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손끝에서 피어나는 마음(272호)

오월 초순의 맑은 아침입니다. 며칠 전 출근길엔 날벼락처럼 우박이 쏟아지더니 어제 낮엔 한여름처럼 더웠습니다. 언제까지가 봄일까요? 연둣빛 신록은 짙은 녹음으로 번져가고 숲과 호수를 향해 사람들이 걸어갑니다. 어디까지가 우정이며, 어디까지가 사랑입니까?

저의 삶은 대체로 무미건조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도 정확하지 않네요. 최근에 저는 언어보다 사람을 믿는 이가 되어갑니다. 매일매일 글을 썼고, 십오 년 이상 거의 매일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며 살아오던 단순한 삶이 일순간 바뀌었습니다. 지난 시월 초순에 ‘책방이듬’의 문을 연 후 제 인생은 파란만장하며 비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어떤 이는 호숫가 오두막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호반의 작은 수도원이라며 웃지만, 여긴 제 삶의 현장입니다. 이곳에서 저는 지금까지 열아홉 번의 낭독회를 열었습니다. ‘일파만파 낭독회’란 기획으로 황석영 · 최정례 · 황인숙 · 장석남 · 문태준 등 스물한 분의 작가님을 초대하였습니다. 큰 나무 곁의 어여쁜 새들처럼 우리는 겹겹이 앉아 문학을 논하며 작품을 낭독했습니다. 주객이 따로 없었고 작가와 작가 아닌 이의 경계마저 허물어지곤 했습니다. 어떤 날엔 먹구름 사이로 환한 빛이 쏟아졌고 어떤 날은 큰비가 내려 더욱 천천히 시를 읽기도 했지요.

동네의 작은 독립서점, 북 카페가 맞습니다. 이곳의 종업원은 저 혼자뿐입니다. 바깥세상을 전혀 모르는 이처럼, 책방 밖으로 나가는 일이 드뭅니다. 저는 날마다 책 재고조사를 하고 새 책들을 주문하며 책을 팔고 책 처방도 하는 책방지기입니다. 매일 커피원두의 향을 감별하며 갈아서 내리고, 커다란 도자기 찻주전자에 차를 끓입니다. 팬케이크나 과자를 굽기도 하지요. 동네 주민들이 책을 사기도 하고, 이 건물 미화원 아저씨께는 카페라테를 드리기도 합니다. 방명록에는 슬로베니아에서 온 학자의 서명도 있고 독일에서 온 노인의 이름도 적혀 있지만, 대부분은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벗들의 이름이 나란히 있어요. 이 마을 어린이가 그려놓은 귀여운 그림도 있네요.

‘책방이듬’에서는 인문학 특강과 각종 문화교실도 열리지만, 저는 강사에게 따로 대관료를 받지 않아요. 단지 음료 한 잔씩만 팔아달라고 부탁하죠. 특강과 초대석에 모신 분들께는 차비 정도만 겨우 드립니다. 검푸른 밤이 오면 주방에서 설거지하며 울기도 많이 웁니다. 주민 곁에서 문학의 최전선에서 문화운동을 한다는 자부심은 나날이 무너졌습니다. 이백 만원 가까운 월세에 가위 눌려가며 매달 차곡차곡 빚만 쌓여갔지요.

혼자서 수많은 행사를 기획하고 섭외와 홍보, 포스터 제작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정부의 문화예술지원금을 전혀 받지 못했답니다. 대학 강의료와 특강하고 받은 돈, 저의 저서 인세 등을 책방 유지비용에 다 밀어 넣습니다만…. 풍성하고 탐스러웠던 머리칼이 듬성듬성 빠지더니 이제는 손바닥보다 넓은 원형탈모가 진행 중이지요. 몸은 바싹 마르고 역류성 식도염 증세가 심해졌습니다. 자본으로부터 작은 책방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쓸수록 호수의 물결 속으로 온몸이 잠겨가는 악몽을 종종 꾸었어요.

저 혼자 호숫가의 성에 갇혀 울부짖는 줄 알았습니다. 난생 처음 창업이란 걸 해보고, 난생처음 벽에 페인트를 바르고, 사흘에 걸쳐 바닥청소를 한 지 반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그 사이 낙엽이 졌고 비가 내렸습니다. 책방 앞에 눈을 치우느라 허리를 다친 날이 있었고, 저녁놀에 뺨을 부비며 울던 봄날 저녁이 숱했습니다. 지금도 바람에 흔들리는 문이 출입문을 여는 손님인 줄 알고 일어나기를 몇 번. 당신이 내게 보여준 것들, 백 명이 넘는 벗들의 바람을 잊지 않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안개를 건드리는 꽃잎처럼 오늘 하루 아름답게 시작하겠습니다. 이해 불가능한 것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둥글게 커져가는 탈모쯤이야 원만하려는 제 마음을 덮을 수 없겠지요. 만나고 싶습니다. 어디까지가 그리움일까요?

작년까지만 해도 겨울나무의 편이었습니다. 고독하게 죽음의 언저리에서 시리도록 꼿꼿이 서 있는 겨울나무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름날에 저는 여름나무에게로 기웁니다. 여름나무 곁에 여름나무가 있습니다. 서로에게 얼기설기 가지를 펼치는 즈음, 저는 당신 가까이로 제 마음을 보냅니다. 그곳이 어디든 우정이 어디까지든 우리는 닿으리라 믿습니다. 

김이듬

시인, 2001년 계간 〈포에지〉를 통해 등단. 부산대학교 독문과 졸업, 경상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 김춘수시문학상(2015년), 제7회 김달진창원문학상(2011년) 등을 수상했다. 〈표류하는 흑발〉 등의 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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