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273호)

히말라야 16좌 완등하고
네팔 오지에 학교 · 병원 건립하는
한국 산악계의 영원한 대장

2017년 2월, 지리산 노고단에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8,848m)다. 이 산을 비롯해 히말라야에는 8000m를 넘는 고봉이 20개가 넘는다. 그 중 서양 산악계가 공인한 봉우리는 14개로, 흔히 14좌(座)라고 부른다. 세계 최초로 14좌를 완등한 산악인 라인홀드 메스너(Reinhold Messner, 1944~) 이후 무산소 완등, 최단기간 완등 등 다양한 종류의 기록이 쏟아졌다.

우리나라 산악인의 활약도 눈부셨다. 14좌를 완등한 산악인만 무려 6명. 첫 테이프를 끊은 이는 엄홍길(58)이다. 그는 1988년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후 2000년 국내 최초,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했다.(비공인된 1993년 시샤팡마 등정 포함. 2001년 9월 재등정 기준으로는 故 박영석 대장에 이어 세계 9번째) 이후 얄룽캉과 로체샤르를 올라 16좌 등정이란 기록을 세웠다. 혹자는 두 봉우리가 세계 산악인들이 주목하지 않던 위성봉이란 이유로 16좌 등정을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두 봉우리는 14좌와 마찬가지로 별개의 이름을 지닌 고봉이고, 이 산을 등반하려면 별도의 허가서가 필요한, 엄연히 독립봉이다.

우리나라 산악사(山岳史)에 큰 발자취를 남긴 엄홍길, 현재 한국외대 석좌교수를 맡고 있는 그를 6월 12일 서울 장충동 엄홍길휴먼재단에서 만나 삶의 여정과 함께 ‘인간과 자연의 상생’을 모토로 삼는 휴먼재단의 또 다른 도전에 대해 들어봤다.

도봉산은 어린 시절 놀이터

두 차례의 실패를 딛고, 1988년 엄홍길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보우리인 에베레스트(8848m)를 오른다. 정상에서 태극기를 든 엄 대장.

지금은 마을 초입에 전철역이 생기는 등 교통이 좋아졌지만, 1960년대 초반 의정부 호원동 망월사 방향의 두꺼비바위 아래는 민가가 드문 두메산골이었다. 세 살배기 엄홍길과 그의 부모님은 원도봉계곡을 따라 띄엄띄엄 늘어선 열 댓집 중 맨 윗집에 터를 잡았다.

그의 부모님은 전깃불조차 들어오지 않는 그곳에서 도봉산 등산객을 대상으로 음식을 팔았고, 하룻밤 묵을 숙소를 제공하기도 했다. 또래가 몇 없는 외진 산골에서 어린 엄홍길은 산을 놀이터 삼아 뛰어다녔다. 여름에는 계곡에서 물놀이를 했고, 겨울에는 토끼를 잡겠다며 눈밭을 뛰어 다녔다. 철없을 때야 장작을 때 밥을 하고, 밤마다 호롱불을 밝히는 불편함을 몰랐다. 하지만 사춘기가 시작되고, 친구들과 비교를 할 때마다 심심산골에서 살게 한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조금씩 싹텄다.

“주말이면 등산객이 몰려들었어요. 매점 일이 바쁘니 부모님은 제가 도와주길 원하셨지만, 틈만 나면 밖으로 쏘다녔어요. 몸에 넘쳐나는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는데 초등학교 때는 태권도를, 중학교 때는 유도를 배웠어요. 그러다가 클라이밍에 꽂혔죠.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집에서 10분쯤 산을 오르면 암벽등반 명소로 알려진 두꺼비바위가 있었어요. 암벽등반 장비를 갖춘 손님이 매점에 오면 다가가 호기심을 드러냈고, 따라가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봤죠. 그러다 몇몇 사람들과는 친해져 형, 동생 사이가 되었어요. 나도 모르는 새 그렇게 등산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설악산으로 내달렸다. 산악회 선배가 운영하던 산장에 틀어박혀 능선과 계곡, 빙벽 · 암벽을 오르내리며 설악산 구석구석을 누볐다. 군 입대 전까지 2년의 세월은 ‘산악인 엄홍길’이 기초를 다진 값진 시간이었다. 몇몇 선배·친구들과 조직했던 ‘거봉산악회’, 그 기나긴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져 정기산행을 하고 있다.

