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273호)

전문가들은 남북 간은 이질적인 부분이 많은데, 특히 종교 부분의 괴리가 상당하다고 지적한다. 북한 주민들이 2017년 1월 28일 설 명절을 맞아 평양 시내에서 줄넘기를 하며 즐겁게 보내고 있다.

우리나라는 1945년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지만 이후 남한은 미군이, 북한은 러시아군이 주둔하면서 양측 간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다. 그리고 한국전쟁의 발발로 남한과 북한은 기나긴 휴전에 돌입한다.

현재 남한의 일부 국민, 특히 전후 세대로 넘어갈수록 북한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있다. 동질감이 희미해져 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햇빛이 비칠 때 햇빛만 받고 그림자를 거부할 수 없는 게 세상의 이치인 것처럼, 남한의 여러 문제는 북한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특히 ‘통일’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 국민이라면 누구나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고민해보아야 한다. 앞서 북한의 불교에 대해 알아본 만큼, 이번에는 북한의 종교에 대한 개략적인 상황을 알아본다.

북한 종교의 특징

북한 종교의 특징에 대해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눠 서술하고자 한다. 첫째, 종교(활동)의 자유를 인정하는 게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점이고, 둘째, 북한의 종교에서는 ‘정치적 경향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며, 셋째, 주체사상이 ‘국가종교’로 탈바꿈하였다는 점이다.

먼저 북한 주민의 ‘신앙의 자유’에 대해 살펴보자. 미국의 ‘국제종교자유위원회’는 북한의 종교자유 실태에 관한 특별보고서를 발표(2005년)한 바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당국은 종교(신앙)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전체인구의 0.2퍼센트에 해당하는 약 4만 명 정도만이 종교활동을 하고 있다고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북한에서 허용하고 있는 것은 ‘신앙의 자유’이지 ‘종교의 자유’는 아니다. ‘신앙의 자유’는 어떤 종교를 믿고, 그 믿음을 위해 집단적으로 종교의식을 행할 건물을 세우고, 종교의식을 행할 자유를 보장한다는 의미이다. 북한에서는 포(선)교 행위, 주일학교 그리고 예배장소 이외에서 경전이나 성경을 지참하는 것을 사실상 금지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종교의 자유’에 해당하는 문제인데, 북한에서는 ‘종교’를 궁극적으로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포괄적인 의미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도 별반 다르지 않다.

다음은 북한종교의 정치적 경향성이다. 북한사회에서는 주체사상이 추구하는 가치, 곧 ‘민족’과 ‘사회주의’를 명시적으로 거부하는 종교나, 그렇지 않더라도 북한당국이 추구하는 가치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종교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에서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원칙적으로 ‘반제국주의’를 추구해야 하고, 또한 북한의 궁극적 목표인 ‘사회주의 이상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부합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기여해야 한다. 북한사회에서 특정한 종교인 혹은 종교집단이 존재할 수 있는 길은, 해당 종교인 또는 해당 종교집단의 종교적 행태에 있는 게 아니라, 정치적 경향성에 달려 있다.

마지막은 주체사상의 국가종교화이다. 신은희 미국 심슨대 교수는 2003년부터 4년간 봄과 가을 정기적으로 북한을 방문해서 북한의 대학생에게 세계종교문화에 대한 특강을 했다.(〈신동아〉 2007년 2월호 참조). 신은희 교수는 평양을 방문해 북한의 종교적 현상에 대해 느낀 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평양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북한 사회는 다른 종교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특히 기독교에 대한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죠. 북한에서도 봉수교회나 칠골교회 등이 있지만, 북한에서 교회는 일종의 문화선전을 담당하고, 복지물자를 조달하는 기관일 뿐이에요. 북한 주민에게는 이미 주체사상이 가장 감동적인 영성이요, 종교이며 신앙이 되어버린 겁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북한을 ‘주체교(주체사상)’를 신봉하는 종교국가라고 비판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실제 남한에서는 주체사상이 종교화한 것에 대해 대체로 비판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신은희 교수는 ‘문화적 다양성’의 관점에서 보자고 주장한다. 나아가 “남한과 북한이 새로운 연애를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북한의 종교단체

2007년 12월 25일 평양 장충성당에서 열린 성탄축하미사 모습.

북한의 대표적 종교는 불교를 비롯해 개신교 · 천주교 · 천도교 등이 있다. 앞서 불교를 살펴본 만큼 여기서는 나머지 3개 종교의 대표단체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은 1946년에 설립되었다. 1999년 2월 ‘조선기독교연맹’에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 연맹은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으로 나뉜다. 중앙조직으로는 총회가 있고, 중앙위원회(위원장 강명철), 서기(서기장 오경우)가 있으며, 그 밑으로 4개의 부서, 곧 국제부 · 선전부 · 조직부 · 경리부가 있다. 지방조직으로는 북한 전역을 10개 지역으로 구분한 후 50개 도시에 지역위원회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또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은 ‘평양신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 ‘평양신학원’은 1972년에 설립되었고, 북한교회의 성직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3년제다. 이 신학원에서는 학생을 일괄적으로 모집하여 교육시킨 다음, 다시 학생을 모집하는 형태로 운영한다. 2000년에는 교육과정을 3년제에서 5년제로 개편하였다.

목사의 사회적 지위는 그다지 높지 않다. 목사는 북한에서 사회적으로 상당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위치이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한 ‘평양신학원’에서 공부해야 하는데, 신학공부를 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생업에 종사하면서 틈틈이 해야 한다. 그리고 신학원을 졸업하면 가정교회에서 상당기간 봉사를 해야 한다. 목사의 양상은 다양한데, ‘조선그리스도교연맹’에서 일하지 않으면 목회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전해지고 있다.

