사했다고 전한다. 긴 사각형의 비단 바탕에 금실로 글자와 무늬를 가득 짜 넣었다.

목판 인쇄, 대장경으로 빛나다

의천 스님이 한국불교사에 남긴 업적은 여러 가지이다. 그 중에서 첫 손에 꼽을 수 있는 업적은 이 땅에 천태종을 창종한 점과 함께 교장 敎藏의 결집을 들 수 있다. 교장은 기존 대장경을 구성하는 경율론 삼장에 장소 章疏, 다시 말해 주석서들을 집대성해 만든 하나의 장[一藏]을 가리킨다.

알려져 있듯이 고려시대에는 두 차례 대장경 판각이 있었다. 모두 외침에 대응해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불력 佛力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도에서 판각불사를 하게 되었다.

1010년 11월, 거란의 임금 성종이 무려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역사에는 이 사건을 거란의 제2차 침입이라고 부른다.

“강조 康兆라는 자가 정변을 일으켜 너희 임금(목종)을 시해하고 멋대로 새 임금을 세웠으니 이는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 그래서 짐은 강조를 벌하기 위해 몸소 내려온 것이다.”

성종은 고려에서 일어난 유혈 정변을 핑계 삼아 강조를 벌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거란의 국력을 안팎으로 과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때 강조가 일으킨 쿠데타 덕분에 새 임금이 된 현종은 거란의 대군을 피해 급히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비록 국왕이 피신했지만 고려군과 의병들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거란군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을 무렵, 강화회담이 열렸다. 그리고 명분도 서지 않는 전쟁을 일으켜 고려군 3만 명을 전사시키고, 자국의 군사 수천 명을 잃은 거란의 성종은 결국 퇴각했다.

상처뿐인 전쟁이 끝난 뒤 고려의 지배층은 거란의 침략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국력을 회복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때 현종이 내놓은 민심수습 방안이 바로 대장경 판각이었다.

어느 날 현종이 대신들에게 물었다.

“송나라는 대장경을 판각하여 국력을 하나로 결집시켰다던데 고려에서도 대장경을 판각하는 게 어떻겠소?”

이 말에 대신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폐하, 왕실을 지키고 흩어진 민심을 수습할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고려 조정은 그때부터 준비를 마치고 이듬해인 1011년부터 대장경 판각을 시작했다.

훗날 몽골의 침략 때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조정도 이 초조대장경을 판각한 사례를 들어 다시 대장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게 된다. 이때 이규보가 쓴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는 거란의 2차 침략을 당해 현종 임금이 남쪽으로 피난했고, 거란군은 송악성을 장악했는데 그때 대장경(초조대장경)을 판각해 완성하기로 고려의 군신이 맹세하자 거란군이 스스로 물러갔으니 이런 사실을 거울삼아 재조대장경을 만들자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초조대장경을 판각하기로 했기 때문에 거란군이 스스로 물러났다는 주장은 역사적인 사실과 다르다. 후방을 지키던 고려군의 급습을 받을 경우, 거란군이 퇴로를 잃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후퇴를 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고려 때 두 차례나 판각된 대장경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완성된 대장경(초조대장경)’, ‘서체가 가장 아름답고 내용이 완벽한 대장경(재조대장경, 해인사 소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에게 자부심을 갖게 해주고 있다.

초조대장경도 재조대장경도 한지에 경의 내용을 써 경판에 뒤집어 붙여 각수들이 혼신을 다해 판각했다. 이렇게 목판에 대장경을 판각함에 따라 스님들과 지식인들은 이전에 일일이 필사하여 한 권의 책을 만들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르고 정확하게 불경을 제작하고 소장할 수 있게 되었다. 목판대장경 제작으로 인쇄와 출판의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오랜 교장 결집의 꿈

석가모니 부처님 열반 후 오백제자들이 칠엽굴에 모여 제1차 경전 결집이 이뤄진 이래 인도에서는 여러 차례의 결집이 이어졌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나 입으로만 구전되던 경전은 범어로 문자화된다. 그 후 중국에 전래된 범어 경전은 구마라집, 현장 등 수많은 역경가에 의해 한자로 번역되었다.

