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국사 의천 스님 이야기(271호)

의천 스님은 유학을 다녀온 후 개경 흥왕사에서 고려 ‘제종교장’의 목록에 해당하는 〈신편제종교장총록〉을 펴냈다.

의천 스님은 유학을 다녀온 후 개경 흥왕사에서 고려 ‘제종교장’의 목록에 해당하는 〈신편제종교장총록〉을 펴냈다.

끝없는 학문 연마

의천 스님이 승통의 지위에 오른 것은 스승 경덕국사가 열반한 뒤 한 해가 지난 1067년의 일이었다. 국왕 문종이 출가한 아들 의천 스님에게 ‘우세(佑世)’라는 법호를 내리고 승통으로 임명한 것이다.

열한 살에 출가해 열세 살에 승통(僧統)에 오른 의천 스님. 어린 나이에 승통이 된 그는 어떤 나날을 보냈을까? 우선 심리적인 부담이 매우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느 출가자라면 승통은커녕 초발심의 사미로서 하루하루 계를 지키며 경전을 읽고 수행에만 전념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시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기왕 승통이 된 바에야 명실상부하게 승통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법랍이 높은 스님들에게까지 강의를 하는 일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다 보니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눈코 뜰 새가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고작 2년 남짓이었으나 화엄을 가르쳐주신 스승이 열반한 뒤였으니 도가 있는 이라면 어디든지 쫓아가 궁금한 것을 여쭙고 의문이 풀릴 때까지 토론했다.

김부식(金富軾)이 쓴 개성 영통사 비문은 의천 스님이 출가한 뒤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 비문에 따르면 의천 스님은 학문을 잠시도 쉬지 않아 어느새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했다.

더욱이 불교뿐만 아니라 공맹(孔孟), 노장(老莊)을 비롯한 외전(外典)까지 넓고 깊게 섭렵하여 학자로서의 안목을 높였다. 과거에 스님들은 외전을 접하는 일을 금기시하였으나 석가모니의 참된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라면 그 또한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의천 스님도 훗날 ‘주전론(鑄錢論)’을 펼치는 글에서 “신은 일찍이 삼장(三藏)에 마음을 쏟는 이외에 행하고 남은 힘이 있으면 경사(經史)를 섭렵하여 옛 사람의 어질고 불초함을 관찰했습니다.”라고 했다.

이 밖의 기록에도 의천 스님이 ‘당나라 현수(賢首)의 교관(敎觀)에서부터 돈교(頓敎)와 점교(漸敎), 대 · 소승의 경율론의 장소(章疏)에 이르기까지’ 탐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여기서 장소란 경전이나 논서(論書)의 글귀를 풀이한 글, 그러니까 주석(註釋)을 뜻한다.

의천 스님이 이처럼 불교 안팎의 학문을 섭렵하던 시기의 고려 불교계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갈등을 겪고 있었다. 한 갈래는 문신들의 지지를 받던 화엄종을 비롯한 교종이며 다른 한 갈래는 무신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던 선종이었다. 선종은 신라 말기 중국에 유학했던 도의(道義) 선사가 남종선을 도입한 이래 차츰 규모를 키워나갔는데 의천 스님 당시엔 제법 세력이 커졌다. 그 결과 불교계 내부에선 교종과 선종의 스님들이 세력 경쟁을 치열하게 펼쳐나갔다.

교종의 입장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앞세우는 선종 승려들이 무식하게만 여겨졌을 테고, 참선수행을 통해 진리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선종 승려들은 교종 승려들의 기득권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글을 읽지 못하던 일반 농민들도 선종에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육조혜능처럼 일자무식의 나무꾼조차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뒤 남종선을 크게 일으켰다는 이야기는 선종을 선망하던 민초들의 가슴을 부풀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천 스님은 교종과 선종의 어느 한쪽에 치우칠 생각은 없었다. 그가 승통이라서가 아니라 그의 사상과 판단이 그랬다. 그는 당시의 불학이었던 계율 · 법상(法相) · 열반 · 법성(法性) · 원융(圓融) · 선적(禪寂) 등을 두루 연구했다고 술회했으며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선과 교의 융합을 강조했다.

