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변화 시킬만한
소중한 부처님 가르침
‘실천’이 중요하다

학생들과 〈유마경〉을 읽어 나가고 있던 때의 일이다. 경전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왔다.

유마거사의 방에 하늘 아가씨가 있었고, 그 하늘 아가씨의 신통과 말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사리불이 묻는다. “그대는 왜 여자의 몸을 (남자의 몸으로) 바꾸지 않는가?” 하늘 아가씨는 말한다. “내가 12년 동안 나에게서 여자의 모습을 찾았지만 찾지 못하였는데 무엇을 바꾸겠습니까?” 이런 대화 끝에 하늘 아가씨는 신통력으로 사리불을 여자로 바꾸어 놓고 자기는 사리불로 바꾼다. 그 다음 대화는 그 몸의 모습이라는 것이 참된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닌데, 그 모습에 매달려 있는 것에 대한 준열할 꾸짖음이 있다.

이 때 참여하고 있던 한 대학원 여학생이 물었다. “이것이 언제 만들어진 경전인가요?” 내가 대답하였다. “아마 2000년 가까이 될 걸?” 그랬더니 그 여학생은 매우 놀라워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런 이야기는 남녀평등 사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핵폭탄 급에 해당합니다. 근세에 들어와서도 힘든 이런 이야기가 거의 2000년 전에 있었다는 것이 정말 놀랍습니다.” 내가 말했다. “핵폭탄 급이면 뭐하니? 불발탄인데…….”

거의 반사적으로 말한 것이었지만, 그 뒤에 곰곰 생각해 보니 정말 우리 불자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그 한마디에 담아내지 않았는가 싶다. 세상을 바꿀만한, 부조리한 역사를 바르게 세울만한 핵폭탄 급의 무수한 이야기들을 우리 불자들이 불발탄으로 만들어 오고 있지 않았는가? 바로 앞에 나왔던 남녀평등의 문제만 놓고 보아도 그렇다. 그 준엄한 하늘 아가씨의 꾸짖음이 우리 모든 불자들에게 떨어지고 있지 않은가 반성해야 할 일이다. 남녀의 평등 문제에 대해 불교가 얼마만큼 고민을 하고, 또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얼마나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였는가?

관념의 영역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올바른 이념이 있으면 그것을 현실화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불교는 정말 긴 역사 동안 관념의 영역에 머무르면서 마음타령을 해온 것 같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면서, 현실을 바꾸려 하기 보다는 마음속에서 적당히 갈등들을 해소해 온 것이 바로 불교 역사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그것은 최면술 불교이다. 현실을 외면하고 최면을 걸어 현실 문제를 모르쇠한 불교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교야말로 마음과 세상을 철저히 둘로 보는 불교인 것이다. 그것은 불교의 연기설에도 어긋난다. 〈유마경〉의 ‘둘이 아님’[不二]사상과는 십만 팔천 리나 떨어진 이야기이다. 둘이 아니기에 연기이고, 연기이기에 둘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이 둘이 아니고, 세상과 마음이 둘이 아니다. 그것이 연기이다. 그런데 왜 세상문제를 모두 마음으로만 해결하려 하는가? 세상 잘 만드는 것이 마음 잘 다스리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야 연기이고 ‘둘이 아님’ 아닌가?

파괴적인 힘을 가졌다는 의미에서는 폭탄이라 하겠지만, 새로운 흐름을 일구어 낸다는 의미에서는 ‘물꼬’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부처님은 참으로 우리의 삶과 세계를 바꾸어 나갈 소중한 가르침을 많이 내려 주셨다. 그것을 불발탄으로 만들고 물꼬를 막아서 흐름이 끊어지게 만드는 부끄러운 불자의 모습은 하루 빨리 청산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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