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불교인의 삶과 신앙(271호)

국민의 1% 불과하지만
이슬람의 거센 탄압에도
굳건한 佛心 이어와

 

보로부두르 사원의 전경.

화교 탄압, 불교 위축 계기

음력 설날 연휴에 자카르타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다르마 박티 (Vihara Dharma Bhakti) 불교 사원을 찾았다. 사람들은 향불을 피우고 절을 하고 있었다. 도교와 유교의 성인들, 삼국지에 등장하는 무인들, 그리고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또한 파고다 모양으로 된 큰 기둥에 신과 인간 사이의 매개체인 부적(符籍)을 태우고 있었다. 탐심이 재가 될 때까지, 집착이 재가 될 때까지, 그리움이 재가 될 때까지. “신이시여, 위대한 영혼들이여,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되뇌며.

인도네시아는 2억 5,300만 명(2016)의 인구를 가진 세계 4번째의 인구대국이다. 인도네시아사람들은 모든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며,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신을 모르는 사람은 조상과 부모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겨 하등동물 취급을 한다.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데, 모든 국민은 국가가 인정하는 종교를 가져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는 게 특징이다. 그래서 국가공휴일에 종교 축일(祝日)이 가장 많다. 주민등록증(KTP)에는 각자의 종교를 쓰는 난도 있다. 2010년 자료로 보면 국민들의 종교분포는 이슬람(87%), 프로테스탄트(7%), 가톨릭(2.9%), 힌두교(1.7%), 불교(0.72%), 유교(0.05%) 순이다. 불교도는 약 130만 명에 달하는데, 동남아 다른 나라보다는 적은 수치이다.

보로부두르는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의 마글랑에 있는 5세기 경 사찰이다.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 식민 지배를 받던 시절, 건설을 위해 대규모 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중국 복건성 출신들이 지나치게 많이 건너와 문제가 됐고, 결국 1740년 앙케 중국인 대학살사건이 일어났다. 1965년에는 중국 공산당과 연계된 공산당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를 계기로 수하르토 32년 군부 정권 반중(反中), 반공(反共) 정책을 시행하게 되고, 유교 및 도교를 포함한 중국 색채가 나는 모든 것을 탄압하게 된다.

이로 인해 중국 출신들은 해외로 탈출을 하였고, 불교 사원은 폐쇄되었으며, 한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1998년 5월, 지나친 탄압을 견디다 못한 화교들의 폭동 사건 이후에도 그들은 고통의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이런 역사적 갈등으로 인해 상당수가 중국계임을, 불교도임을 선뜻 말하지 않는다. 공식 수치보다 불교도가 더 많을 것으로 추측하는 이유다. 다만,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화교에 대한 인식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인도네시아 불자들이 땅그랑사원에서 향 공양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중국계 불교는 유교와 도교, 그리고 불교가 융합된 유 · 불 · 선교(儒·佛·仙敎)의 색채를 띠게 됐다. 또한 낙인(烙印)의 세월을 보내서인지 그들의 믿음은 다른 나라 불교도보다 더 처절하고 신실하고 굳건하다. 인도네시아 불교 신자 중에 주민등록증에 다른 종교를 기록한 사람들도 특별한 날에는 불교사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종교와 관계없이 성묘를 하고 차례를 지내고 절에 가는 것과 유사하다.

보로부두르 사원과 주변의 전경이 아름답다.

두 불교왕조의 발자취

불교가 인도네시아에 전파된 것은 2세기경이다. 인도네시아에는 두 불교 왕국, 즉 스리위자야와 사일렌드라 왕국이 있었다. 스리위자야(Sriwijaya, 650~1377)왕국은 인도네시아 역사상 가장 큰 불교 제국으로 중심지는 수마트라 빨렘방(Palembang)이었다. 7세기~14세기까지 존재했으며 초기에는 소승불교였으나 차츰 대승불교가 된다. 동아시아 불교문화의 중심지였던 이 왕국은 말라카 해협의 전략적 해상요충지에 위치했으며, 일찍 인도와 중국을 왕래하는 항로를 개척한 강력한 해상 무역왕국이었다.

보로부두르 사원의 돌조각에 새겨진 수행자상.

신라 혜초(惠超, 704~787) 스님은 열여섯의 나이에 인도에 공부를 하러가기 위해 당나라 고승 의정(義淨, 636~713)과 같은 바닷길을 택했다. 즉 바닷길을 거쳐 스리위자야에 머물다가 인도에 도착한 것이다.

또 다른 불교 왕국은 순다(Sunda) 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부 자바에서 발흥한 사일렌드라(Sailendra) 왕조로, 대승불교로 8세기~11세기까지 존속된다. 이 왕국의 전성기에 세계 최대 불교유적인 보로부두르(Borobudur)사원이 세워지는데, 770년경에 착공해 825년경에 완공된다. 그러나 산자야(Sanjaya) 힌두왕국에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이 왕국은 저물기 시작하여, 1006년 머라삐 화산의 대폭발로 사일렌드라 왕국은 터전을 잃게 된다.

