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한 포교현장(272호)

국내 유일 전통 무언극(無言劇) ‘관노가면극’ 계승
초파일·단오절이면 신명나는 ‘아라풍물단’

바다를 순우리말로 ‘아라’라고 한다. 푸른 동해아라가 맞닿아 있는 강릉에는 천태종 삼개사(三開寺)가, 그 삼개사에 ‘아라풍물단’이 있다.

올해로 창립한 지 스무 해가 된 ‘아라풍물단’은 사물을 연주하고, 관노가면극의 명맥을 잇는 강릉의 자랑스러운 문화단체다.

한마음이 되어 북공연을 선보이고 있는 아라풍물단.

| 강릉단오제와 관노가면극

강릉은 단오의 전통을 전승하고 있는 전국에 몇 안 되는 지역이다. 지역 주민들과 민속학자들이 전통을 되살리려 노력한 덕분에 강릉단오제는 1967년 국가지정무형문화재 13호로 인정됐고, 2005년 10월 종묘제례악과 판소리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지정됐다.

강릉단오제의 중심에는 제례, 굿, 관노가면극(官奴假面劇)이 있다. 이 중 관노가면극은 대사 대신 춤과 몸짓으로 표현하는 우리나라 유일한 전통 무언극(無言劇)이다.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확실치 않지만, 유래는 고대 강릉지역에 있던 예국(穢國, 동예, 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이 매년 10월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무천(舞天) 의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관아에 소속된 노비 신분이 주로 행했기 때문에, 근대에 와서는 그 명맥이 영영 끊길 뻔 했다. 신분제는 사라졌지만, 관노가면극 예능보유자라는 것은 노비 신분이었던 과거를 고백하는 것에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예능보유자들의 용기 있는 발언과 민속학자들과 고증이 뒷받침 되어 관노가면극은 강릉을 대표하는 무형문화재로 전승되고 있다.

삼개사 법당 앞에서 부처님오신날 공연 한마당.

| 부처님오신날 북소리로 이어진 인연

“둥 둥 둥 둥…….”

2009년 음력 사월초파일, 부처님오신날 절 마당에 모인 대중들은 스물다섯 앳된 청년 김문겸의 우렁찬 북소리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청년이 힘차게 북을 칠 때마다 사람들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도 함께 울리고 있었다. 당시 합창단원이던 최효은 단장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날 청년의 북소리를 듣고 큰 감명을 받은 사람은 최 단장 말고도 둘이 더 있었다.

본래 삼개사풍물단은 청년회원들이 활동하던 단체였다. 1998년에 만들어졌지만 회원들이 하나둘 떠난 후 성인부는 사라지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풍물교육만 진행되고 있었다. 세 사람은 그 길로 삼개사 학생풍물단을 지도하던 청년을 찾아가 사물놀이를 배우고 싶다고 청했고, 청년은 단원들에게 사물(四物) 다루는 법과 관노가면극을 가르쳤다.

북소리에 이끌려온 세 명의 단원으로 존폐의 위기에 섰던 삼개사청년회 풍물단은 명맥을 잇게 됐다. 그리고 단원들을 흔쾌히 받아주었던 김문겸 씨는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도 매주 14명의 단원들을 직접 지도하며,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관노가면극 공연 모습. 양반광대와 젊고 예쁜 여성인 소매각시(小梅閣氏)가 장내를 돌면서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배불뚝이에 검은 옷을 입은 ‘장자마리’는 양반의 하인을 상징한다.

| 배꼽 잡고 사람 잡는 관노가면극

여럿이 공연을 준비하다 보면, 두고두고 회자되는 재미난 일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10년을 함께 동고동락한 사이니만큼 재미난 얘깃거리도 밤하늘의 별처럼 헤아릴 수 없을 정도. 최효은 단장은 그 가운데 가장 즐거운 추억을 골라 들려줬다.

“관노가면극 공연 중에 소매각시가 등장하자마자 관중석에서 폭소가 터졌어요. 키 180이 넘고 체중도 100킬로그램이 넘는 남자단원이 소도 때려잡을 만큼 큼지막한 손으로 각시춤을 추면서 걸어 나왔으니까요. 관객이고 악사고 배꼽을 잡고 정신없이 웃었답니다.

