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저명론(272호)

한국적 화엄학 연구의 출발점

김잉석 선생. 〈사진제공=월간 불교문화〉

근 · 현대 시기, 한국의 불교학 연구는 1세대를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학문적 1세대 상실의 가장 큰 원인은 국권상실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그 이후의 조 · 태 분규 등으로 인한 혼란을 꼽을 수 있다. 이 시기에 근대적 학문으로서의 불교를 공부했던 많은 이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불교학 연구의 근대적 방법론을 익히고 귀국해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은 시대적 상황이 가지는 한계에 막혀 학문적 활동을 지속하지 못한 채 사장된 비운의 세대라고도 할 수 있다.

현곡(玄谷) 김잉석(金芿石)은 1900년에 태어나 1965년에 별세한 한국 화엄학의 개척자라고 말할 수 있다. 혼란한 시대를 거친 비운의 세대이면서도 자신의 학문적 여정을 놓치지 않고 학문세계에 온몸을 바쳤던, 몇 되지 않았던 1세대 학자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

그는 12세의 나이에 순천 송광사에서 출가했다. 송광사 강원의 전통 과정을 모두 마쳤고, 다시 오늘의 동국대학교인 중앙학림에서 공부한 다음, 1928년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에서 그는 고마자와(駒澤) 대학 예과(預科)를 수료하고, 류코쿠(龍谷)대학 문학부(文學部)를 졸업하였다. 특히 류코쿠 대학에 재학하는 동안 당대 일본을 대표하는 화엄학자였던 유스키 료에이(湯次了榮)에게 화엄을 사사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귀국 후에는 보성중학교에서 역사를, 그리고 1934년에는 중앙학림에서 승격된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의 교수로 재직했다. 이 중앙불교전문학교는 1940년 혜화전문학교로 개칭됐다가, 1946년 동국대학교로 승격됐다.

김잉석은 일평생 배우고 가르치는 삶으로 일관하였다. 그는 당대의 학자들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학문에 진력할 수 있었는데, 매우 드문 경우였다. 한국전쟁 와중에 부인과 두 아들을 잃는 개인적인 비극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대한 일관된 자세를 생애의 끝까지 밀고 나갔다는 점은 그의 학문에 대한 의지와 열정을 짐작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부분이다.

김잉석이 저술한 〈화엄학개론(華嚴學槪論)〉은 1960년 동국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되었다. 필자의 관견(管見)으로 말하자면, 〈화엄학개론〉의 출발점은 ‘賢首敎學に於ける緣性二起論(현수교학에 있어서 연성이기론)’이라는 논문이다. 임상희 교수의 추적에 의하면, 이 논문은 1930년 교토의 류코쿠 대학 재학 시절에 집필된 것으로 논문 용지 325페이지에 이르는 장문의 논문으로 〈화엄학개론〉의 제4편에 상당 부분 반영되고 있다.

〈화엄학개론〉, 1960년 초판본. 동국대학교 출판부.