이 번역본들을 토대로 여러 학승들이 체계적으로 목록을 정리했는데 그 중 당나라의 지승 智昇 스님이 713년부터 741년 사이에 편찬한 〈개원석교록 開元釋敎錄〉은 가장 훌륭한 목록으로 손꼽힌다.

훗날 송나라는 이 〈개원석교록〉을 바탕으로 세계 최초의 목판대장경을 조성하게 된다. 이 대장경은 ‘북송관판 대장경’, ‘개보칙판 開寶勅版 대장경’ 등으로 불리게 되는데 훗날 고려의 초조대장경과 재조대장경, 거란대장경 등 20여 종의 대장경이 판각될 때 그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8세기에 〈개원석교록〉이란 훌륭한 저술을 편찬한 지승은 그야말로 ‘대장경의 아버지’라 부를만하다.

북송의 관판대장경 官版大藏經은 971년에 시작해 983년에 완성한다. 이 대장경은 완성된 지 8년 만인 991년(성종 10) 고려로 전해졌다. 그 뒤 1011년부터 고려의 초조대장경 판각이 시작되었다. 초조대장경은 기본적으로 북송 관판대장경을 그대로 복각한 것이지만 국내에 전래된 여러 경전들과 거란의 대장경까지 제작에 참고했으니, 북송 관판대장경에 비해 그 내용이 한층 보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대략 6,000권 분량이었는데, 경판 중에는 정교하게 새겨진 판화도 많아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알려진다.

1232년 몽골군의 침략으로 소실되기 전까지 고려의 문화적인 역량과 수준을 국제적으로 과시하던 초조대장경이었으나 정확한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학설이 존재하고 있다. 이전에는 1087년에 완성되었다고 알려졌으나 지금은 현종(재위 1010년~1031년) 때 1차적으로 완성되고 그 뒤 여러 차례 증보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무튼 고려의 초조대장경은 1087년에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는데, 당시 의천 스님의 속랍은 32세 정도로 볼 수 있다. 이때는 의천 스님이 송나라로 건너가 수많은 선지식들과 교류하고 14개월 만에 귀국한 뒤의 일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의천 스님은 초조대장경이 완성되기 훨씬 전부터 대장경의 체계와 내용 구성에 대하여 누구보다 자세하고 정확하게 파악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대장경을 구성하는 삼장(경율론)에 교장을 더하면 대장경의 완성도를 훨씬 높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실제로 그는 대중에게 경을 강설할 때마다 장章과 소疏를 적극 활용했다고 전한다. 경전을 보다 정확하고 분명하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주석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법문 현장에서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의천 스님이 열아홉 살 때 올린 ‘세자를 대신하여 교장결집을 발원하는 상소문’에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1073년의 어느 날이었다.

평소 병약했던 맏형(훗날 12대 순종)이 병상에 눕자 의천 스님이 병문안을 갔다.

“형님, 어서 쾌차하셔야지요.”

“고맙소, 승통. 몸이 부서지도록 바쁠 터인데…….”

“아닙니다. 아무리 분주하다해도 형님께서 몸져누워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늘 건강하셔야 합니다. 소승이 그런 뜻에서 형님을 대신해 교장을 결집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릴까 합니다.”

“교장을 결집한다는 게 무슨 뜻이오?”

“우리 고려국을 비롯해 송나라와 주변국들 곳곳에 흩어진 불경의 주석서들을 모두 수집하고 하나의 체제로 판각해 널리 보급하겠다는 말씀입니다. 형님을 대신해 그 일을 부처님께 발원하고 부왕께 건의해 형님의 건강 회복을 기원하고자 합니다.”

“그런 뜻이 있는 줄 몰랐소. 승통이 늘 그처럼 마음을 써주니 고맙소.”