그래도 악사들은 장단을 맞춰야 하니까 겨우겨우 박자를 맞추고 있는데, 태평소를 부는 악사는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와 도저히 악기를 불 수 없었나 봐요. 결국 태평소 부는 걸 포기하고 웃기만 했답니다.”

또 다른 추억 하나. 오죽헌에서 아라풍물단이 처음 관노가면극 공연을 한 날이다. 이날 가면극 경험이 있는 학생단원들은 악기를 연주하고, 어른단원들은 탈을 쓰고 무대에 서기로 했다. 너무 긴장한 탓일까. 40분이면 끝나야 할 무대가 1시간이 넘도록 계속됐다.

악기를 연주하는 학생들은 손목이 저려오고, 급기야는 팔이 끊어질 듯한 고통에 울상을 짓고 있었다. 언제 끝날까 애타게 기다려도, 탈을 써서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어른들의 공연은 야속하게도 끝날 기미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힘겹게 연주를 이어가는 학생들과 눈치도 없이 더듬더듬 열연하고 있는 어른단원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관중들은 얼마나 안타깝고도 우스웠을까?

이 뿐이랴. 평소 잘 놀기로 소문난 장자마리가 공연 중에 구경꾼 틈에 비집고 들어가 곡차 한 잔 얻어 마시고 그 자리서 신나게 노느라 무대로 영영 돌아오지 않은 일도 있었다.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과거로 되돌아 간 듯 단원들의 입가에 벙글벙글 웃음이 번진다. 

2018년 봄, 삼개사 주지 설혜 스님과 함께.

| 아라풍물단, 평창올림픽에 초청돼

매년 사월초파일 즈음이면 삼개사 신도들은 연등을 들고 강릉 시내를 한 바퀴 도는 제등행렬에 참여한다. 이때 아라풍물단의 소임은 행사가 마칠 때까지 악기를 연주하며 동참한 불자들을 격려하는 일이다. 올해도 아라풍물단은 흥겨운 가락으로 삼개사 제등행렬을 이끌 예정이다.

“풍물단에 들어올 때 나이 제한은 없습니다. ‘채’ 들 힘만 있으면 오라고 해요.(웃음) 40대 중반은 젊은 축이고, 50~60대도 있지만 흥에 겨워 악기를 치다보면 팔이 아픈지 다리가 아픈지도 잊게 되지요. 저희가 치는 풍물소리를 듣고 신도님들이 힘이 난다고 생각하면, 힘이 닿는 데까지 기운을 북돋아주고 싶어져요.

초파일 제등행렬 맨 끝에 선 마지막 신도님까지 무사히 삼개사 경내로 들어오면, 저희도 신도님을 따라 절 마당에 들어섭니다. 그리고는 한바탕 신명나게 놀면서 풍악을 울리지요. 신나게 칠 때는 몸이 둥둥 뜬 것처럼 아무 느낌도 없는데, 악기를 풀고 나면 그제야 삭신이 쑤셔옵니다. 기분 좋은 아픔이지요.”

2015년 가을, 강릉요양병원 어르신을 위한 봉사 공연.

사찰 행사 외에도 아라풍물단은 직접 기획하고 발표하는 자체 공연을 준비하고 장애인과 어르신을 위한 봉사 공연에 나서는 한편, 강원도 지역에서 열리는 각종 전통문화공연에도 땀방울을 아끼지 않는다. 일단 공연날짜가 잡히면 주말도 명절도 없이 혹독하게 연습한다. 그래서 적어도 강릉에서는 ‘실력 있는 단체’로 인정받고 있다. 지난 2월 평창동계올림픽 폐막식 문화공연에도 초청돼 세계인이 보는 앞에서 우리 문화를 널리 알린다는 취지 아래 ‘길놀이’를 선보였다.

