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베푸는 법회자리
가르침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최선 다해 법문하자

“아무래도 이번 강의는 취소해야겠습니다. 수강생들 인원이 너무 적어서요. 강사님께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강사님도 듣는 사람이 좀 많아야 강의하실 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이따금 듣는 말이다. 강사야 뭐라 할 말은 없다. 취소됐다면 취소된 줄 알아야 한다. 그 속사정을 어찌 모를까. 강의실이 크든 작든 사람들로 꽉꽉 들어차야 강단에 선 사람도 신이 날 텐데, 그리고 강사료도 어렵지 않게 지불할 수 있지 않겠는가.

강사료가 걸린 문제라면 어쩔 수 없지만 ‘수강 인원이 너무 적어서 강사님 모시기가 죄송하다.’는 말을 들을 때면 경전에서 읽은 사자 이야기가 생각난다.

낮 동안 굴에 들어가 잠을 자던 사자가 저녁 무렵 동굴에서 나왔다. 기지개를 길게 켜고 사방을 휘 둘러본 뒤에 크게 포효하고 나서 사자는 사냥을 하러 나섰다. 그런데 이 사자의 사냥하는 모습을 지켜보면 아주 흥미롭다. 어떤 대상이든 자신의 먹잇감으로 점찍으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그 먹잇감이 몸집 큰 동물이면 사력을 다해 쫓아간다. 코끼리건 물소건 표범이건 온 힘을 다해 쫓아가서 있는 힘껏 목을 물고 늘어진다. 대충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자는 토끼나 고양이를 쫓아갈 때에도 사력을 다한다. 몸집이 작다고 해서, 쉽게 잡을 수 있는 먹잇감이라고 해서 대충하는 법은 없다.

왜 그럴까?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다. 먹잇감을 잡는 자신의 방법이 실패하지 않으려면 그 대상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나운 표범을 쫓아가든 온순한 토끼를 쫓아가든 최선을 다하는 사자의 모습은 부처님을 닮았다. 부처님이 사자 비유를 든 이유는 바로 다음의 말씀을 하시기 위함이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비구들에게 가르침을 설해도 최선을 다해 철저하게 설한다. 대충하지 않는다. 비구니들에게 가르침을 설해도 최선을 다해 철저하게 설하지 대충하지 않는다. 남녀 재가신자들에게 가르침을 설해도 최선을 다해 철저하게 설하지 대충 법문하지 않는다. 설령 불자가 아닌 사람들이나 비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설할 때에도 최선을 다해 철저하게 설하지 대충 법문하지 않는다.”〈앙굿따라 니까야〉

학력이 높고 지식을 많이 쌓은 사람이라고 해서 열과 성을 다해서 법문하고, 어려운 말을 잘 못 알아듣는 사람이라고 해서 대충 쉬운 말로 시간을 때우지 않는 것이 부처님의 법칙이다. 상대방이 누구인가에 따라 법문을 하시는 자세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왜 그럴까?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가르침에 가치를 부여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탁발을 마치고 돌아오시다 비좁은 골목길에서 맞닥뜨린 한 사람에게 법문을 베푸셨다. 길에서 조촐하게 베풀어진 법문을 들은 사람은, 삶의 가치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범부에서 성자의 대열에 들어섰고 나아가 아라한이 되었다는 내용들이 경전에는 많이 등장하고 있다.

법회 자리에 누가 오든지 몇 사람이 오든지 무슨 상관이랴. 그 자리는 진리가 베풀어지는 자리이다. 진리가 사람을 가릴까, 사람의 숫자를 따질까. 표범을 쫓든 토끼를 쫓든 그 힘에 차이를 두지 않는 사자처럼 부처님은 그렇게 법문을 하셨다.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하자. 부처님이 그렇게 하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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