이런 일이 있은 뒤 며칠 지나지 않아 의천 스님은 국왕 문종에게 ‘세자를 대신하여 교장결집을 발원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 그런데 부처님께서 경을 설하셨으니 논 論은 경으로 인해 생겼고, 경은 논으로 인해 분명해졌습니다. 논은 소 疏를 기다려 소통되었고 소는 의미의 단락들을 종합했으며, 의미는 스승을 통해서 전수되어 왔습니다. (중략) 돌아보건대 이 동방의 나라는 인도의 교화를 평소에 우러러 경전과 논서가 갖추어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소와 초 鈔가 결여되어 있으므로 예로부터 요나라와 송나라에는 백가들의 과교 科敎가 있으니 모아서 하나의 장경을 만들고자 합니다. ……

 

경이 경으로만 존재해서는 대중이 납득하기 어려워 논이 생긴 것처럼 그 논의 뜻을 보다 분명하고 논리적으로 밝혀주기 위해 주석서가 만들어졌다. 따라서 당시 동아시아 각지에 흩어진 주석서들을 결집하고 하나의 장으로 집대성해 대장경의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 의천 스님의 주장이었다.

일찌감치 출가해 수준 높은 학문을 연마했다 해도 열아홉 살 나이에 이 정도의 안목을 가지고 그 포부를 밝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의천 스님이 이런 글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왕자 출신으로 아버지 문종을 비롯해 어머니 인예태후, 훗날 왕위를 잇는 여러 형들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교장결집에 필요한 설계도

교장을 결집하는 과정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먼저 당시까지 발간되어 각국의 사찰에 보관된 주석서들을 수집하는 일부터 난관이었다. 물론 각국을 왕래하며 돈을 벌던 국제 상인들에게 부탁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의천 스님 자신이 직접 여러 선지식들을 만나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소장하고 있는 책자들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거나 구입하는 것이 그 발원을 원만히 성취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그래서 송나라로 법을 구하러 가겠노라 청했지만 귀족들의 반발로 여러 번 무산되었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결국 의천 스님은 차선책으로 여러 무역상들에게 거금을 쥐어주며 주석서들을 수집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085년에야 송나라로 밀항한 의천 스님은 14개월 동안 수많은 선지식들과 교유하고 귀국했다. 이때 약 3,000 권의 주석서를 수집할 수 있었다.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교통이나 통신이 오늘날 같지 않던 시대에 그 정도의 주석서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의천 스님의 계획과 추진력이 매우 치밀하고 끈질겼음을 말해준다.

의천 스님이 송나라에서 수집한 불서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속속 고려에 도착했다. 물론 귀국할 때 함께 가져온 책들도 많았을 것이다. 귀국한 의천 스님은 당시 국왕이던 선종의 부탁으로 흥왕사 興王寺 주지를 맡았다. 그때부터 흥왕사는 천태종 창종과 교장 결집의 근본도량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의천 스님은 흥왕사에 교장도감 敎藏都監부터 설치했다. 교장도감은 교장을 발간하기 위한 지휘본부이자 일종의 관청 역할을 하던 기구였다. 1086년에 설치된 교장도감에는 그동안 의천 스님이 수집했던 수천 권의 주석서들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 책들을 분야별로 구분하고 빠진 책들을 점검하며 그 목록을 정리해나갔다. 그리고 1090년 8월에 〈신편제종교장총록〉을 발간했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의천 스님이 그토록 발원했던 교장의 총록(총목록)을 펴낸 것이다. 어떤 건물을 짓기 전 그 설계도를 먼저 완성하는 것처럼 이 총록은 의천 스님이 교장에 수록할 책자들의 설계도이자 계획서였다. 의천 스님의 총록은 당나라 학승 지승이 펴낸 〈개원석교록〉과 비슷한 역할을 했으며, 의천 스님 자신도 지승 스님과 〈개원석교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신편제종교장총록〉의 설계도대로 만들어진 교장은 초조대장경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한 또 하나의 대장경이 완성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속장경 續藏經’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신편제종교장총록〉은 의천 스님만의 독창적인 발원과 노력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의천록’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의천 스님이 교장 결집을 발원한 지 20여 년 만에 이뤄낸 성과였으니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신편제종교장총록〉이 가진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의천 스님은 이 총록을 정리하면서 한 가지 아쉬움을 가지게 되었다. 실상 그는 원효대사를 비롯한 신라 시대 고승들의 주석서를 여러 번 읽으며 그 논지에 깊이 탄복한 바 있었다. 그러면서도 당나라와 송나라 고승들의 주석서를 위주로 한 목록을 만들다보니 정작 이 땅에서 활약한 고승들의 저술을 빠뜨렸던 것이다. 늘 염두에 두었으면서도 실행하지 못한 숙제와 같다고 할까? 같은 나라에 살았던 고승이니까,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수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조금씩 미루다 보니 〈신편제종교장총록〉이 일차적으로 완성될 때까지도 실행하지 못했다. 그만큼 바쁜 일정을 초인적으로 소화하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교장을 완성하고도 이루지 못한 꿈