의천 스님이 ‘〈원각경〉 강의를 시작하며 쓴 글’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敎)를 배우는 사람들은 안을 포기하고 밖으로 구하는 경우가 많고, 선(禪)을 닦는 사람들은 밖의 인연을 잊고 안으로 치중하길 좋아한다. 모두 한군데 치우친 고집이고 양 극단에 막혀 있는 것이다. 마치 토끼 뿔의 길고 짧음을 따지고, 허공에 핀 허깨비 꽃의 짙고 옅음을 다투는 것과 같다…….

교장 결집, 왜 필요했나?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남긴 업적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 교장(敎藏)을 결집한 일은 첫손에 꼽힌다. 여기서 교장이란 용어는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신라 고승의 저술 400여 권을 비롯하여 송 · 거란 · 일본 등에서 수집하여 간행한 대장경에 대한 연구 해석서’를 말한다. 기존 경율론의 삼장(三藏)으로 이뤄진 대장경에 주석[章疏]을 달아 좀 더 체계적이며 논리적으로 대장경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든 총서를 교장이라 하며, 삼장에 교장을 덧붙이면 사장(四藏)이 되는 셈이다.

오늘날 교장을 속장경(續藏經)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런 측면에서 적절하지 않은 명칭이다. 속장경이란 용어는 말 그대로 ‘기존의 대장경을 계속 잇는 대장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면 의천 스님이 목록을 만들고 결집하여 펴낸 교장은 삼장에 대한 연구 논문에 해당하므로 대장경과는 성격이 다르다.

알려지기로는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 일본인 학자 오노겐묘(小野玄妙)가 의천 스님의 교장을 ‘속대장경’이라고 표현한 것을 시작으로 다른 일본인 학자들도 1923년과 1937년에 각각 발표한 논문에서 연이어 ‘속장경’이라 표기한 것이 굳어져 국내 학자들도 별다른 생각 없이 ‘속장경’이라 부른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의천 스님 스스로가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등 자신의 평생에 걸친 작업을 ‘교장’이라고 했는데 굳이 일본인 학자들이, 그것도 성격에 맞지도 않게 명명한 ‘속장경’이란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의천 스님이 교장의 결집이 필요하다고 처음으로 느낀 것은 열아홉 살 때인 1073년경이다. 출가한 지 8년 만에 대장경의 주석서를 직접 편찬하겠다고 자각할 만큼 그의 안목은 성숙했다. 가히 천재적인 학자이자 고승이었다. 어찌 천재성뿐이겠는가. 밤낮을 잊고 불서를 탐독했으며 〈화엄경〉의 선재동자처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의문을 풀고자 했던 열정과 노력의 결과가 바로 교장 결집이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대각국사문집〉에는 열아홉 살 때의 의천 스님이 쓴 ‘대세자집교장발원소(代世子集敎藏發願疏)’란 글이 실려 있다. 세자(고려 12대 국왕인 순종)를 대신해 교장 결집을 발원하는 글을 아버지 문종에게 올린 것이다. 승통인 그가 무슨 이유로 세자를 대신해서 교장을 결집하겠다는 글을 올렸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 글에는 “(대장경에는) 경(經)과 논(論)은 갖추어져 있지만 연구 주석서인 소초(疏鈔)는 결여되었으므로 요나라와 송나라에 있는 백가(百家)의 과교(科敎)를 일장(一藏)으로 모아 유통케 하고자 합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의천 스님은 이처럼 송나라로 건너가 법을 구하고 각종의 주석서를 수집하고자 한다는 뜻을 밝혔지만 이런 꿈은 당시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곧바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의천 스님은 송나라로 가는 길을 계속 모색하는 한편 국내에 전해지던 원효(元曉)와 의상(義湘) 등 고승들의 유적을 참배하고 그 주석서들을 수집해 나갔다.

