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국사 의천 스님 이야기(273호)

의천 스님은 송나라에서 돌아와 고려에 천태종을 개창했다. 사진은 스님의 시문집으로 해인사 고려장경판에서 관련 부분을 인출한 목판본이다.

1 4개월 만의 귀국

의천 스님은 송나라로 건너가 14개월 동안 선지식들과 교류하며, 교장 결집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출국할 때는 조정의 반대로 밀항을 해야 했지만, 국제적인 명성과 함께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귀국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어머니 인예태후의 간절한 요청으로 귀국한 의천 스님은 먼저 국왕에게 사죄하는 편지부터 올려야 했다.

의천 스님의 ‘사죄하는 글’을 보면 “멋대로 떠난 죄는 엄한 벌을 받아 마땅하고 법을 구하기 위한 마음으로 저녁에 죽게 되더라도 감수하겠습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승통으로서 불제자의 소신을 지킨 게 굳이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왕자 출신이다 보니 국법을 어지럽힌 죄를 스스로 고하고 용서를 구하는 절차가 필요했으리라.

이에 대해 선종은 의천 스님의 죄를 묻기는커녕 도리어 중책을 맡겼다. 생전의 문종 임금이 원찰로 세웠던 흥왕사(興王寺)의 주지로 임명한 것이다.

“부왕께서 붕어하신 뒤 흥왕사가 낙성하였으나 아직 주관하는 사람이 없으니 승통이 주지를 맡아 이끌어가시오.”

흥왕사는 문종이 공사를 시작해 10여 년 만인 1067년(문종 21)에 낙성한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흥왕사 불사가 시작되던 해, 의천 스님의 나이는 열세 살로 그 무렵 고려의 승통으로 임명된 바 있다. 무려 2,800칸 규모인 흥왕사는 크고 화려한 도량답게 고려 각지에서 모여든 스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는데, 그 중에서 계행이 철저한 스님 1,000명이 선발돼 머무르고 있었다.

의천 스님이 송나라에서 돌아온 뒤 추진한 일은 크게 교장 결집과 천태종 개창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한국불교사에 큰 획을 그은 업적이었다. 게다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추진됐기 때문에 회향할 때까지 6~10년 안팎의 세월이 소요됐다. 그만큼 큰 불사였고, 우여곡절도 많았다.

긴 안목으로 추진된 불사인 만큼 의천 스님은 흥왕사를 이 불사의 중심도량으로 삼았다. 그가 흥왕사에 교장 결집을 추진하는 기관,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한 것을 근거로 들 수 있다.

한편 선종에게 사죄하는 글을 올린 의천 스님은 어머니 인예태후를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어마마마, 그간 옥체 평안하신지요?”

“내가 승통이 송나라에 다녀오길 허락했으면서도 막상 밤배를 타고 떠나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14개월 동안 하루도 마음편한 날이 없었소. 이제 무사히 돌아왔으니 모두 부처님의 수미산 같은 가피가 아닌가 하오.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인예태후가 우세 승통의 손을 감싸 쥐며 감격해했다. 서른두 살의 의천 스님도 오랜만에 뵙는 어머니의 곱고도 인자한 모습에서 뜨거운 모정을 느꼈다.

“고생이라니요?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고국에 계신 어마마마와 폐하께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신 덕택에 수많은 선지식들을 뵙고 진리를 구했으며 원하던 목적을 이뤘으니 칼산에 떨어졌다 해도 고생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려. 그래, 전부터 얘기했던 천태종 개창은 잘 준비하고 있소?”

오래 전 의천 스님이 궁궐로 찾아가 인예태후와 계림공 희(훗날의 숙종)가 있는 자리에서 천태종에 관해 나눈 대화를 떠올린 것이다. 당시 의천 스님은 두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승이 여러 불서를 읽다 보니 중국에선 일찍이 고승 지의(智顗)대사가 천태종을 창종하여 최고의 수행법으로 불법을 널리 폈으며 천태종단을 기반으로 뛰어난 고승들이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중국에서 불법이 쇠할 때엔 제관(諦觀) 스님 등 우리나라의 고승들이 건너가 천태종 중흥에 크게 이바지했는데 정작 이 땅에 천태의 삼관(三觀)과 같은 최상의 수행법을 세우지 못한 게 안타깝습니다. 제가 송나라에 다녀올 수 있다면 명망 있는 스승들을 뵙고 깊이 공부해 천태종을 창종할까 합니다.”