조선가톨릭협회

‘조선가톨릭협회’는 1988년에 설립되었다. 1999년 6월에 ‘조선천주교인협회’에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북한의 천주교를 대표하는 이 단체의 위원장은 강지영으로, 현재 조선종교인협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 이전의 위원장인 장재언은 조선적십자사 위원장을 겸하기도 했는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교황청은 북한지역을 교구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단체는 교황청이 인정한 천주교 신도회는 아니다.

평양에 있는 장충성당은 1988년 3월 세워졌다. 이 성당을 세우는 데 당시 북한 화폐로 30만원이 들어갔다고 하는데, 이 가운데 20만원은 신자들의 모금으로 충당했고, 나머지 10만원을 정부의 보조금으로 충당했다고 한다. 이 성당에서는 매주 100~200명 정도의 신자가 약식으로 미사를 올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는 1974년에 설립된 단체다. 그 이전에는 ‘천도교 북조선정무원’이 있었는데, 1946년에 설립되어 1949년까지 활동하다가 사라진 바 있다. 그리고 ‘천도교 청우당’은 1946년에 창당되었는데, 이 당은 노동당의 외곽조직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천도교는 북한사회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적응한 종교이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된 천도교 청우당원이 22명이 되고, 지방의회에도 300여 명의 대의원이 청우당원으로 있다고 한다. 또한 북한의 모든 종교단체가 참여하는 ‘조선종교인협의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도 이 단체이다. 현재 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는 2016년 11월 류미영 위원장이 사망한 후 뒤를 이어 2017년부터 강철원이 위원장을 맡아 이끌어오고 있다.

북한 종교계의 변천

분단 후 북한 종교계의 변천에 대해서는 4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학계에 다양한 분석과 주장이 있지만, 여기서는 김병로 교수 등의 주장을 소개한다.

1 단계 - 해방에서 한국전쟁(1950) 이전 : 종교 자유의 제한

1945년 해방이후 북한지역에 들어선 사회주의 정권은 종교억압정책을 추진했다. 이 사회주의 정권에서는 종교를 반동적이고 비과학적이라고 보았다. 결국 아편과 같은 백해무익한 것으로 보고, 종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렇지만 이 사회주의 정권은 민족주의 세력과 연합전선을 형성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영향력 있는 종교집단과 연대를 추구했다. 그래서 한국전쟁을 겪기 이전까지 북한 사회주의 정권에서는 어느 정도 선에서 종교의 자유를 현실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 단계 - 한국전쟁 이후 1972년까지 : 종교억압

한국전쟁을 계기로 북한의 종교정책을 크게 달라진다.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고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지면서 미국과 연관되는 기독교(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인상이 대단히 부정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기독교인을 포함한 종교인은 잠재적인 반혁명분자로 지목되어 일상적인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또 사상교육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반종교선전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그에 따라 1960년경에 이르러서는 북한지역에서 모든 종교단체와 종교의식은 사라지거나 지하로 숨었다. 기존의 종교활동이 거의 자취를 감춘 셈이다.

3 단계 - 1972년에서 1988년까지 : 북한형 공식종교의 등장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북한에 다시 종교단체가 등장했고, 종교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유명무실했던 종교단체, 곧 ‘조선불교도연맹’, ‘조선기독교도연맹’,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가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주체사상과 사회주의 체제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종교의 신앙을 유지하는, 곧 ‘공식종교’ 또는 ‘체제협력적 종교’가 등장한다.

4 단계 - 1988년 이후 : 북한형 공식종교의 인정

1988년을 고비로 북한의 종교정책은 또 한 번 바뀐다. 이 시기를 전후해 불교·개신교·천주교 등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나타난다. 1988년 평양에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을 건축하고, 같은 해에 불교계에서는 처음으로 ‘부처님오신 날’ 등의 주요 절기에 공개적으로 기념행사를 개최하했다. 같은 해 천도교에서도 천도교 창도일인 ‘천안절’ 기념식을 갖는다. 이러한 변화에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 미친 영향이 크다. 또한 문익환 목사, 문규현 신부, 임수경 씨 등이 방북해 기존 종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전한 점도 일정 부분 작용을 하였다.

한국 종교계의 통일 대비

한국종교계에서는 통일을 대비한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개신교의 활동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980년대 개신교의 통일운동을 이끌었던 것은 진보 계열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였다. 이 단체는 6개 교단으로 구성되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일찍이 통일문제에 주목하고 1982년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를 조직했다. 또한 해외에서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선기독교연맹)과 통일을 위한 대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 두 단체는 스위스 글리온에서 1986년, 1988년, 1990년 등 세 차례 회의를 열기도 했다. 1990년 중반 이후까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핵심사업은 대북지원이었다. 상당기간 공백기가 있었지만 2014년 6월에 스위스 보세이에서 다시 만나 통일을 위한 대화를 이어갔다. 1990년대에 열린 ‘기독자 도쿄회의’에서는 남한의 보수교단도 참여한 바 있다. 이 회의는 일본의 재일동포교회, 남북한 교회가 공동으로 주최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 개신교 보수계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이 통일운동에 참여하였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1989년 12월에 창립총회를 열었다. 이 단체는 진보적인 노선의 2개 교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개신교 단체가 참여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1990년에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후 대북지원을 본격화했다. 하지만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대북지원에 비해 북한교회 재건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1995년 6월 ‘북한교회재건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이 위원회에는 개신교 47개 교단, 13개 선교단체, 해외의 한국교회들이 참여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 개신교의 통일선교운동은 더욱 다양화되고 전문화되었다. 지면관계상 전부 소개할 수는 없지만 60여 단체가 전문성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개신교의 적극적인 통일관련 활동은 다른 종교에 귀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병욱

고려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 철학과 · 동국대 평생교육원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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