그 뒤 14개월 동안 송나라를 다녀온 것을 비롯해 교장을 결집하겠다는 꿈을 17년 만에 이루고 1090년 무렵, 〈신편제종교장총록〉을 발간했다. 3권 1책으로 이뤄진 이 책은 그동안 의천 스님이 수집했던 경전 주석서들의 목록집이다. 교장을 간행하기 전 그 안에 수록할 목차를 먼저 정리한 것이다.

이런 절차는 북송 때인 971~983년 사이에 역사상 처음으로 대장경[관판대장경(官版大藏經) 또는 개보대장경(開寶大藏經)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림]을 펴낼 때 대장경 목록집이던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의 분류와 체계를 그대로 따른 것과 같은 방법이다. 〈개원석교록〉은 730년 무렵, 당나라의 고승 지승(智昇)이 편찬한 불교경전의 목록을 가리킨다.

의천 스님은 〈신편제종교장총록〉 서문에 “경론을 비록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그 장소가 없다면 법을 펼 길이 없다.”며 자신이 교장 결집을 발원한 배경을 재차 설명했다. 그런가하면 ‘대선종제종교장조인소(代宣宗諸宗敎藏彫印疏)’란 글에서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 경(經)이며, 경전을 말미암아 지은 것이 논(論)이니, 경은 논으로 말미암아 들어가고 논은 소(疏)를 기다려서 통한다.”고 말해 경전 주석서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밝힌 바 있다.

개보대장경과 초조대장경

의천 스님이 교장 결집을 발원한 것은 그의 청년기에 당시 한창 진행되고 있던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판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고려시대에는 두 차례나 대장경을 조성했는데 처음 새긴 것을 초조대장경, 두 번째 새긴 것을 재조대장경이라 부른다. 오늘날 재조대장경은 팔만대장경 또는 고려대장경이라 불리고 있다.

초조대장경은 송나라 개보대장경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만들어진 대장경이란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매우 크다. 그러나 몽골군이 팔공산 부인사(符仁寺)에 소장되었던 초조대장경을 불태워 없애 오늘날엔 경판은 볼 수 없고, 경판의 인쇄본만 부분적으로 전하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보다는 일본에 훨씬 많은 분량이 전하고 있다.

초조대장경은 1011년(현종 2)부터 새겨지기 시작해 의천 스님의 속랍 32세쯤이던 1087년(선종 4)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몽골군에 의해 소실된 것은 1232년(고종 19)이므로 의천 스님이 열반하고 120여 년 뒤의 일이다.

고려의 선인(先人)들이 초조대장경이나 재조대장경을 조성한 것은 모두 불법(佛法)으로 백성의 마음을 모으고 국난을 극복하려는 발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의천 스님과 관련이 있는 초조대장경을 예로 들면 이렇다.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는 1010년 겨울,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제2차 침략). 이때 고려군은 요나라의 대군을 당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쫓기는 형편이었고, 현종 임금마저 개경을 떠나 멀리 나주로 피난을 가야만 했다.

이처럼 위험한 시기에 고려의 대신들이 대장경 판본을 완성시키겠다고 맹세하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거란의 군사가 스스로 물러났다고 한다. 이는 문인 이규보(李奎報)가 쓴 ‘대장각판 군신기고문(大藏刻版君臣祈告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규보는 재조대장경을 조성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위의 군신기고문을 썼다. 당시 고려는 몽골의 침략에 장기적으로 항전하기 위해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뒤였다.

