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문 (272호)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봉축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라일락 향기 흩날리는 거리에 오색등이 걸리고, 사찰에서는 아름답고 장엄한 등을 만드느라 바쁘다. 지역마다 봉축 법요식이 준비되고 있으며 점등 의식도 다채롭다.

이렇게 등을 밝혀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하는 일은 참으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전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펼쳐지는 봉축행사는 해마다 찾아오는 축일을 기리는 기쁨의 잔치요 찬탄의 의식이다. 우리는 부처님의 탄생을 통해 우리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이웃과 자연을 살펴봐야 한다. 부처님은 왜 오셨는가? 이 질문의 답이 정해져 있지는 않겠지만, 부처님이 우리 곁에 오신 이유는 그의 가르침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다. 부처님이 설하신 모든 가르침이 바로 부처님이 오신 이유다.

바른 불자의 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이다. 불자의 바른 삶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한 삶이다. 정법을 바로 배워 바르게 실천하는 것이 불자의 바른 삶, 그 길을 안내하는 것이 바로 경전이다. 지역마다 시대마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양상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수백수천 갈래의 경전이 있고 해설이 있는 것일 뿐, 부처님의 가르침은 변함이 없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이 한마디를 위해 부처님은 45년의 설법을 하셨고, 이후 수많은 선지식들이 이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고, 이 가르침을 연구하고, 이 가르침을 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법화경〉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비유도 모두 중생의 마음을 밝히면 부처의 마음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깨달은 중생이 부처이고 아직 깨닫지 못한 부처가 중생이다.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깨닫지 못했는가? 〈아함부〉 경전에 숱하게 반복되고 강조되는 그 교설들로부터 불교의 교리와 사상 그리고 철학과 수행이 2,600여 년 시간을 통해 무르익어 왔다. 그 위대한 가르침은 앞으로도 더 익어갈 것이고, 익어갈수록 더 많은 중생이 지혜의 눈을 뜨고 자비의 마음을 열 것이다. 연기적 질서를 관하여 무상과 열반의 길을 알아차리는 삶, 생사가 열반이고 번뇌가 보리임을 알아차리는 자기 혁명의 일대사인연을 체득하여, 온전히 진리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깨침의 삶이요, 불성의 현현(顯現)이다.

그러나 중생심의 껍질은 단단하고 투박하여 자기 안의 불성을 바르게 알지 못한다. 머리로는 알고 입으로는 떠들어도, 마음에 그 앎이 자리 잡지 못해 부처의 삶이 아닌 중생의 삶에 만족해 버리는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번뇌 망상으로 물들어 있는 마음을 파도치는 물결에 비유했다. 출렁이는 물결로는 고요한 수면을 유지할 수 없다. 탐욕과 어리석음이 출렁거리는데 어떻게 불성의 맑고 고요한 모습이 드러나겠는가?

불교는 날마다 새로운 날로 살아갈 것을 가르친다.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삶을 가르친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의 운문(雲門) 선사의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은 날마다 좋은날이기도 하고 날마다 생일날이기도 한 것이다. 날마다 새롭게 태어남으로써 날마다 새로운 발심을 하고, 그 원력으로 불성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이 불자의 참다운 삶이다. 아침마다 중생심의 껍질을 깨부수는 탄생의 기운으로 눈을 뜨는 사람은, 그날 하루를 지혜와 자비로 살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오신날, 연등을 밝히고 봉축의 노래를 부르면서 날마다 좋은 날, 날마다 부처님오신날임을 확고히 인식하자. 오늘 부처님오신날, 청정한 불성을 일깨워 새롭게 태어난 사람은 5월의 꽃바람이 정토에서 불어오는 것임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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