아라풍물단은 이름난 행사에 참가하는 데 의미를 두기보다는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밝은 조명과 관객들의 환호가 가득한 무대에 서는 시간은 아주 잠깐이다. 이 시간을 위해 단원들은 삼개사 지하에 있는 연습실에서 한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릴 만큼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연습한다. 관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배우와 악사가 되기 위해, 직장과 가정에서 고된 일상을 보낸 뒤에도 늦은 시간까지 연습을 해내는 단원들을 볼 때마다 최 단장은 가슴 찡하고, 고맙고, 안쓰럽다.

단원들은 지금의 아라풍물단이 존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소중한 인연들에 감사한다. 연습장소와 차량을 지원하시는 주지 스님과 삼개사 신도님들, 각종 문화행사에 초청해주시는 단오보존회 국장님, 강산이 변할 동안 한결같은 모습으로 지도하시는 김문겸 선생님, 아내이자 어머니인 단원들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응원하는 남편과 자녀들은 아라풍물단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부지런히 실력을 쌓아 더 좋은 공연으로 보답하는 것, 이것이 고마운 인연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보답이다.

| 구인사서 좋은 공연 펼치고파

배우고 싶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아라풍물단. 부처님의 차별없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단원들은 초파일이면 작은 등을 밝힌다. 최효은 단장은 다년간의 경험 끝에 아라풍물단이 종단 산하단체로서 해 온 포교를 ‘가랑비’에 비유했다.

“처음 입문한 사람에게 여러 가지 조건을 달면 선뜻 배우러 오기가 쉽지 않죠. 종교에 상관없이 성실하게 연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환영합니다. 풍물공부를 하려면 삼개사에 오게 되고, 삼개사에 오다 보면 자연스럽게 불교를 알게 되지요. 이렇게 가랑비에 옷 젖듯 자신도 모르는 사이 차근차근 불교를 접하게 하는 것이 포교가 아닐까요?”

공연을 할 때는 언제나 ‘강릉 삼개사’ 아라풍물단으로 무대에 선다. 천태사찰 삼개사를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다. 좋은 공연을 펼치는 일은 불자의 임무인 ‘포교’의 사명을 수행하는 일이기도 하다.

“둥 둥 둥 둥…….”

다시 힘찬 북소리가 들린다. 1998년 삼개사 풍물단이 처음 문을 연 20년 전부터 청년회 간부로 활동하며 북과 장구를 쳐 온 차은영 단원이다. 북소리가 참 듣기 좋다고 했더니, 여럿이 함께 치는 소리에 비하면 혼자 연주하는 소리는 아무것도 아니란다.

연습을 잠시 쉬어가는 시간, 오색의 연등이 올망졸망 달려 있는 아래서 어느 샌가 단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꿈꾸듯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먼저, 어디 가서나 멋들어지게 공연하려면 단원이 서른 명 정도는 있어야 한단다. 거기다 노력으로 실력까지 더해지면 금상첨화. 10년 전 세 명으로 시작한 풍물단이 이제 서른 명을 꿈꾼다.

다음 소망은 삼개사 어린이들과 함께 무대에 서는 것이다. 강릉 삼개사는 한 달에 두 번, 어린이법회를 봉행한 뒤 장구수업을 진행한다. 세대를 넘어선 가슴 벅찬 합동공연이다. 대망의 마지막 꿈은 구인사 대조사전 앞마당에서 북공연을 하는 것이다. 구인사 영산재, 삼회향놀이에 초청돼 신명나게 풍물을 치고 싶은 소망도 있다.

눈을 감고 상상해 본다. 소백산 골짜기, 넓게 펼쳐진 구인사 대조사전 앞마당에서 깊은 동해아라를 연상하게 하는 푸른 옷을 입은 서른 명의 단원이 한마음이 되어서 사부대중의 눈과 귀와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훌륭한 공연을 펼치는 장면을.

사물놀이에서 쇠는 천둥소리, 장구는 비, 북은 구름, 징은 바람을 상징한다. 하늘과 땅과 마음을 울리는 북소리가 골짜기에 울려 퍼지면, 그 위로 천둥이 치고, 벼락이 내리고, 무거워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구름은 시원한 소나기로 쏟아진다. 천태불자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내 주는 청량한 빗소리는 일심(一心)의 북소리와 함께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깊은 범음(梵音)으로 듣는 이의 가슴가슴마다 메아리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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