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생로병사(271호)

태어난 일체 존재는 모두 죽는다. 죽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별다른 설명이 필요할 리 없다. 옛 어른들이 말씀하지 않았는가. 태어난 이는 반드시 사라지고, 만난 이는 떠난다고. 너무나 평범한 죽음이라는 이 명제, 그렇지만 우리 중에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은 없다. 우리는 부모형제나 친지 등 가깝고 먼 이들과 죽음으로 이별하면서 죽음을 느낄 뿐이다. 이것 말고는 죽음을 추상적으로 이해하는 방법밖에 없다.

물론 부처님과 같이 특별한 능력을 가진 분들이 혜안으로 죽음을 간파하고 우리들에게 사후 윤회하는 실상을 알려주시지만 이는 종교적 세계이지 일상적 세계라고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평범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세계는 아니다.

필자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님을 여의었다. 아버님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달려갔을 때 아버님은 이미 차디찬 시신이 되어 누워 계셨다. 귀향하는 기차 안에서 내가 도착할 때까지 아버지는 살아계실 것이라는 나의 환상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당시는 불교의 가르침에 깊이 젖어 있을 때라 관념적으로만 무상(無常)을 이해했다. 그로부터 3년 뒤 형님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 당시 나는 서울의 어느 작은 사찰에 머물 때였는데 연락이 닿지 않아 뒤늦게 형님 집으로 갔을 때는 아버님 때보다 더욱 죽음이 진행된 상태였다.

이렇게 스무 살 전후에 아버지와 형님의 죽음과 마주했었다. 그 후로도 세월이 흐르며 어머님을 비롯해 수많은 집안 어른들과 사별했다. 어머님을 보내드릴 때는 나이가 좀 든 뒤라 슬픔 속에서도 준비된 죽음을 맞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극정성 아미타불을 염하며, 어머님이 편안히 떠나가시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어머님이 떠난 지도 8년이 돼 가는 지금, 아직도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과 죄스러움은 덜어지지 않고 있다. 어리석은 중생의 마음이라 그럴까?

불교에서는 흔히 죽음을, 헌 옷을 벗어놓고 새 옷을 입는 과정이라는 비유로 설명하곤 한다. 설명이야 수긍하지만 완전한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우리네 처지에서는 심정적으로 잘 다가오지 않는다. 또 폐나 심장의 정지, 뇌의 죽음과 같은 생물학적 사망으로 죽음을 다 설명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생물학적 사망만으로 죽음이 다 설명되고 수용되어졌다면, 역사 이래 수많은 죽음 담론이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동양의 성자로 추앙되는 공자는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 수가 있는가?’ 하며, 사후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그리스철학에서는 죽게 되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영혼은 육체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누리지만 선한 자는 천상에 나고 악한 자는 지옥에 나며 천상이나 지옥은 천 년 이후에 선택에 따라 다음 생을 받는다고 한다.

기독교에서의 죽음은 육체의 죽음을 말하며, 영혼은 죽지 않고 신에 의해 심판을 받은 뒤 천당이나 지옥에 보내진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신의 명령을 거부한 인간은 죄지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죽게 된다고 가르친다. 사후 영혼은 신으로부터, 생명으로부터 단절되어 철저한 어둠 속에 비존재 속에 버려져 있다가 나팔 소리에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을 기독교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철학이나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육체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설명하는 방식은 영혼불멸설이다. 이에 비해 동양의 유교에서는 사람의 태어남은 기가 모여서 된 것이고, 죽음은 기가 흩어진 것으로, 기운이 소진되면 혼기(魂氣)는 하늘로 올라가고 형백(形魄)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는 영혼사멸설의 물질적 세계관이라고 하겠다.

 

불교에서의 가르침은 독특하다. 인간은 색[形色] · 수[感受] · 상[表想] · 행[意圖] · 식[認識]이라는 오온[要素]의 화합물이라고 하며, 이들은 연기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오온으로 형성된 일체는 찰나에 일어나고 찰나에 소멸하여 동일한 형태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또 오온이 이뤄지고 흩어지는 것은 오로지 지은 업에 의해서라고 한다. 이 업으로 육도를 돌고 도는 윤회를 하는데, 이 윤회를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죽음이 끝이든 끝이 아니든, 우리가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또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과정이 죽음이라고 한다면 죽음을 무시하기보다는 죽음과 당당히 마주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죽음의 고통을 벗어나야 한다고 대개의 종교는 가르친다. 죽으면 다 끝난다고 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거나 아무렇게나 살아가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죽음의 고통을 벗을 수도 없고, 오히려 죽음의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죽음 이후, 다시 말해 사후에 극락왕생하라고 가르친다. 영원한 즐거움이 가득한 나라, 아미타부처님의 국토인 극락세계에 태어나면, 죽음의 고통뿐만 아니라 영원히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구에게나 언젠가 오는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는 불교수행으로 ‘십념왕생원(十念往生願)’이 있다. 임종 때에 아미타불을 열 번 염송하면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인데, ‘나무아미타불’의 육자(六字)염불이나 ‘아미타불’의 사자(四字)염불이 권장된다. 혹자들은 여섯 자 염불 열 번 하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왕생극락을 보장할 수 있냐고 힐난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임종에 이르면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며 염불 열 번 하기란 정말 어렵다. 평소 염불로 수행일과를 삼는 행자도 자신이 평소 염불수행을 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리곤 한다. 육신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염불을 한다는 것은, 평소 일념수행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쉽게 달성할 수 없다.

염불 삼매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 한 과정에 불과하게 된다. ‘육신의 죽음에 끌리지 않을 수 있을 때 해탈은 이뤄진다’고 성현들은 설파한다. 그렇다. 늘 염불 삼매 속에 머물며 죽음을 마감할 때여야 삶의 여정을 온전히 마치고 윤회를 끝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성운

동국대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학술연구교수로, 대한불교조계종 의례위원회 실무위원, 불교 의례문화연구소 연구실장을 맡고 있다. 동방문화대학원대 · 동국대 · 금강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불교의례, 그 몸짓의 철학〉, 〈한국불교 의례체계 연구〉, 〈천수경, 의궤로 읽다〉, 〈삼밀시식행법해설〉(공저)의 책을 썼고, 불교 의례문화와 언어문법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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