필자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1930년에 발표한 ‘현수교학에 있어서 연성이기론(緣性二起論)’이 그의 화엄학 연구의 출발점이라면, 〈화엄학개론〉은 그 정점이다. 마지막 논문 ‘불일보조국사’는 그 후의 지향점이라고 할 것이다. 곧 이 세 논저를 모두 감안할 때 비로소 그의 화엄학 연구의 진면목이 읽혀질 것이라는 생각이다.그리고 김잉석의 마지막 논문은 1964년 〈불교학보〉 제2집에 게재한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이다. 이 논문의 결론에서 김잉석은 보조국사의 사상을 특히 화엄과 관련해 “정통적인 화엄의 현수교학(賢首敎學)을 여지없이 비판하여 원돈교(圓頓敎)인 새로운 화엄교학관을 천명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그러한 것이 “타국의 불교에서 볼 수 없는 한국적 불교의 특유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화엄학개론〉 그 자체로 말하자면, 우선 한국의 불교학 연구에 있어서 시대를 뛰어넘는 성과였다는 점에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화엄학개론〉이 출간된 시점인 1960년은 불교학 연구의 거의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불교학 그 자체에 대한 개설서조차 없었던 때다. 그런 상황에서 ‘화엄학’이라는 각론 분야의 개설서가 출간되었다는 그 자체로도 간행의 의의는 적지 않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이 책이 일본학자의 연구에 영향을 받았다는 지적과 기본적으로 개설적 성격에 충실하고 있다는 소극적 평가도 있다. 우선 책의 편제를 보면, 김잉석이 사사했던 유스키 료에이의 〈화엄학개론〉과 그 편차가 거의 동일하다. 유스키 료에이의 〈화엄학개론〉은 제1부 교사(敎史), 제2부 본경(本經), 제3부 교판(敎判), 제4부 교리(敎理), 제5부 수증(修證)으로 구성되어 김잉석의 〈화엄학개론〉과 동일하다.

하지만 김잉석의 제1부 교사(敎史)는 유스키 료에이의 저서와 달리 인도와 중국의 화엄교사는 간략하게 기술하고, 일본의 화엄교사는 생략한 반면, 한국의 화엄교사에 대해서는 상술함으로써 한국의 화엄학 개설이라는 입장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다. 전체 273페이지에 이르는 분량 중에서 약 3분의 1에 해당된다. 그 중 70여 페이지를 한국의 화엄교사에 할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의 화엄전적 전래와 간행에 대한 별도의 개설까지 시도하고 있는 점이 그의 입장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제2편의 ‘본경개설’에서 ‘이통현(李通玄)의 화엄경관(華嚴經觀)’을 별도의 목차로 설정하여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얼핏 보면 단순히 이통현의 화엄경관을 별도의 편제로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볼 수 있지만, 한국의 화엄교사에서 보조지눌 이후 이통현의 화엄경관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이것은 의도적인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조선시대 이후 선종을 중심으로 전개된 한국불교사의 특징을 고려하고, 전통 강원의 과정을 송광사에서 거친 그의 공부이력을 더해보면 필연적인 선택이라고 할 만한 부분이다.

이 두 부분은 화엄학을 바라보는 김잉석의 독자적 관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사사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유스키 료에이의 〈화엄학개론〉과 거의 같은 편제를 보인다는 것은, 사사의 영향일 수도 있고, 또 개설서에 공통되는 특징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세부의 내용 편목에 있어서 구성을 달리하고 비중을 달리한 것은 그의 독자적인 관점이 반영되고 있는 부분이다.

필자는 그의 마지막 논문 ‘불일보조국사’는 〈화엄학개론〉의 연구지향점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방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한국의 화엄교사를 서술하면서 불일보조국사 부분 말미에 “이렇게 국사는 성기문(性起門)의 법계증처과(法界證處果)인 보광명지불(普光明智佛)의 견지에서 부동(不動)의 신념과 요연한 결택을 가지고 직절근원(直截根源)하고 있음에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실로 국사는 화엄교학에 있어서 독특한 존재라 할진저.”(62쪽)라고 특기하고 있다. 이미 〈화엄학개론〉 안에 그의 화엄학 연구가 지향하는 바를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현곡 김잉석의 〈화엄학개론〉은 화엄학의 개설서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화엄학의 개설서에 그치지는 않는다. 스스로의 공부에 출발점이 되었던 전통강원 이력과정에서 배웠던 바, 유학시절에 배웠던 화엄학의 개요를 활용하여 재구성한 결과물이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화엄학개론〉의 근간을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70년대 이후 나타나는 한국 화엄학의 독자적인 연구 풍토의 첫머리를 발견하게 된다고 평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석길암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졸업 후,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원효의 화엄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불교연구원 전임연구원,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를 거쳤다. 저서로 〈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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