이때 인예태후와 계림공은 기뻐하며 의천 스님이 천태종을 창종하는 일을 물심양면으로 돕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의천 스님이 천태종을 개창하기 전 고려의 불교는 조계종 · 화엄종 · 유가종 · 궤범종(軌範宗) 등 여러 종파로 나뉘어 있었다. 승통이던 의천은 어느 한 종파에도 치우칠 형편이 아니었다. 훗날 그가 송나라로 유학했을 때 천태종을 비롯해 화엄종 · 남산종 · 자은종 · 조계종 등을 고루 연구하고 각 종파를 대표하는 고승들과 교류한 것도 각 종파의 성격을 살리면서도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는 의도에서였다. 화엄종 사찰인 흥왕사에 머물면서 천태종 개창을 추진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천태사교의〉 남긴 제관 스님

천태종은 6세기 후반 절강성 천태산에 머물던 지의(지자)대사가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는 교학이론과 일심삼관(一心三觀)의 선정수행법을 통해 선(禪)과 교(敎)를 함께 닦아야 한다고 설하면서 세워진 종파다. 지자대사가 주로 머물던 산이 천태산이므로 그 이름을 따서 천태종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고구려의 파약(波若), 신라의 현광(玄光)과 법융(法融), 고려의 제관 스님 등 여러 고승들이 천태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럼에도 의천 스님이 송나라에 다녀오기 전까지는 하나의 종단으로 성립되지 못한 상태였다.

고려의 고승 중 중국 천태종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으며, 의천 스님에게 천태종 창종을 하도록 직접적인 영향을 준 이는 제관 스님이었다.

중국 천태종은 창종 이후 여러 차례 부침을 거듭했고 10세기 후반에는 거의 맥이 끊길 위기에 직면했다. 당나라 무종(武宗)이 일으킨 ‘회창의 법난’과 당나라 말기에 일어난 ‘오대십국(五大十國)의 전란’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특히 회창의 법난 때는 수많은 사찰이 파괴되었고, 무려 26만 명의 승려가 강제로 환속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결과 당나라 말기에는 천태종 관련 서적들이 대부분 주변 국가로 유출된 반면 정작 중국에서는 찾아 읽기도 힘들 지경이 되었다.

그때 오월국(吳越國)의 왕, 전숙(錢俶)이 고려로 50가지의 보물과 함께 편지를 보냈다. 오월국은 십국(十國) 중 한 나라로 항주와 천태산 등을 포함하고 있었고, 전숙 왕은 불심이 깊기로 유명했다. 전숙이 보낸 편지의 내용을 한마디로 줄이면 고려에서 소장하고 있는 천태종 관련 서적을 보내주면 감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광종(光宗) 임금이 오월국으로 파견한 인물이 제관 스님이다. 광종은 제관 스님이 오월국으로 떠나기 전 특별히 당부했다.

“대사께선 천태종 관련 서적을 가지고 가 오월국 스님들에게 까다로운 질문을 던져 대답하지 못하면 가지고 간 책들을 다시 거둬 귀국하시오.”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제관 스님은 곧 오월국으로 건너가 중국 천태종의 제15조인 의적(義寂) 스님이 주석하던 나계사(螺溪寺)로 향했다. 거기서 의적 스님의 강의를 듣던 중 그 학문의 깊이와 수행에 저절로 매료되고 말았다. 그래서 의적의 문하가 되었으며, 당연히 고려에서 가져간 천태종 관련 서적을 전해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중국 천태종은 중흥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처럼 천태종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제관 스님은 더욱 깊은 수행과 학문에 10년 동안 매진하다가 앉은 채로 입적했다. 이런 좌탈입망도 놀라운 일인데 그가 남긴 저술은 후학들에게 더 크고 깊은 울림을 주었다.

후학들이 제관 스님 처소를 정리할 때였다. 낡을 대로 낡은 상자에서 찬란한 빛이 나자 모두 깜짝 놀랐다.

“저 속에 뭐가 들었기에 신비로운 광채가 날까?”

“그러게. 한번 열어보세.”

그렇게 발견한 것이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이다. 제관이 쓴 이 책은 훗날 천태학의 입문서이자 불교개설서로서 널리 읽혔다. 특히 일본에서는 가장 많은 주석서를 낼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제관 스님께서 이처럼 훌륭한 책을 짓고도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고 몰래 상자에 넣어두신 이유는 뭘까?”