위 군신기고문의 요지는 “초조대장경이 불법의 힘으로 요나라 군사를 물리치기 위해 만들었으며 초조대장경을 조성하기 시작하자 요나라 군사가 저절로 물러났던 것처럼 온 백성과 신하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 재조대장경을 만들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미뤄볼 때 요나라 군사가 순순히 물러난 것은 고려가 초조대장경을 만들기로 발원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요나라가 개경을 함락하려고 온 힘을 집중시키는 동안 고려의 군사들은 요나라와 개경의 중간 지역인 흥화진, 구주, 통주, 서경 등을 차단했다. 그 일로 요나라의 병참선이 끊어지면서 개경에 주둔했던 군사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채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요나라 군사의 회군과 고려인들이 초조대장경을 조성하기로 한 발원 시점이 절묘하게 맞물렸을 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진 않았다고 하겠다. 사정이 이렇기는 하지만 외적의 침입을 당했을 때 대장경 판각이 온 백성의 역량과 마음을 한 군데로 모으는데 중요한 구실을 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초조대장경은 1011년부터 1087년까지 76년 동안 조성되었다. 송나라 관판대장경이 11년, 고려의 재조대장경이 16년 만에 완성된 것에 비하면 매우 오랜 세월이 걸린 셈이다. 그렇다면 초조대장경은 어째서 76년이나 걸려 완성된 것일까? 이를 두고 몇 가지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 중 설득력을 얻고 있는 주장은 1011년에서 1029년경까지 북송의 관판대장경과 같은 분량을 이미 판각했으며, 그 뒤 송나라에서 새로 번역한 경전을 추가로 판각해서 1087년에 이르러 완성했다는 학설이다.

아무튼 초조대장경 조성은 당시 고려의 국가적인 사업이었을 테고, 승통인 의천 스님은 자신이 태어나기 40여 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경판 인쇄본을 일일이 읽었을 것이며, 증보할 때도 직접 관여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기에 단순히 경율론 삼장만으로 이뤄진 대장경에 교장을 더 보태야 할 필요성을 누차 강조했으며, 틈나는 대로 ‘송나라로 구법여행을 다녀오겠노라’ 뜻을 밝힌 게 아닐까싶다.

그러나 선구자는 외롭고 힘든 법이다. 의천 스님은 교장 결집의 필요성에 대해 부왕은 물론 대신들에게 줄곧 설득했으며, 어떻게든 구법여행을 떠날 작정이었으나 그를 둘러싼 환경은 여의치가 않았다. 왕자 출신이었기에 운신의 폭이 더욱 좁았을지도 모른다.

의천 스님이 열아홉 살 때 교장 결집을 발원하는 글을 올리면서 송나라로 유학할 뜻을 밝히자 문종은 고개를 저었다.

“스님은 언제든 고려국의 왕자 출신임을 잊지 마시오. 그렇기에 아비로서 그 멀고 험난한 곳에 다녀오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니 그리 아시오.”

“마마, 하오나 그런 모험이 없다면 어떻게 법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곤란한 청이오. 더구나 중원을 요나라와 송나라가 양분하고 있는 마당이니…….”

문종은 말을 맺지 못했지만 의천 스님은 부왕의 말뜻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래서 송나라로 구법여행을 다녀오려는 뜻을 속으로 삭여야 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 열망이 자꾸만 커져갔다.

당시만 해도 중국은 서역의 모든 문물이 가장 먼저 전해지던 선진국이었다. 그래서 신라 이후 수많은 출가자들 중 왕족이나 귀족 출신들은 중국에서 유학하는 것을 필수적인 코스로 여겼을 정도다. 따라서 의천 스님처럼 왕자 출신이라면 얼마든지 유학할 수 있는 조건을 지닌 셈이었다. 하지만 어렵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그의 뜻은 암초에 걸리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의천 스님은 당시 송나라에 진수정원(晋水淨源) 등 여러 선지식이 있음을 알고 서신을 주고받곤 했다. 불서를 읽다가 궁금한 내용을 질문하면 자세하고도 친절한 답장이 돌아왔다. 하지만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 의천 스님은 직접 송나라로 찾아가 여러 스승께 법을 묻고 여러 종파의 주석서를 수집하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법을 구하려는 의천 스님의 뜻이 지극하고 간절함을 알게 된 정원법사가 그를 초청한다는 서한을 보내온다.

- 다음호에 계속

이정범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뒤 우리 역사와 불교인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왔다. 저서로 〈서프라이즈 한국사〉, 〈어린이 삼국유사〉, 〈다큐동화로 만나는 한국 근현대사〉, 〈그대 마음이 부처라네〉, 〈시와 소설로 만나는 원감국사〉, 〈붓다가 된 엿장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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