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한 포교현장(271호)

불자들이 손수 지은
57개 번幡 으로 대불사 회향한
경산 장엄사(莊嚴寺) ‘수월회(水月會)’

 

작년 여름, 장엄사 주지 일초(一初) 스님은 사부대중에게
불보살의 위신력을 상징하는 ‘번(幡)’을 손수 지어 올려보자 제안했다.
‘그 어려운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부처님 복덕 밭에 부지런히 복 짓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대중들은 망설였다.
그때, 누군가 묵묵히 바늘과 실을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솜씨이지만 한 땀 한 땀 모든 정성을 쏟았다.
초승달이 보름달로 차오르는 동안,
장엄사 대불사의 첫 번째 번이 완성됐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완성된 번의 명호는 ‘나무대성인로왕보살(南無大聖引路王菩薩)’.
모든 영가를 극락으로 이끄는 불보살의 명호였다.

첫 번째 번이 완성되자 곁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환호했다. 수미산 같이 크고 높은 대불사도 바느질 한 땀부터 시작한다는 평범한 진리가 불자들의 마음속에 불을 지폈다. 너도나도 마음을 내어 불사에 동참했다. 직장을 다니고 집안일을 하는 틈틈이 법당에 나와 수를 놓기 시작했다.

더디고 힘든 자신과 싸움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 번의 특성상 도안을 직접 그려 넣지 못하고 따로 놓고 보는 일이 고역이었다. 칸을 일일이 세고 또 세어 수를 놓아도 ‘아차!’하는 사이 몇날며칠 애써 놓았던 실을 다시 풀어야 한다. 막상 실을 풀 때는 하늘도 야속하지만 돌이켜보면 실을 풀면서부터 마음을 내려놓는, 서른 명 수월회 회원들의 ‘진짜 공부’가 시작된다.

자수를 놓을 때는 도안을 따로 놓고 바느질을 하기 때문에많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번을 걸기 직전 구김이 없도록 조심스럽게 다림질을 하고 있다.
장엄사 원통보전 한 켠에서 정성스럽게 번을 짓고 있는 수월회 회원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수를 놓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제는 숙달되어 능숙하게 하지만 깊은 신심 없이는 해낼 수 없는 일이지요. 장엄사 번 불사를 이끄는 ‘수월회’는 수월관음(水月觀音)의 명호를 따서 주지 스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회원들이 조금이나마 더 ‘수월하게’ 자수 놓기를 바라는 스님의 마음이 담겨있지요.”

장엄사(莊嚴寺) 곽철혁 신도회장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주지 일초 스님은 어떻게 장엄사 주지로 부임하자마자 번을 짓는 대불사의 원력을 세우신 걸까? 일초 스님이 번 불사의 원을 처음 세운 시기는 몇 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태종 감사원 소임을 맡아 전국의 사찰을 돌아보던 스님은 어느 사찰 창고에서 오래 묵혀둔 번 꾸러미를 발견한다. 행사 때 사용한 뒤 아무렇게나 방치된 번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부처님의 신체를 의미하는 번에 대한 신도들의 낮은 인식 때문이다.

8개월에 걸쳐 마침내 대불사를 회향한 장엄사 수월회. 번을 짓는 회원들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격려한 장엄사 주지 일초 스님이 있었기에 가능한 불사였다.

“이런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번을 잘 모실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봤습니다. 고민 끝에 손바느질로 직접 번을 지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면 불자들도 번을 대할 때마다 신심이 나고, 사찰 행사 때도 사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 일초 스님은 새로운 사찰의 주지로 부임할 때마다 번 불사를 추진했는데, 번번이 신도들의 호응을 얻는데 실패했고, 마침내 경산 장엄사에서 오랜 염원을 이룰 수 있었다.

57개 번으로 화려하게 장엄된 장엄사 원통보전.

작년 8월부터 시작된 번 불사는 유난히 추웠던 엄동설한(嚴冬雪寒)을 견뎌냈다. 그리고 지난 3월 25일, 따스한 봄날에 대덕 스님을 비롯한 사부대중을 모시고 자수번 봉불식을 봉행했다. 8개월 동안 회원들이 한 땀 한 땀 쏟아 부은 신심과 노력은, 높이 250㎝ 너비 40㎝ 크기의 57개 번으로 결실을 맺어 장엄사 원통보전을 청정하고 아름답게 장엄하고 있다.