산에 빠져 살다보니 군복무는 바다에서 하고 싶었다. 해군에 자원입대해 인천 연안부두 인근에서 어선을 통제하는 연안경비업무를 맡았다. 바다 한가운데 설치한 해상기지에 머물다가 출동 시에 소형함정을 탔다. 주로 갑판청소를 하고, 배 밑창에서 취사를 담당했다. 근무가 편하다보니 날렵하던 몸매는 점점 불어났다. 누군가는 ‘꿀보직’이라 말할지 모르겠지만, 활동적인 그와는 맞지 않았다.

일병을 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박 중인 함정에 불이 났다. 배가 없으니 부대원들도 흩어졌다. 당시 인사담당자는 그에게 암벽등반을 배운 인연이 있었다. 편한 보직으로 보내주겠다고 말했지만 거절한 채 UDT(28기)를 지원했다. 체력시험을 통과한 후 6개월간의 훈련.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침저녁으로 후회했다. 하지만 스스로의 선택이었던 만큼 포기할 수는 없었다.

히말라야를 오르다

2000년 5월 네팔과 인도의 국경에 위치한 세계 제3의 봉우리 칸첸중가 정상에 올았다.

빡센 군 생활을 마치니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에베레스트 등정팀에 지원, 막내대원으로 합류했다. 준비기간을 거쳐 에베레스트에 올랐지만, 첫 등정은 실패로 끝났다. 1년 뒤 두 번째 도전에서는 해발 7500m 고지의 눈보라 속에서 셰르파 ‘술담 도르지’가 크레바스(Crevasse, 빙하가 갈라진 좁고 깊은 틈)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도르지의 어머니와 결혼한 지 4개월밖에 안된 18살 아내에게 부고를 알리는 일행들의 발걸음은 천근 같이 무거웠다. 이 사고는 겁 없던 20대 엄홍길에게 히말라야 등반이 갖는 무게를 일깨워주었다. 한 걸음 발 내딛음 속에 생사가 엇갈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던 것과 목도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였다. 두려움과 자책감을 이겨내는데 3년이 소요됐다.

사람들은 누가 히말라야 어느 고봉을 올랐다고 하면, 정상에 오른 사람이 곧 대장인 줄 안다. 몇 명이 팀을 꾸렸고, 어떤 훈련과 준비과정을 거쳤는지, 캠프는 몇 곳이나 설치했고, 정상에 오르는 사람을 누가 어떻게 결정했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 과정은 결코 간단치 않다.

“한 팀은 보통 순수대원만 10명 안팎으로 구성합니다. 팀 구성이 끝나면 서너 달은 국내에서 합숙훈련에 돌입해요. 전국의 험한 산을 다니며 체력과 기술을 기르는데, 이 과정을 통해 대장이 출국 전에 이미 정상에 오를 대원들의 순번을 정합니다. 훈련과정에서 보인 체력 · 기술 · 정신력 등을 종합해 우선 공격조를 선발해야 성공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지에 가서 스텝과 셰르파 등 10여 명이 다시 합류합니다. 해발 4000~5000m 고지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는데, 이곳이 총본부인 셈이죠. 여기를 중심으로 2차, 3차, 4차 캠프를 차례대로 설치해 나갑니다. 마지막 캠프는 7500~8000m 선상에 세우는데, 하루 만에 정상을 다녀올 수 있는 위치여야 합니다. 이 과정을 보면서 대장이 다시 한 번 공격조 순번을 점검합니다. 최고의 컨디션을 지닌 대원을 뽑아야 하니까요.

마지막 캠프까지 5명이 올라갔다면, 첫 공격조는 1명일 수도, 2명일 수 있습니다. 모두 대장이 판단합니다. 첫 공격 성공여부와 무관하게 대장은 2차 공격조를 보낼지 여부도 판단하는데, 날씨 · 대원들의 체력 · 남은 식량 등을 고려해야 합니다.”