결국 의천 스님은 〈신편제종교장총록〉을 펴낸 이듬해(1091년)가 되어서야 남녘을 돌아볼 수 있었다. 개경을 출발한 그는 먼저 영주 부석사로 찾아갔다. 부석사는 서기 676년(신라 문무왕 16)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종의 근본도량이었다. 의천 스님은 부석사에 모셔진 의상대사의 영정에 참배한 뒤 경주 분황사를 찾았다. 원효대사가 머무르며 〈화엄경소〉 등 여러 저술을 지었던 분황사는 634년(신라 선덕여왕 3)에 창건된 고찰이다.

의천 스님은 일찍이 원효대사의 저술을 접하며 그 탁월한 학문적 성과에 탄복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원효 스님을 ‘해동의 석가’, ‘동방의 공자’로 평하는가 하면 용수 龍樹존자나 마명 馬鳴존자보다 훌륭한 학승으로 여겨왔다. 그런 옛 스승의 유적을 찾아간 것이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을 느꼈을 것이다. 〈대각국사문집〉에는 이때 의천 스님이 원효대사의 영정에 바친 제문이 남아있어 당시 그의 감동과 다짐이 어땠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저는 타고나기를 천행으로 어려서부터 불경을 좋아하여, 선철 先哲을 두루 살펴보았지만 성사 聖師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중략) 여기 변변찮은 공양을 빌어 감히 두터운 자비를 바라노니 굽어 밝은 귀감을 드리우소서.

 

‘아무리 선현을 두루 살펴보아도 원효대사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 말보다 더한 찬사가 어디 있을까?

이렇게 부석사 · 분황사에 이어 금산사 · 적법사 · 경복사 · 선암사 · 송광사 · 백양사 · 화엄사 등 남녘의 여러 사찰을 참배한 의천 스님은 원효 · 의상 · 대현 스님 등 신라의 고승 28명 402권의 저술을 수집하고 그 목록을 〈신편제종교장총록〉에 포함했다. 그 결과 당나라와 송나라, 신라와 거란의 고승들이 저술한 주석서들의 목록은 1,010부 4,857권으로 구성되었다.

최종 설계도가 만들어졌으니 이제 의천 스님에게 남은 과제는 목록에 따라 경판을 제작하고 인쇄해 널리 보급하는 일이었다. 그 원대한 꿈은 의천 스님이 입적하던 1101년에 완성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것으로 의천 스님의 오래된 발원, 거의 한평생 이루고자 노력했던 꿈은 이뤄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속랍 마흔일곱에 열반에 들었다. 짧은 생애도 안타깝지만 그가 혼신을 다해 이룩한 교장이 온전히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은 더욱 애석하다.

〈신편제종교장총록〉 서문에는 ‘교장이 완성된 후 삼장의 정문 正文과 함께 무궁하게 전해질 수 있다면 내 소원은 끝나는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삼장의 정문이란 우리에게 익숙한 대장경(초조대장경)을 가리킨다.

의천 스님이 수집해 체계적으로 정리한 교장은 순조롭게 판각되어 완성되었다. 그리고 인쇄되어 국내외 각지로 전해질 수 있었다. 당시 이 교장은 초조대장경과 함께 대구 부인사 符仁寺에 소장되었다. 그러나 130년이 흐른 1232년(고종 19), 몽골군이 침략해 불을 지르는 바람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교장이 무궁하게 전해지길 바랐던, 의천 스님 생전에 품었던 소원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교장의 인쇄본 중 일부가 송광사와 일본에 전해지고 있어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덜어준다.

- 다음호에 계속

 

이정범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뒤 우리 역사와 불교인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왔다. 저서로 〈서프라이즈 한국사〉, 〈어린이 삼국유사〉, 〈다큐동화로 만나는 한국 근현대사〉, 〈그대 마음이 부처라네〉, 〈시와 소설로 만나는 원감국사〉, 〈붓다가 된 엿장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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