13세기에 이슬람교가 항구도시 중심으로 인도네시아 군도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15세기 후반 마자빠힛 힌두-불교왕국의 멸망은 인도네시아에서 다르마[業] 의식의 종말을 의미한다. 따라서 많은 불교 유적지, 스투파, 사원 및 비문이 사라지거나 잊혀졌다. 그러나 보로부두르가 존재하고 ‘마하바르타’와 ‘라마야나’의 양대 서사시가 존재하는 한 불교 신화는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땅그랑사원의 모습.

이슬람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 자바 족이나 발리 동쪽 섬 롬복의 사삭(Sasak)족 중에도 불교도는 있다. 이들은 대부분 인도네시아 사람들로 중국계 후손과는 다르게 과거 스리위자야 왕국이나 사일렌드라 왕조에서 이어지는 인도계 불교의 영향을 받고 있다.

화교는 수도 자카르타(Jakarta) 일원에 거주하거나, 수마트라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를 에워싸고 있는 리아우군도 주, 그리고 인근의 주석산지인 방카 - 벌리뚱(Bangka-Belitung) 두 섬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 지역은 모두 중계무역항 싱가포르 항구 인근에 모여 들었던 중국인 후예들의 근거지다. 또한 화교들이 바닷길로 들어왔으므로 자바 북쪽 해안도시인 라슴 · 수라바야 · 찌르본 · 뚜반 · 스마랑에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17세기에 인도네시아로 밀려든 중국계 이민자들인데, 이들 중 다수가 불교도이다.

자카르타 남부 스망기에 위치한 비하라 아무르바 부미(VIHARA AMURVA BHUMI)라는 이름의 중국 사원은세워진지 수백 년이 됐다. 보리수 아래에 계시는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두 종류의 불교사원 ‘끌렌뗑’ · ‘비하라’

앞에서 본 것처럼 인도네시아의 불교는 다양한 불교문화가 혼재되어 발전하였다. 대승불교, 소승불교(상좌부불교), 유 · 불 · 선(儒 · 佛 · 仙)교가 그것이다. 중국식 사원에는 유불선이 혼재된 사원인 ‘끌렌뗑(Klenteng)’과 정통 불교식 사원인 ‘비하라(Vihara)’가 같이 존재한다.

유교와 도교 등 중국의 위대한 영혼을 모신 끌렌뗑(廟)은 멀리서 보아도 화교들의 의례의식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건축양식은 전형적인 중국 문화를 반영하고 있으나, 가끔은 자바 양식과 결합된 사원도 있다. 붉은 색이 지배적이며, 황금을 상징하는 노란색도 보인다. 그리고 용 · 여의주 · 사원 문 · 음양 상징물 · 붉은 양초 및 기타 장식품이 화교 사원의 독특함을 나타낸다.

중국인들은 그들의 부와 안녕을 가져다주는 신과 위대한 영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많은 신을 같이 모시는데, 숭배 받는 분들의 상이 중앙이나 주요 제단에 모셔져 있다. 예를 들면 공자 · 노자 · 장자 · 관우 · 유비 · 장비 · 관음보살 등이다. 어느 사찰에는 중앙 제단에 대지의 여신을, 혹은 자비의 여신을, 혹은 관우를 모시고 있었다. 바다를 건너서 온 중국인들이어서일까? 바다의 신을 모셔 둔 사원도 많았다. 전쟁의 신 혹은 상업의 신을 중앙 제단에 모신 곳도 있었다.

인도네시아 사찰에 모셔진 가네샤 조각상. 힌두교에서는 장애물을 제거해 주는 신으로 행운과 번영을 상징한다.

그러나 부처님을 모신 비하라(精舎)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주된 장식물은 연꽃, 스투파, 부처상, 윤회의 수레바퀴 등이다. 지배적인 색채가 없고 중국의 문화가 특출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끌렌뗑과 비하라는 둘 다 부처님을 숭배하는 장소이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정치적 · 문화적 상황을 고려하였기 때문에, 끌렌뗑은 융합된 유불선 의식이 행해지고, 불교에 대한 예배 장소로서도 법적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즉 서원(書院) 같은 사원(寺院)인 셈이다.

또 인도네시아 국가이념인 빤짜실라(Pancasila)의 첫 번째 원칙인 ‘유일신에 대한 믿음’에 따라 끌렌뗑에서도 부처님은 가장 높은 신으로 불리고 있다. 그래서 사원 이름에 비하라가 자주 등장한다. 끌렌뗑 - 비하라는 승려 아신(Ashin)이 주창한 불교의 다원주의 · 포괄주의 · 비종파주의 사상운동인 ‘부다하야나(Buddhayana)’를 잘 나타내고 있다. 불교의 제단에서 우리는 부다하야나와 대승불교의 사상을 나타내는 상징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즉 석가모니 부처상과 관음보살상, 미륵보살 등과 같은 보살상 등을 볼 수 있다. 기도를 위해서는 향 · 꽃 · 공양물 · 촛불 · 종 등 중국식 도구를 많이 사용한다.

글로독 사원의 부처님상.