“그러게 말일세. 스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열심히 수행해 그 뜻을 깨닫도록 하세.”

이런 업적을 남긴 제관 스님이었으나 살아서 귀국하지 못하는 바람에 고국에 천태종의 맥을 전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의천 스님이 천태종을 창종하겠다는 의욕을 가진 데에는 이런 이유도 한몫했다.

천태종 근본 도량, 개성 국청사 불사

의천 스님은 인예태후를 만나 중국에서 만났던 수많은 고승들과 귀국하기 전에 둘러보았던 천태산 국청사(國淸寺)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국청사의 규모와 역할, 여러 전각의 구성, 지자대사탑의 높이와 모양새 등도 빠뜨리지 않았다.

지의(지자)대사의 사리를 모시고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지자대사탑은 수나라 때 건립되었다고 하여 ‘수탑’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탑의 높이는 20층 아파트에 버금가는 59.3m이며, 6각 9층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의천 스님은 바로 이 탑 앞에 서서 경건한 마음으로 지의대사에게 합장하고 발원했다.

“대사께서는 오시팔교(五時八敎)로 동쪽에 전해진 일대의 성스러운 법문을 풀어 보이셔서 그 법이 퍼지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옛적에 제관 스님이 교관을 널리 전했지만 지금은 이미 그 계승이 끊겼습니다. 이제 소승이 귀국하면 목숨을 바쳐 대사님의 뜻을 이어 널리 천태의 법을 선양하고자 합니다.”

의천 스님이 만났던 중국의 선지식들 중 화엄학의 대가인 정원(淨源) 대사와 천태종의 핵심이던 자변종간(慈辯從諫) 스님은 특별하다. 평생의 스승으로 삼은 정원 스님으로부터는 화엄학의 깊이를 더했고, 자변 스님에게선 고려 천태종을 새로 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의천 스님이 정원 스님으로부터 화엄학 강의를 듣던 어느 날이었다.

“노스님, 화엄과 천태가 어울릴 수 있습니까?”

의천 스님이 묻자 정원대사가 답했다.

“본래 화엄과 천태는 같은 것이지요. 둘 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중생을 구제하려는 방편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의천 스님은 이런 답변에 큰 힘을 얻었다. 화엄학을 배우면서도 천태종을 개창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얼마 후 의천 스님은 당시 천태종의 중심인물이던 자변종간을 찾아가 인사했다. 이때 자변종간은 천태종에 대한 여러 가지 궁금증을 풀어주었을 뿐 아니라 천태의 교관을 상세히 전수해주었다. 이런 인연으로 의천 스님이 국청사 지자대사 탑 앞에서 천태종 창종을 발원할 때 특별히 종간 스님을 언급했고, 이는 비석에 새겨져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소승이) 항주의 자변 법사에게 교관을 전수받았으니 고려로 돌아가면 대사님의 가피를 입어 널리 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의천 스님이 이러한 발원과 함께 천태종 개창 의지를 거듭 밝히자 인예태후는 크게 감격했다.

“승통이 그처럼 큰 뜻을 세웠으니 이 어미가 어찌 가만히 있겠소? 나 또한 지난날 약속한대로 천태산 국청사에 버금가는 도량을 고려에 세워 승통을 도울 것이오.”

인예태후는 약속대로 1089년(선종 6)부터 천태종의 근본도량이 될 개성 국청사 불사를 시작했다. 개성 국청사란 이름은 중국 천태종의 본산이 국청사인 것을 감안한 작명이었다. 하지만 인예태후는 국청사 불사를 시작하던 중 병을 얻어 서경(지금의 평양)에서 요양하다 1092년 가을에 세상을 떠났다. 의천 스님으로선 어머니이자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돕던 큰 후원자를 잃고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인예태후가 추진했던 국청사 불사는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친 바 있었다. 고려 왕실에 저항하던 귀족들의 반대였다.

“고려에는 이미 수많은 대찰들이 있는데 이번에 또 큰 절을 짓는 것은 국력의 낭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무리한 사찰 불사를 중단하셔야 합니다.”

귀족들은 사찰 건립으로 국력을 낭비해선 안 된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화엄종과 결탁하고 있던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책동이었다.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성 국청사 불사가 이후에도 추진되었으나 인예태후에 이어 1094년 국왕 선종마저 붕어하면서 천태종 창종은 더 큰 시련을 맞았다.

