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는 “학(鶴)의 다리가 길다고 잘라선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자연의 본성(本性)을 강조한 말이지만 요즘에는 원인과 이유도 모른 채 단지 외적인 현상만 보고 미봉책을 남발하는 이에게 던지는 경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근시안적(近視眼的) 사고(思考)로는 학의 다리가 왜 긴지 규명하기도 전에 쓸데없이 다리만 길다며 잘라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이러한 어리석음을 경계하기 위해 안목(眼目)을 키우는 데 주력해 왔습니다. 특히 삼면(三面)이 바다이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지리적 여건에서 스스로 살 수 있는 방도를 찾기 위한 수단이 안목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안목의 사전적 풀이는 ‘사물을 보고 분별하는 견식(見識)’입니다. 풀이대로 하자면 누구나 안목에 문제될 게 없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사물 즉, 눈·비·바람·풀·꽃을 분별하는 능력은 시각장애가 아닌 이상 누구나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분별 능력입니다.

국제적 안목, 사람을 볼 줄 아는 안목, 내일을 예측할 수 있는 안목 등이 안목의 중요한 기능이라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글로벌화 된 사회에선 국제적 안목이 필요할 것이며, 직원을 뽑는 회사 면접관에겐 그 사람의 인성과 능력을 볼 줄 아는 능력이 요구될 것이며, 미래사회가 불안한 시점에선 아무래도 예지적 관찰능력이 있는 사람이 주목받게 됩니다. 안목은 그러나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특별히 타고나는 것도 아닙니다. 안목을 기를 수 있는 힘은 책에 있습니다.

조선 세종~성종 대의 명재상 신숙주(申淑舟)는 당시 중국과 일본에 능통한 국제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종 대에는 훈민정음을 만들기 위해 명나라의 언어학자 황찬을 여러 번에 걸쳐 찾아가 한자음 정리에 대한 의견을 들었고, 일본 쓰시마 섬에 가서는 계해약조를 맺을 정도로 외교적 기질도 발휘했습니다. 국내에서는 민간상업의 진흥을 지지하는 학자이기도 했는데 ‘화폐 유통을 위해서는 큰 도시나 백성의 유동성이 많은 지방에 시장을 여는 것을 허용해서 백성들의 상업 활동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당시에선 이러한 경제적 안목을 가진 학자가 드물었습니다.

그는 또한 군사 전략가로서의 능력도 갖고 있었습니다. 1460년 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함경도 일대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귀환한 것은 그의 안목이 국제·경제·군사에까지 두루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가 여느 학자들과 달리 이렇듯 다양한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책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책벌레’였습니다. 1475년 그의 나이 59세 때 “저승 갈 때 읽을 책 몇 권을 관 속에 같이 넣어 달라.”고 유언할 정도로 그는 항상 책을 가까이 했습니다. 세종 시절에는 일부러 책을 읽기 위해 남들이 기피하는 궁궐 숙직을 도맡아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그만 책상에 엎드려 잠들고 말았는데 세종이 그 모습에 본인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벗어서 덮어 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이처럼 책과 안목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책=안목’이라는 등식이 성립됩니다. 하지만 불교에선 안목보다 ‘혜안(慧眼)’을 더 중요시합니다. 안목이 단순히 ‘분별하는 견식’이라면 혜안은 여기에 지혜로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안목과 혜안은 어떻게 다른가? 그 들여다보는 깊이와 내다보는 통찰과 판단하는 분별력이 다릅니다. 혜안은 말 그대로 ‘지혜로운 눈’을 말합니다. 단순한 판단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만일 신숙주가 혜안을 지니고 있었다면 ‘계유정난의 공신’으로 발탁되는 일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안목과 혜안이 다른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혜안은 모든 현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아울러 중생을 보듬고 구제할 수 있는 길도 제시할 수 있는 경지입니다. 진리를 바로 볼 수 있으니 삿된 길로 빠지는 경우란 없습니다.

혜안은 그렇다면 어떻게 증득될 수 있겠습니까? 안목이 책에서 길러진다면 마찬가지로 혜안도 독서를 통해 증득할 수 있습니다. 독서 가운데서도 불전은 최상의 선택입니다. 출가 수행자들은 물론 선정 등의 수행으로 혜안을 얻기도 합니다만 일반 불자들이 혜안을 지니려면 가장 쉬운 방법이 불전을 읽는 것입니다. 불전을 정독(精讀)하는 방법도 있지만 소리 내 읽는 것도 아주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느 노보살님은 가정형편상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오로지 남편과 자식들의 건강과 행복을 빌며 열심히 절에 다녔습니다. 초등학교에 안 갔으니 글도 모르는 노보살님이었지만 절에서 기도할 땐 오직 한마음으로 스님이 독송하는 경전을 따라 외웠습니다. 동네사람들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이 노보살님을 찾아 와 상담합니다. 노보살님이 말씀하신대로만 하면 신기하게도 일이 술술 잘 풀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노보살님의 지혜를 빌리고 있습니다. 경전을 보고 스님들에게 법문을 들으며 신행생활을 열심히 해 온 노보살님에겐 혜안이 있었던 것입니다. 독서를 하고 경전을 열심히 보면 이처럼 지혜의 눈을 갖추게 됩니다. 무더운 여름이 가면 독서의 계절, 가을이 다가 옵니다. 우리 모두 독서하는 습관을 기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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