글로독(Glodok)에 있는 다르마 박티 사원(Wihara Dharma Bhakti)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시대 초기인 1650년에 중국 남부 복건(福建) 사람들이 세웠다. 금덕원(金德院)이라고도 부르며 고단한 이주 노동자들에게는 마음의 고향과 같은 장소이다. 중국 사원들이 모두 그렇듯이 이 사원 역시 정치적 격변의 재앙 속에서 재건과 복원을 거듭하였다.

중국 설에 찾아간, 자카르타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금덕원에서 말쑥한 차림의 70대 노인을 만났다. 그는 폭동으로 7살 때 고향에서 쫓겨나 부모님의 손을 잡고 굶고 굶으면서 걷고 또 걸어서 자카르타의 차이나타운인 글로독으로 왔다고 했다. 당시에는 우는 것조차 사치였고, 부모님들은 밑바닥에서 새로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부모님께서 항상 들려주신 말씀을 이렇게 털어놨다. “너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자비의 여신 때문이야. 부처님 때문이야. 그래도 계속 꿈꾸면서 걸어가라는 영혼들의 부름을 들었다.”고. 그는 또한 아들에게 “98년 폭동 때 죽은 이들의 이름을 쓴 바틱(batik)을 이곳에 모셔다 놓았다. 이분들을 잘 모셔라.”고 말해두었다고 이야기했다. 위대한 영혼들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 맑은 눈물이 나온다고 노인은 조용하게 말하였다.

금덕원(金德院)과 찌르본 사원에서

뜰에는 큰 보리수나무가 바람소리를 내면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곳에서 어울리지 않는 낯선 풍경을 만났다. 사원 뜰에 앉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모두 헐벗고 굶주린 모습이었다. 사원의 경비아저씨가 나와 줄지어 앉으라고 호통을 쳤다. 그들은 미라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줄지어 앉았다. 아이들은 따로 줄을 세웠다.

사원 경비가 아이들에게 돈을 나누어주고 있다.

30대 초반의 젊은 남자가 여자 친구와 함께 와서 이들에게 2000루피아(한국 돈 160원)씩 나누어 주고 있었다. 그들은 기계적으로 돈을 받고 표정 없이 사라졌다. 자본주의의 또 다른 모습을 조롱하듯 사원 앞마당의 보리수는 푸르고 푸르렀고, 잔혹하게 아름다운 부켄벨리아는 붉은 색을 흩뿌리고 있었다.

찌르본(Cirebon)에 있는 사원(Vihara Dewi Welas Asiesh)은 밀물에 의해 건립되었고 ‘깨달음을 더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 사원이다. 1595년에 세워진 오래된 사원답게 낡고 원색적이었다. 이 사원에 명나라 때의 대항해가인 정화(鄭和, 1371~1433)가 탔던 선박의 닻이 모셔져 있어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찌르본을 갈 때마다 정화의 북소리를 다시 듣기 위해 그리고 닻이 잘 보관되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꼭 들리곤 했다. 이 사원에 있는 내 키보다 훨씬 더 큰 붉은 초는 그들의 불심(佛心)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붉은 자기로 만든 벽화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글로독에 있는 사원 금덕원 입구에는 구걸을 하는 사람들이 앉아 있다.

부처님과 함께 다른 사원처럼 삼국지에 나오는 성인들도 신당에 모셔져 있었다. 자비의 신, 관음보살, 대지의 신, 처벌의 신, 바다의 신, 전쟁의 신, 장사의 신, 그리고 부엌의 신을 모신 제단도 있었다. 대승불교도들의 기도처로 사용하는 강당도 있었고, 잡신을 모신 곳도 있었다. 하늘의 신을 모신 건물의 처마는 하늘을 향해 곡선을 그리면서 아름답게 올라가고 있었다. 이 사원에서 일찍 남편을 여위고 삶의 절반을 외로움과 슬픔을 이겨내며 살아온 한 여인을 만났다.

“키 큰 초를 살 돈은 없었지만 관음보살의 자비 속에서 작은 초에 신애(信愛)를 담으면서 어른이 되었답니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아픔에 그림자라도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던 시절이 있었지요. 사원에서 가까운 바다에 가면 방파제가 탐욕을 막아주듯이 위대한 영혼들을 만나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진 마음도 모두 축복이 된답니다. 하늘의 모든 것이 바다에 비추어지듯이 바다에서 지평선 저 너머까지 오가는 조상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조국을 그리워하며 꿈틀거리며 낮게 낮게 살다가 가셨습니다. 위대한 영혼들을 통해 기품 있게 살라고 부모님이 말씀하셨지요.” 그녀의 어깨너머 자바 해[Java Sea]가 노을에 물들고 있었다.

사공경

시인. 1999년부터 한·인니문화연구원의 원장으로 20년 가까이 재직하며 한국과 인도네시아 문화교류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1997년 ~ 2011년 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 사회과 교사, 2016년 ~ 2017년 재인도네시아 문화예술 총연합회장을 역임했다. 2015년 K - TV에 방영된 ‘구루 사공의 길’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했으며, 저서로 〈자카르타 박물관 노트〉, 〈서부 자바의 오래된 정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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