선종은 어린 아들 헌종에게 왕위를 잇도록 했다. 그는 형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았음에도 자신은 아우 대신 아들에게 왕권을 물려주었다. 하지만 이런 결정은 고려의 운명을 풍전등화의 위기로 내몰았다. 이제 겨우 열한 살에 임금이 된 헌종을 배후에서 조종하던 외척 세력 때문이었다. 이자겸으로 대표되는 외척들은 정권은 물론 불교계의 주도권마저 장악했다. 이를테면 이자겸은 법상종 사찰인 현화사, 화엄종 사찰인 흥왕사를 출가한 자신의 숙부나 아들에게 맡겨 불교계의 실권을 행사하게 했다. 그 일로 고려 왕실은 물론 왕자 출신인 의천 스님은 매우 큰 시련에 직면했다. 이 와중에 개성 국청사는 착공한지 6년만인 1095년(헌종 원년)에야 겨우 완공되었다.

그 뒤 국청사는 몽골의 침략 때 불타 없어져 도량의 규모나 전각의 구조 등에 대해선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인예태후의 원찰(願刹)이었다는 점과 13층 규모의 황금탑이 있어 흥왕사의 금탑과 함께 고려탑의 쌍벽을 이뤘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국청사가 완공되기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의천 스님은 천태종 창종과 교장 결집이란 대사업을 잠시 접어두고 해인사로 내려갔다. 그는 그동안 눈병이 날 만큼 수많은 독서를 하고 후학들을 길러내며 한 시도 쉴 틈이 없었다. 게다가 세속의 기득권자들이 날이면 날마다 권력 다툼에 여념이 없자 고려의 중심지를 떠나 멀리 가야산의 숲에 은거할 작정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때인지라 억지로라도 쉬는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 무렵에 지었던 시 한 수가 의천 스님이 당시 처한 상황을 절절히 대변한다.

세상사는 길 위험이 많은데
산문은 진정되어 고요하여라.
평소에 맑고 조용한 곳 좋아했거늘
하물며 시끄러운 세상 만났음에랴.

하지만 고려의 왕실과 귀족들은 한적한 산사에서 수행자 본연의 길을 가려던 의천 스님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처음엔 그의 조카 헌종이 하루빨리 개성으로 올라와 도와달라는 전갈을 보내더니 몇 달 지나서는 숙종이 상경하라며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다. 숙종은 왕이 되기 전부터 천태종 창종을 적극 지원하겠노라 약속한 바 있었다.

병약했던 헌종은 몇 달 동안 차지하던 왕위를 삼촌인 계림공에게 이양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계림공이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차지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래서 이때의 일을 훗날 조선에서 일어난 계유정난의 원조격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쫓아내고 즉위한 것처럼 숙종이 왕위에 오른 과정도 흡사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무렵, 의천 스님은 해인사뿐만 아니라 천성사 · 선암사 등을 거쳐 다시 개성 흥왕사로 올라갔다. 숙종의 거듭된 상경 요청을 번번이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개성 국청사의 완공도 의천 스님의 귀경 무렵이었다. 이런 곡절 끝에 국청사 초대주지가 된 의천 스님은 후학들에게 천태교관(天台敎觀)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다른 종단에서 수행하던 학승들이 수없이 모여들어 의천 스님의 강의를 들었다.

국청사를 중심으로 한 천태교학이 차츰 발전하면서 천태종은 불과 몇 년 사이에 기존 종단과 맞먹는 교세를 갖추게 되었고, 그 뒤에도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모두 천태종 창종이라는 평생의 발원을 원만성취한 의천 스님의 노력 덕택이었다.

의천 스님은 1101년, 천태종의 요강을 정했을 뿐만 아니라 학문에 뛰어난 승려 100여 명을 가려 봉은사에 머물게 했다. 그런가 하면 천태종의 경론(經論) 120권으로 시험을 치러 40여 명의 학승을 선발했는데, 이를 기점으로 고려에는 조계종· 화엄종 등 4대 종단에 이어 천태종이란 종단이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그 뒤 천태종은 근본도량인 개성 국청사 외에도 전국에 6대 본산(本山)을 두어 종풍을 크게 떨쳐나갈 수 있었다.

- 다음호에 계속

이정범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뒤 우리 역사와 불교인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왔다. 저서로 〈서프라이즈 한국사〉, 〈어린이 삼국유사〉, 〈다큐동화로 만나는 한국 근현대사〉, 〈그대 마음이 부처라네〉, 〈시와 소설로 만나는 원감국사〉, 〈붓다가 된 엿장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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