엄홍길 대장은 히말라야에 오를 때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을 떠올린다.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한 후, 하늘의 뜻을 기다릴 뿐’이란 겸허함을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엄 대장이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건 1988년이다. 이후 대원으로 참여했을 때도 있었고, 대장으로 팀을 이끌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도전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2000년 아시아 최초로 14좌를, 2007년 세계 최초로 16좌를 완등 했다. 일각에서는 ‘세계 산악계에서 관심을 갖지 않는 위성봉 2개를 더 올라놓고 세계 최초 16좌라고 말하는 건 맞지 않다.’고 말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얄룽캉(8505m)과 로체샤르(8400m)는 8000m가 넘는 히말라야의 여느 위성봉과 달리 정식 이름을 지닌 독립봉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는 1988년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22년 간 서른여덟 차례 히말라야에 도전했다. 성공보다 실패가 많았던 고난의 연속. 주변에서는 “가지마라. 가면 죽는다.”고 만류했지만 정상에 오를 때의 쾌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친구를 잃어야 했다. 먼저 떠나보낸 동료 산악인이 6명, 셰르파가 4명이나 된다.

베이스캠프에 모신 불상과 염주

1988년 에베레스트를 오른 대원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엄 대장이다.

그 역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1992년과 1993년 하산 중 비박(줄에 매달려 밤을 보냄)을 하다가 동상이 걸려 오른발 엄지와 둘째 발가락 일부를 잘라낸 정도는 산악인들 사이에 얘깃거리도 안 된다. 1998년 안나푸르나에 도전했을 때다. 7600m 지점에서 셰르파 다와 타망이 60도 경사의 눈길에서 미끄러졌다. 그의 추락을 막으려다 오른 발목이 180도 꺾이는 골절상을 입었다. 구조헬기가 다니는 4500m 지점까지 한쪽 발로 줄을 잡고 기어서 내려오는데 3일이 걸렸다.

“상태가 너무 나빠서 네팔 병원에서는 수술을 못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국으로 후송돼 왔죠. 대수술 후 의사는 ‘더 이상 등산은 어렵다. 걷는 것조차 힘들 수 있다.’고 말하더군요. 허벅지까지 통 깁스를 했던 걸 두 달이 넘어 풀었더니 무릎은 안 구부러지고, 근육은 쫙 빠져 짝짝이 다리가 되어 있더군요.

물리치료를 받고, 트레이닝을 하며 열심히 재활을 했어요. ‘등산은 포기하라.’는 의사 말은 귓등으로 흘렸죠. 사고 후 5개월 만에 스틱을 짚고 절뚝거리며 북한산 백운봉에 올랐어요. 그곳에서 ‘다시 도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슴에 새기며 이를 악물었죠. 결국 이듬해 3월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했어요.”

누군가 해놓은 결과만 보고는 그 과정에서 일어났을 수많은 난관을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엄홍길 대장은 그 사고로 비록 목숨은 건졌지만, 오른쪽 발목을 움직이지 못하게 됐다. 산행을 할 때도 오른발은 앞쪽에만 힘을 주고 올라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 이후 히말라야 7개 고봉의 꼭대기에 우뚝 섰다.

히말라야를 오르는 모든 산악인에게 부상과 죽음은 숙명이다. 부상과 죽음의 각오 없이는 그 무엇도 이룰 수 없다는 걸 그들은 알기에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산을 내려올 때마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의 강인한 신념과 굳센 의지는 무용지물에 불과하단 걸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엄홍길 대장은 항상 베이스캠프 텐트 안에 불단을 만든다. 히말라야에 오르며 불자가 된 게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불심이 깊었다. 세 살부터 마흔까지 망월사 산자락에서 조석으로 목탁과 범종소리를 듣고 살았으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불단에는 불상과 염주, 부처님이나 티베트 스님의 사진 등을 모셔뒀는데, 그 중에는 부친의 유품인 염주도 섞여 있다.

“특히 어머니는 제가 히말라야로 떠날 때마다 혹여 집안의 장남이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 절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그래서 망월사 능엄 스님, 상좌인 원산 스님과 인연이 깊으세요. 지금도 그 근처에 살면서 원산 스님 절에 다니고 계시죠. 저 역시 어릴 때부터 망월사에 다녔는데, 능엄 스님께서 많이 아껴주셨어요. 절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굉장히 가깝게 지냈어요.

사실 히말라야를 오르다보면 저절로 불자가 되요. 저는 등반할 때면 네팔 사원을 참배하는데, 스님을 뵙고 무사귀환을 빌어요. 이때 받은 선물도 불단에 올려두죠. 셰르파들의 불심은 두말할 나위가 없어요. 그들은 라마불교를 믿는데, 신심이 무척 돈독합니다. 산에 오르기 전에는 반드시 재를 지내고, 오르내릴 때마다 향불을 피우죠.