원통보전 조사단 앞에는 수월회 회원들이 특별히 제작한 천태종 중창조 상월원각대조사님 번과 2대 종정 스님이신 대충대종사님의 번을 올렸다. 또 불단(佛壇)에는 아미타불과 문수 · 보현 · 관세음 · 대세지보살님 번이, 신중단과 지장전에도 판관 · 귀왕 · 권속의 번이 가지런히 걸려 있다. 장엄사 신도들은 50여 개의 오색(五色) 대형번이 걸려 있는 원통보전에 들어설 때마다 불보살님들의 위신력으로 가득 찬 우주 공간에 서 있는 것 같은 경이롭고 벅찬 감동을 받곤 한다.

50년 만에 바느질을 다시 시작한 수월회 홍옥숙 회장. 불보살께 받은 가장 큰 가피는 부처님 전에 손수 번을 지어 올린 것이라고 말했다.

“20대 초반에 혼수를 준비하며 바느질을 한 이후 손을 놓았었죠. 50년이 지나 다시 수를 놓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불사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어요. 이렇게 귀한 불사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주지 스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맏언니격인 홍옥숙 수월회 회장은 지난 여덟 달 동안 큰 번 6개와 작은 번 5개를 지었다. 번을 짓는 동안 불보살님께 어떤 가피를 받으셨냐고 질문을 하니 얼굴 한가득 웃음만 짓는다.

“평소에 몸이 아파서 관음정진을 꾸준히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자수를 놓을 때는 몇 시간씩 꼼짝하지 않고 하게 되더군요. 우리 회원들은 바느질 한 땀 할 때마다 ‘관세음보살’을 세 번 부릅니다. 가피라고 한다면 내가 이렇게 아직 힘이 남아있을 때 부처님 전에 자수 번을 손수 지어서 올렸다는 것이겠죠. 우리 회원들은 모두 ‘지은대로 받는다.’는 인과의 법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설사 좋지 않은 일이 생겨도 ‘큰 일 당할 수도 있었는데 부처님 가피 덕에 이 정도로 그쳤구나.’ 생각해요. 그러면 힘든 일이 없지요.”

우문에 현답이다.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가피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번을 짓는 동안 회원들에게는 불보살님의 가피로 영험한 일들이 여럿 있었다. 한평생 무뚝뚝하기만 하던 남편이 번을 짓는 아내를 위해 매일 절에 출퇴근(?)을 시켜줬다거나, 혼기가 꽉 찬 자녀가 생각지도 못하게 좋은 배필을 만나 결혼날짜를 잡았다는 건 얘깃거리도 안 된다. 교통사고가 나서 자동차가 뒤집어졌는데 다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얘기는 마치 꾸며낸 얘기 같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가피는 좋은 도반을 사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삼십 년 넘게 절에 다녔지만 법회 때 만나 인사만 했을 뿐 어떤 사람들인지는 잘 몰랐죠. 이렇게 참하고 예쁘고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불사를 인연으로 서로 알게 되니,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의 큰 가피입니다.”

번을 거는 날, 주지 일초 스님이 번이 걸린 순서와색깔을 확인하고 있다.
각자의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수월회원들. 여럿이서 함께 일하지만 말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이제 장엄사는 부처님 전에 번을 공양한, 큰 보물이 있는 사찰이 됐다. 첫째 보물은 불자들이 정성으로 지어 올린 번이요, 둘째 보물은 좋은 일을 서로 권하고 함께 행하는 도반들이다. 훌륭한 도반이야말로 ‘수행의 전부’라고 가르치신 부처님 말씀처럼 그보다 큰 보물이 어디 있을까.

사람이 하던 일을 기계가 대신하는 시대에 손으로 한 땀 한 땀 만든 자수번을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일은 어지간한 정성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장엄사 수월회의 자수 번 불사는 더욱 드문 일이다. 오색찬란한 번에 깃든 지극한 정성이 장엄사 불보살님의 위신력에 더해져 경산 지역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가리라 믿는다.

번 불사를 통해 좋은 도반을 얻게 된 수월회 회원들이 함께 활짝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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