그렇다보니 산을 오르면서 저절로 ‘옴마니반메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등을 외게 됩니다. 정상에 오르는 건 인간의 의지를 넘어선 일이란 걸 서로가 알기 때문에 한없이 자신을 낮추면서 불보살님의 가피를 기원하는 겁니다.”

또 다른 도전, 엄홍길휴먼재단

그는 히말라야 14좌 외에 독립봉으로 불리는 얄룽캉과 로체샤르마저 올라 16좌 등정에 성공했다. 2004년 오른 얄룽캉의 베이스캠프에서 대원들과 함께.

엄홍길은 2007년 12월 남극대륙 빈슨매시프 등정을 끝으로 더 이상의 고산 등반은 하지 않는다. 대신 이듬해 5월 엄홍길휴먼재단을 설립했다. 재단 설립에 영감을 준 곳은 그가 가장 존경하던 에드먼드 힐러리(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가 1962년 네팔 셰르파들을 돕기 위해 세운 ‘히말라얀 트러스트재단’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술담 도르지를 비롯한 네팔 셰르파와 그 가족, 네팔인들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사랑이 깔려 있다.

재단 설립의 종잣돈은 2007년 연말, 파라다이스 문화재단에서 받은 특별공로상 상금 5000만 원. 쉽지 않았지만, 좋은 취지를 이해해준 지인들의 후원 덕분에 지금까지 10년 간 네팔 히말라야 오지마을에 학교와 병원을 건립해오고 있다. 2010년 5월에 1호인 팡보체 휴먼스쿨(에베레스트 산자락 4060m 팡보체마을에 위치)을 낙성했다. 1년에 1개꼴로 학교를 짓다가 속도가 붙어 현재 15번째 학교가 개교를 앞두고 있다. 오지마을도 깊은 산자락에 흩어져 있어 어떤 곳에는 기숙사도 지었고, 2017년 5월에는 에베레스트 길목인 남체(3440m)에 ‘쿰부 남체 엄홍길휴먼재단병원’도 세웠다. 16번째 학교는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함께 지어 교육타운을 꾸밀 계획이다.

학교 1곳 건립비용은 우리 돈으로 3억~5억 원 정도 소요된다. 2015년 네팔대지진으로 자재비와 인건비가 크게 상승한 이유도 있지만, 건립 위치가 말 그대로 오지이다 보니 자재비보다 운반비가 더 드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형국이다. 수도 카트만두에서 경비행기로 해발 2800m 산골짜기에 위치한 루크라 공항까지 자재를 운반한 후 부피가 큰 자재는 헬기로, 나머지는 야크를 동원해 3일을 져 날라야 할 정도로 지형이 험준하다.

평생을 히말라야와 함께 살아온 산악인 엄홍길. 학교와 병원을 건립한 후에는 자선사업을 펼치고 싶다는 그에게 히말라야가 가르쳐준 교훈 한 가지만 들려달라고 말했다.

“히말라야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베이스캠프를 거쳐야 합니다. 보통 해발 4500m 안팎에 세우는데, 베이스캠프를 거치지 않고는 8000m 이상의 고봉에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만약, 편안하게 오르기 위해 헬리콥터를 타고 베이스캠프까지 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경우, 대다수는 고산병에 걸려 더 이상 산을 오를 수 없게 됩니다.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면 반드시 노력과 열정, 시간을 대가로 치러야만 합니다. 대자연은 항상 이와 같은 인과의 이치를 가르쳐 줍니다.”

2008년 설립한 엄홍길휴먼재단은 10년째 네팔 오지마을에 학교와 병원 건립을 해오고 있다. 무릎 꿇고 합장한 채 머리를 맞댄 네팔 소녀에게 그는 무엇을 약속하고 있을까?
2016년 5월 한 휴먼스쿨 재학생이 엄홍길 대장에게 그림 선물을 하고 있다. 아이들의 미소가 천진하다.
타르푸 휴먼스쿨은 2010년 4월 착공해 이듬해 2월 준공했다. 오지마을 아이들이 학용품을 선물 받은 후 합장으로 감사를 표하고 있다.
아홉 번째 학교인 마칼루 휴먼스쿨은 380명을 수용한다. 이 학교는 2014년 3월 착공해 3년 간 공사 끝에 완공했다. 자재를 헬기로 나르는 모습.
엄홍길 대장은 전국 대학생들과 함꼐 2013년부터 6년 째 14박 15일 여정의 'DMZ 평화통일대장정'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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